ㅡ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中, 민음사
2019/10/30
처음 30p 정도 까지가 고비. 지금까지 여자들이 글을 제대로 쓸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며 여자들에게 돈과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저자가 방문하는 장소와 관련시켜 조금은 장황하게 늘어놓는데, 그러다보니 초반에는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번에 문장이 묘사하는 풍경과 생각의 흐름이 머릿속에 그려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조금만 참고 저자의 생각을 따라 흘러가는 그 문체에 점점 익숙해지고, 묵독만으로 읽는 게 아니라 입으로 문장을 되뇌며 읽다보니 크게 난해한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의미로 문체가 독창적인 이유는 아마도 저자가 살았던 당대 남성들이 사용하는 문체가 아니라 여성, 특히 자신만의 문체를 고안하기 위한 고민의 결과물일 거라고 본다.
어느 성에게나 삶은 힘들고 어려운 영속적인 투쟁입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용기와 힘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같이 환상을 지닌 피조물에겐 그것은 아마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필요로 할 겁니다. 자신감이 없다면 우리는 요람에 누운 아기와 마찬가지이지요. 이 측정할 수 없이 가벼운, 그러나 무한한 가치가 있는 자질을 어떻게 해야 가장 신속하게 획득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함으로써 가능하겠지요. 자기 자신에게 다른 사람보다 천성적으로 우월한 점이 있다고 느낌으로써 가능할 겁니다. 그러므로 통치해야 하고 정복해야 할 가장에게 있어서 다수의 사람들, 사실 인류의 절반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느끼는 것은 막대한 중요성을 가질 겁니다. 그것이 실상 그의 권력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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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지금까지 수 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실제 크기의 두 배로 확대 반사하는 유쾌한 마력을 지닌 거울 노릇을 해왔습니다. 그 마력이 없었다면 지구는 아마 지금도 늪과 정글뿐일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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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폴레옹과 무솔리니는 여성의 열등함을 아주 힘주어 강조합니다. 만일 여성이 열등하지 않다면 거울은 남성을 확대시키기를 그만둘 테니까요. 그것은 여성이 남성에게 무척 빈번히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일면 도움이 됩니다. 남성이 여성의 비판을 받고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설명해 주지요. 여성이 남성들에게 이 책은 좋지 않다거나 이 그림은 형편없다거나 그 밖의 어떤 비평을 할 때마다, 똑같이 비평하는 남성들에 의해 야기되는 것보다 더 큰 분노를 일으키고 더 큰 고통을 준다는 사실도 설명해 줍니다. 만일 여성이 진실을 말하기 시작한다면, 거울 속의 형체는 오그라들 것이고 삶에 대한 적응력도 감소될 것입니다. 아침 식사와 저녁 식사에서 최소한 실제 크기의 두 배인 자기 모습을 볼 수 없다면 그가 어떻게 계속해서 판결을 내리고 원주민을 교화하며 법률을 제정하고 책을 집필하며 정장을 차려입고 연회에서 장광설을 늘어놓을 수 있겠습니까?(55-57p)
여성이 남성들이 쓴 픽션에서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녀를 최고로 중요한 인물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매우 다양하며, 영웅적이거나 비열하고, 빛나거나 천박하며, 무한히 아름답거나 극단적으로 가증스럽고, 남성만큼 위대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 생각엔 남성보다 더욱 위대한 인물이니까요. 그러나 이것은 픽션에 나타난 여성입니다. 실제로는 트리벨리언 교수가 지적하듯이 방에 갇혀 구타당하고 내동댕이쳐졌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주 기묘하고 복합적인 존재가 생겨납니다. 상상에 있어서 여성은 더없이 중요한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전적으로 하찮은 존재입니다. 시에서는 첫 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여성의 존재가 고루 퍼져 있지만, 역사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픽션에서 그녀는 왕과 정복자들의 삶을 지배하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손가락에 강제로 반지를 끼워준 어느 부모의 아들에 딸린 노예였습니다. 문학에서는 영감이 풍부한 말들, 심오한 생각들이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녀는 거의 읽을 줄 모르고 철자법도 모르며 남편의 재산에 불과했습니다.(67-68p)
우선 조용한 방이나 방음장치가 된 방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이 자기만의 방을 갖는다는 것은 그녀의 부모가 보기 드문 부자이거나 대단한 귀족이 아니라면 19세기 초까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아버지의 아량에 달려 있던 용돈은 옷을 사 입는 데나 족할 정도였으므로 그녀는 키츠나 테니슨, 칼라일처럼 가난한 남성들에게도 허용되었던 도보 여행이나 짧은 프랑스 여행, 누추한 곳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가족의 압제와 권리 주장으로부터 보호해 줄 독립된 숙소 등 그녀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었습니다. 그런 물질적 곤경도 만만치 않았지만 비물질적 시련은 더욱 가혹했습니다. 키츠와 플로베르와 그 밖의 천재적인 남성들이 몹시 견디기 힘들어했던 세상의 무관심이 그녀에게는 무관심 정도가 아니라 적대감이었습니다. 세상은 남자들에게 말하듯이 “네가 원한다면 써라. 내게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글을 쓴다고? 네가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라고 말하지요.(81-82p)
