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국내소설

ㅡ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中, 창비

mediokrity 2019. 11. 25. 09:12

2019/11/24

 

 

 

나는 언니의 프로필 사진을 볼 때마다 대체 왜 저렇게 하지, 하고 생각했다. 정말 왜 저렇게 할까. 나라면 그러지 않을 텐데. 하루에도 몇 번씩 회사 사람들과 메신저로 업무를 주고받는데. 거기에 남자친구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진이 떠 있으면 얼마나 프로답지 못해 보일지, 한번쯤 생각을 해볼 텐데. 나라면 내가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할 수 있는 사적인 인간이라는 거, 최대한 떠올리지 못하게 할 텐데. 매일 오분씩 지각하지 않을 텐데. 어차피 오분 동안 일을 더 하거나 덜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라면 그냥 오분 일찍 일어날 텐데. 나라면 머리를 좀 짧게 자를 텐데.(25p)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가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 거. 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28p)

 

 

감사합니다, 선생님.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63p)

 

 

“우리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어요?”

“네.”

“음····· 제가 말을 잘하는 게 아닐까요?”(96p)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와 같은 것이었다. 평생 들어본 적이 없는 아주 고귀한 소리가 날 것이다.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면 특유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것이다. 너무 매혹된 나머지 그 소리를 알기 이전의 내가 가엾다는 착각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어른,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그걸 놓을 충분한 공간이 주어져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집 안에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기 전에 그것을 놓을 각이 나오는지를 먼저 판단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부족해도 어떻게든 욱여넣고 살면 살아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이 아니라 피아노 보관소 같은 느낌으로 살면 될 것이다. 그랜드 피아노가 거실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테고 패브릭 소파와 소파스툴, 원목 거실장과 몬스테라 화분은 둘 엄두도 못 낼 것이다. 거실을 통해 부엌으로 가려면 한가운데로 가로지르지 못하고 발뒤꿈치를 들고 피아노의 뒷면과 벽 사이로 겨우 지나가거나, 기어서 피아노 밑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여태까지 단 한번도 충분하다거나 여유롭다는 기분으로 살아본 적 없는 삶이었다. 삼십대 중반, 이제야 비로소 누리게 된 것들을 남은 인생에서도 계속 안정적으로 누리며 살고 싶었다. 이십평대 아파트에는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지 않는다. 그것이 현명한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142-143p)

 

앞서 세 번의 회사를 절대 허투루 다닌 게 아니었다. 처음 한달이 중요했다. 이때 일찍 출근해두면 그 이후부터는 아무리 늦게 와도 ‘원래 일찍 출근하는 앤데 오늘은 좀 늦네’가 되고, 초반 한달을 늦게 출근해버리면 그다음에는 아무리 일찍 와도 ‘원래 늦는 앤데 어쩐 일로 일찍 왔대?’ 소리를 듣는다.(161-162p)

 

 

 

ㅡ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中,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