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그 외

ㅡ 백세희,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中, 흔

mediokrity 2019. 11. 13. 10:06

2019/11/13

 

1. 저자의 상담 기록을 보고 느낀 바는 극단적인 사고를 경계해야겠다는 것이다. 조금 부연하자면 화가 났을 때 사람에게 화를 내지 말고 그 행동 자체에 화를 내야 한다. 내가 지금 화가 난 이유는 사람자체가 싫어서라기보다는 이 사람이 한 행동이 싫은 것이고, 그는 이런 모습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를 화나게 한 행동 하나만으로 그를 싫어하는 것은 극단적인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의 모든 행동을 이해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니까. 다만 그와 내가 시간을 쌓아가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일 거라는 가정 하에, 그가 보여주는 수많은 모습과 행동 중 단면만 보고 확대해석 하지 말자는 정도로 이해했다. 이런 성숙한 행동을 보인다면 원만한 인간관계와 더불어 관계에서 싸움의 횟수를 대폭 줄일 수 있지 않을까.

 

2. second guess를 상황에 맞게 적당히 사용한다면 눈치가 빠른, 분위기 파악을 잘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의심이 많고, 그렇다고 하나하나 곱씹어보는 것도 적잖이 피곤해하는 나에게 이 ‘적당히 사용하기’란 언제나 어렵다. 그 중간 어딘가를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족으로 미드 In Treatment에도 나오지만 상담의도 전문 상담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인간을 평생에 걸쳐 주기적으로 만나는 일이란 어떤 일일까? 돈 버는 일이 참 힘들다.

 

 

 

그런데 저는 생각만 열심히 해요.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으면서요. 아무것도 안 하면서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죠.(67p)

 

 

과연 어떤 행동 하나하나가 ‘나를 싫어해서’, ‘나를 좋아해서’를 대표할까요? 친구의 행동도 친구가 싫다기보다 그 친구의 행동이 싫었던 거잖아요. 지금은 상대의 어떤 행동 하나하나를 ‘거절’로 해석해서 받아들이고 있어요.

(...)

누굴 만나든 절대적인 선은 없거든요. 불만도 있을 수 있고요. 늘 부분과 전체를 구분했으면 좋겠어요. 하나가 마음에 든다고 이 사람 전체가 다 마음에 들고, 하나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전체가 싫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좀 다르게 생각하는 시도를 하면 좋겠어요.(83-84p)

 

 

-저는 아주 깊이 인식하고 있어요. 그런 일에 너무 골몰하니까 작은 말도 천둥처럼 들려요. 예를 들어 제가 글쓰기 모임 때 렌즈를 빼고 안경을 썼어요. 그런데 반응이 좋은 거예요. 한 명이 “야 안경 쓰니까 귀여운데? 너 아예 안경 쓰고 다녀라”라고 말했어요. 그럼 안경 벗으면 구리다는 거잖아요.

-그래요? 이야기가 그렇게 가나요?

-극단적이죠? 아무튼, 그게 기분 나빴어요. 그리고 사진을 다 같이 찍었는데 여자 친구는 저한테 사진발이 너무 안 받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남자애들한테 “진짜 얘 사진발 안 받지 않아?”이랬는데 걔네가 “아니 똑같은데”이러는 거예요. 한 명은 오히려 사진발 잘 받는다고 하고요. 그래서 기분 나빴어요.

-본인은 아니라고 생각했나요?

-네 저는 그 사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아, 나는 그냥 못생겼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가면 또 못생긴 게 되나요?

-저는 못생긴 게 돼요. 극단적이니까요. 죽고 싶다.(120p)

 

 

그렇게 기억을 되짚다 보니 문득 ‘그 사람 변했어’가 무용한 말이 되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한결같은 사람이 된다거나, 혹은 그래주기를 바라는 게 어떤 이에게는 아주 혹독한 짐일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삶이 그저 살아남는 일이 되어버릴 때, 생존이 차지하는 비중 때문에 그 외의 모든 요소는 목소리를 내지 못할 때, 그 상태로 시간은 무섭게 지나가고 결국 많은 것들이 메마르고 썩어버릴 때, 그런 상황에서도 한결같기를 바란다는 건 이기적인 바람이자 모순 아닐까.

이모의 삶은 이렇게 신경 써서 떠올리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이모를 덮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랬으리라고 나는 상상해본다. 자기 자신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면 주위 많은 것들에 대한 의지도 함께 사라진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관여하고 싶지 않고, 결정적으로 함께하고 싶지 않아진다. 관계에 대한 욕구를 상실하고 철저히 혼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

리베카 솔닛은 「멀고도 가까운」에서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하고, 그다음에 상상해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내안에 없는 씨앗은 절대 자라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타인과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 안에 없는 걸 만들어낼 방법은 상상과 공부다. 감정이입 역시 공부하고 상상해야 할 때가 있다.

(...)

내가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이입할 수 없는 감정을 배우고 상상하는 것. 그게 타인을 향한 애정이며 내 씨앗과 상대의 씨앗을 말려 죽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다.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끈을 놓지 않는 마음.(190-192p)

 

 

ㅡ 백세희,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中, 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