그러나 거의 예외 없이 여성은 남성과 맺는 관계를 통해서만 제시됩니다. 제인 오스틴의 시대까지 픽션의 모든 위대한 여성들이 다른 성의 눈으로 보였을 뿐 아니라 다른 성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보였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남성과의 관계는 여성의 삶에서 아주 자그마한 부분밖에 차지하지 못하는데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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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런 이유로 픽션의 여성들은 특이한 성격으로 나타나겠지요. 놀랄 만큼 극단적으로아름답거나 극단적으로 혐오스러운 존재이고, 천사 같은 선함과 악마 같은 사악함 사이에서 동요합니다. 한 남성이 자신의 사랑이 상승하는가 침체하는가에 따라서, 또는 순조로운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여성을 보기 때문이지요.(126-127p)
예를 들어 남성이 문학에서 오로지 여성의 애인으로만 묘사되고, 다른 남성의 친구 또는 군인, 사상가, 공상가로 제시되는 일이 전혀 없었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그들이 차지할 수 있는 역할이 얼마나 적고, 문학은 얼마나 극심한 손상을 입었을까요! 아마 오셀로 같은 인물이 대부분이고 안토니 같은 인물도 상당수 있었겠지만 시저나 브루투스, 햄릿, 리어, 자크는 없었을 것이며, 문학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빈곤해졌을 겁니다. 여성에게 닫힌 문 때문에 실제로 문학이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빈곤해진 것처럼 말이지요.(128p)
남성은 응접실이나 아이 방의 문을 열고 여성이 아이들 가운데 있거나 무릎 위에 수놓을 천을 올려놓고 앉아 있는 것을ㅡ어느 경우이건, 삶의 다른 질서와 다른 체계의 중심으로서 그녀를ㅡ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세계와 법정이나 하원 같은 그 자신의 세계의 대조로 인해서 이내 그의 심신은 상쾌해지고 활력을 찾게 될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대화에서도 자연스러운 견해의 차이가 드러날 것이며 따라서 그의 고갈된 생각들은 다시 풍부해지겠지요. 그녀가 그와는 다른 매개체를 통하여 창조하는 광경을 봄으로써 그의 창조력은 되살아나고, 그의 메마른 마음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무엇인가를 다시 도모하게 될 것이며, 그녀를 방문하려고 모자를 썼을 때 자기에게 결여되어 있던 어구나 정경을 발견할 것입니다. 존슨 같은 이에게는 트레일 같은 여성이 있었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그녀에게 집착하는 것입니다.(132-133p)
나는 그 책을 펼쳤습니다. 남성의 글을 다시 읽는 것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여성의 길을 읽은 후에 그것을 읽자 아주 직선적이고 대단히 솔직하게 느껴졌지요. 그 글은 마음의 자유와 일신의 자유분방함, 스스로에 대한 커다란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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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두 장을 읽고 나자 어떤 그림자가 책장을 가로질러 드리워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곧고 검은 막대기로 'I'자 모양의 그림자였지요.
(...)이 'I'가 더할 나위 없이 존경할 만한 'I'이고, 정직하고 논리적이며, 견과처럼 단단하고, 몇 세기 동안의 훌륭한 교육과 질 좋은 영양 공급으로 다듬어졌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 'I'를 존경하고 경탄합니다. 그러나 가장 곤혹스러운 점은 그 'I'라는 글자의 그림자 속에서 모든 것의 형체가 안개처럼 사라졌다는 것입니다.(150-151p)
“지난 백 년 동안의 위대한 시인들은 누구인가? 콜리지, 워즈워스, 바이런, 셸리, 랜더, 키츠, 테니슨, 브라우닝, 아널드, 모리스, 로제티, 스윈번ㅡ여기서 멈춰도 될 것이다. 이들 중에서 키츠와 브라우닝, 로제티를 제외하곤 모두 대학 출신이며, 이들 세 명 중 한창 젊은 나이에 목숨을 빼앗긴 키츠만이 유복하지 않은 유일한 시인이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야만적이며 서글픈 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로서, 시적 재능이 내키는 대로 바람처럼 불어 가서 빈자에게나 부자에게 똑같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거의 진실성이 없다. 엄연한 사실로서, 이 열두 명 중에서 아홉 명이 대학 출신이었고, 이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건 영국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수단을 획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엄연한 사실로서, 나머지 세 명 중에서 브라우닝은 알다시피 유복했다. 만약 그가 유복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사울」이나 「반지와 책」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러스킨도 아버지의 사업이 번창하지 못했더라면 「현대 화가들」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로제티는 적지만 개인 수입이 있었으며, 게다가 그는 그림을 그렸다. 그중에 키츠만 남게 되는데 운명의 여신은 그가 젊을 때 그를 살해했다. 정신병원에서 죽은 존 클레어나 낙심한 마음을 잠재우려고 상용한 아편으로 살해된 제임스 톰슨처럼 말이다. 이런 것들이 끔찍한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을 직시하기로 하자. 영국의 어떤 결함으로 인해서 요즈음뿐 아니라 과거 이백 년 동안에도 가난한 시인들은 아주 작은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는 것ㅡ한 국민으로서 우리에게 대단히 불명예스러운 일이긴 하지만ㅡ은 명백한 사실이다. 진심으로 말하건대 우리는 입으로는 민주주의에 대해 말하지만, 실제로 영국의 가난한 집 아이들은 위대한 작품을 산출하는 지적 자유로 해방될 희망이 아테네 노예의 아들만큼이나 없는 것이다.”(162p)
ㅡ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中,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