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엘레나 페란테,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中, 한길사
2020/1/2
2019년의 마지막과 2020년의 시작을 함께 한 책. 덕분에 한가로운 여행지에서 즐거웠다. 다음은 3권.
불평등에는 고약한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나는 드디어 깨달았다. 그것은 내면 깊은 곳에서 작용하며 금전적인 문제를 초월하는 것이다. 식료품점과 구두공장과 구둣가게에서 벌어들이는 돈으로는 우리의 출생 배경을 숨기지는 못한다. 릴라가 계산대 서랍에서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꺼낸다 해도, 그 액수가 3백만 리라가 되었든 5백만 리라가 되었든 돈으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
학교 앞으로 니노를 마중 나온 소녀를 보았을 때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 소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보다 우월했다. 그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170p)
“마음을 편하게 먹어야 해.”
“나를 좀 도와줘.”
“어떻게?”
“내 곁에 있어줘.”
“그렇게 하고 있잖아.”
“아니야. 나는 네게 비밀이 하나도 없어. 가장 추악한 생각까지도 감추지 않아. 그런데 너는 네 얘기를 거의 하지 않잖아.”
“그렇지 않아. 내가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사람은 너뿐이야.”
릴라는 강하게 고개를 저어보이면서 말했다.
“네가 나보다 뛰어나고 나보다 아는 것이 많아도 나를 떠나지는 말아줘.”(197p)
모든 것이 아슬아슬하다. 위험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이들은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평생을 구석에 처박혀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 불현듯 왜 내가 아닌 릴라가 니노를 차지하게 됐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감정에 몸을 내맡길 줄 모른다. 감정에 이끌려 틀을 깨뜨릴 줄 모른다. 내겐 니노와 단 하루를 즐기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릴라와 같은 강인함이 없었다. 나는 항상 한 발짝 뒤에서 기다리기만 했다.
릴라는 그런 나와는 달리 진심으로 무엇인가를 갈망할 줄 알았다. 원하는 것은 망설임 없이 취할 줄 알았다. 열정을 다할 줄 알았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모멸감도 비웃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얼굴에 침을 뱉어도, 흠씬 두들겨 맞아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릴라에게 사랑은 상대방이 자기를 원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릴라는 니노를 가질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404p)
시어머니는 릴라가 구둣가게를 맡는 바람에 신시가지에 있는 식료품점에서 다시 힘겹게 일해야만 했다. 특히 피누차와 질리올라는 각자 리라에게 할 수 있는 공격을 모두 쏟아 부었다. 사실 그것은 예상했던 바였다. 예상치 못했던 것은 지금까지 릴라에게 받은 도움과 은혜 때문이라도 항상 릴라를 우러러보던 카르멘이 릴라가 식료품점을 떠나자마자 그녀에 대한 모든 애정을 싹 거둬들였다는 사실이다. 마치 짐승의 송곳니에 손을 스치자 손을 뒤로 잡아 빼는 것 같았다.(482p)
하지만 알폰소, 엔초, 니노 같은 사내들은 달랐다. 이들 역시 여성 취향이 서로 다르기는 했지만 여성을 대할 때 항상 어느 정도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냉정한 태도를 취했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는 벽이 있는데 그 벽을 뛰어넘는 일은 여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511p)
불현듯 ‘거의’라는 단어가 마음에 와 닿았다. 내가 해낸 건가. 거의 그렇다. 나폴리에 있는 고향 동네에서 이제는 완전히 벗어난 건가. 거의 그렇다. 나는 교육 수준이 높은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는가. 거의 그렇다. 갈리아니 선생님이나 그녀의 아이들보다 더 수준 높은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는가. 거의 그렇다. 시험에 시험을 거치면서 권위 있는 교수님들에게 인정받는 학생이 되었는가. 거의 그렇다.
‘거의’라는 단어 뒤에 실상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두려웠다. 피사로 온 첫날부터 나는 두려웠다. 나는 ‘거의’라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두려웠다.(561p)
나는 평생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말을 잘못 할까봐, 너무 과장된 어조로 말할까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을까봐, 옹졸한 마음을 들킬까봐, 흥미 있는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할까봐 평생 두려움에 떨며 살아갈 것이다.(563p)
머리가 아팠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일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릴라를 미켈레에게 데려다주지 않은 일이 올바른 일이었을까. 엔초에게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한 일이 잘한 일이었을까. 릴라가 남편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면 아다의 상황이 달라졌을까.
안토니오는 모든 일은 우연히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딱히 선한 일도 악한 일도 없었다.(581p)
순간 나는 내가 거기까지 릴라를 찾아간 것이 교만심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좋은 마음에 애정을 가지고 한 행동이기는 하지만 그 긴 여행이 결국 릴라가 잃어버린 것을 나는 얻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라는 내가 자기 앞에 나타난 순간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동료와의 마찰과 벌칙금을 낼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지금 나에게 내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살아가면서 승리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자신의 인생은 나만큼이나 다양하고 무모한 모험으로 가득하며 시간은 그저 별 의미 없이 흘러가기 마련이니 가끔 이렇게 만나 한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른 터무니없는 생각과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정신 나간 생각을 나누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652p)
ㅡ 엘레나 페란테,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中,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