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국외소설

ㅡ 제니퍼 이건, <깡패단의 방문> 中, 문학동네

mediokrity 2019. 12. 5. 09:40

2019/12/4

 

즐거운 연말 리스트의 시간이다. 올해가 10년대의 마지막 해이다보니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best 말고도 2010년대의 best도 같이 뽑아놓은 경우가 많았다. 그 중 반복되는 책이 몇 권 있었는데 그 중 하나라 집어 들었다. 책 제목이 끌리기도 했고.

각 챕터마다의 화자가 다르다. 한 이야기에서 지나가듯 등장하거나 큰 비중이 없던 사람이 다른 챕터에서는 중심 화자로 나오는 식으로 이야기가 확장되며 이어진다. 마치 이야기로 이어달리기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끝까지 보면 모든 등장인물이 유기적으로 다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과정을 되게 매끄럽게 잘 썼다. 이 책과 같이 전형적인 소설의 형식을 깨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책을 처음 보는 게 아니라서 대단히 신기하거나 엄청 새롭다고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파워포인트 같은 경우는 재밌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형식도 형식인데 내용 자체가 흡입력이 있다 보니 독자의 입장에서 화자가 수시로 바뀌고, 등장인물이 많은 경우에 흔히 느낄 수 있는 산만함이나 복잡함을 주지 않고 이야기의 긴장을 잘 유지하며 끌고 가는 점이 훌륭했다.

 

다음 책은 아마도 아직도, 여전히 안 읽은 엘레나 페란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

 

 

 

 

그가 말한다, 이 세상엔 병신새끼들이 널리고 널렸어. 리아. 그 사람들 말은 듣지 마라ㅡ내 말 들어.

그리고 나는 루야말로 그 숱한 병신새끼들 중 하나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그의 말을 새겨듣는다.(94p)

 

 

질문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때 내가 루에게서 벗어나 쓰레기를 던지는 사람들에게 맞섰다면, 스코티가 앨리스를 받아들였듯이 베니도 나를 받아들였을까? 단 한 번의 계기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었을까?(95p)

 

 

그러나 이런 결과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일 뿐, 대부분은 다시 만나도 삼십오 년 전에 사파리 여행을 같이 갔다고 해서 피차 통하는 게 많지는 않다는 걸 발견하게 될 것이고, 헤어져 제 갈 길을 가면서 정확히 자신이 뭘 바랐던 것인지 알 수 없어질 것이다.(114p)

 

 

구조적 불만 : 훨씬 짜릿하고 호화로운 삶을 경험하고 돌아와, 한때는 즐거웠던 일상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음을 발견하는 것.(128p)

 

 

“나 인터뷰도 하고, 티브이 출연도 하고 싶어. 뭐든 말만 해,” 보스코가 말을 이었다. “그딴 걸로 내 인생을 꽉꽉 채워줘. 지지리 궁상떠는 짓거리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하는 거야. 이런 게 현실 아니겠어? 이십 년 지나면 반반했던 얼굴도 맛이 가. 뱃살의 반을 잘라낸 사람은 더하지. 시간은 깡패잖아? 그게 제대로 표현한 거 아냐?”(194p)

 

 

바닥에 앉아 오후시간이 흘러가는 걸 느끼던 테드는 어느새 수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살짝 다른 수전이 아니라 수년 전 어느 날의 그녀ㅡ그의 아내ㅡ를. 테드가 그의 욕망을 접고 접어 조그맣게 만들기 전이었다. 뉴욕에 놀러 갔을 때 둘 다 한 번도 타본 적도 없고 해서 재미 삼아 스테이튼 아일랜드 유람선을 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수전이 불쑥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늘 오늘처럼만 살자.” 그 시절만 해도 두 사람이 한마음이었던지라 테드는 왜 아내가 그런 말을 하는지 더없이 잘 알았다. 그날 아침 섹스를 해서도, 점심식사 때 푸이 퓌세를 마셔서도 아니었다. 아내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337p)

 

 

“쉼표가 나오면 노래가 끝날 거라고 생각하게 돼. 그랬다가 사실은 노래가 끝난 게 아니라는 걸 알면 마음이 놓이지. 그렇다 한들 노래는 곧 진짜로 끝나버려. 모든 노래엔 절대적인 끝이 있어. 바로 그거야.

시간.끝.이.라.는.게.정.말.존.재.한.다.는.것.”(388p)

 

 

ㅡ 제니퍼 이건, <깡패단의 방문> 中,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