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엘레나 페란테,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中, 한길사
2020/1/21
한 권 남았다.
타라타노 교수는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껴안고 키스하려 했다.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이리저리 빼냈지만 그에게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타라타노 교수는 좀처럼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교수의 배가 내 몸에 닿는 느낌과 와인 향기 섞인 그의 숨결이 지워지지 않는다. 당시만 해도 그렇게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나이 든 남자가 그런 부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내 예비 시어머니의 친한 친구가 아닌가. 복도로 나서자 그는 황급히 내게 용서를 구했다. 와인을 많이 마신 탓이라고 하고는 서둘러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79-80p)
동서를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하나 같이 변명이 똑같은지?
나는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교육을 많이 받았고 어떤 면에서는 너무 무지했다. 나 자신을 통제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다른 이들의 사상과 사건을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느라 열정 없는 인생을 사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게다가 결혼과 안정적인 삶이 너무 빨리 시작될 예정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그곳에서 이미 몰락해버린 기존의 질서 체계 속에 너무 깊이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85p)
“사내란 사랑에 빠져 정신이 나가 있을 때와 네 몸에 들어와 있을 때를 빼고는 항상 겉에서 맴돌기만 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일단 사랑이 식으면 그를 원했다는 기억만으로도 불쾌해지지. 물론 한때 그는 나를 좋아했고 나도 그를 좋아했지만 그것뿐이야. 나는 하루에도 좋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생기는걸. 너는 그렇지 않아? 하지만 그 감정도 잠시일 뿐 결국에는 사라지고 말지. 남는 것은 아이뿐이야. 내 몸의 일부거든. 애 아빠는 타인이었으니 타인으로 되돌아간 거고. 그의 이름조차 예전처럼 느껴지지 않아. 예전에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니노라는 이름을 생각하고 생각했어. 마법의 주문처럼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그 이름을 부르면 기분이 우울해져.”(108p)
“정말 그런 곳에서 일하고 있었던 거야?”
릴라는 파스콸레의 몸이 닿자 짜증이 나서 팔을 빼내고는 발끈했다.
“그러는 너는 어떻게 일하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일하고 있는데?”
파스콸레도 엔초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둘 다 힘겹게 일하고 있을 터였다. 적어도 엔초만큼은 릴라처럼 집안일을 감당하면서 직장에서 모멸감과 피로에 시달리는 여공들을 보아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둘은 공장에서 릴라가 처한 상황 때문에 심란해하고 있었다. 릴라가 그런 환경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사내들에게는 뭐든 다 숨겨야 해. 차라리 몰랐으면 하는 거야.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여인이 일하는 곳에서는 자기가 일하는 직장 사장의 횡포가 기적처럼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싶은 거야.’(162-163p)
“사내라면 듣고 싶어 하지 않고 여자라면 알고는 있지만 말하기 두려워하는 그런 내용 말이야.(238p)
“임신이란 말이야, 타인의 생명이 네 배에 달라붙는 거야. 고통 끝에 겨우 뱃속에서 떼어냈다 싶을 테지만 그것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너를 더 구속할 거야. 태어나자마자 널 밧줄처럼 옭아맬 거야. 아이를 낳으면 너는 더 이상 네 인생의 주인이 아닌 거야.”
(...)
“스스로 자신의 고통을 만들어낸 느낌이야.”(323p)
나는 내게 조금이라도 호감을 나타내는 모든 남자에게 끌렸다.
상대가 키가 크든 작든, 말랐든 뚱뚱하든, 잘생겼든 못생겼든, 나이 든 사람이든, 독신이든 유부남이든 상관없었다. 내 의견을 칭찬하거나 내 책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하거나 내 지성에 감탄하기라도 하면 나는 호감을 담뿍 담은 눈빛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353p)
나는 먼저 내 자신을 이해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여성성을 탐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나는 너무 과하게 애를 썼다. 남성의 능력을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 뭐든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뭐든 다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실 정치나 투쟁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남자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남자들보다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수준의 기준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비이성적인 남성의 이성? 유행하는 표현을 외우려고 나는 얼마나 노력했던가.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내 사고 방식과 언어는 지금까지 내가 받은 교육에 의해 형성되었다. 남보다 뛰어나게 되려고 나는 나 자신과 어떤 비밀스런 협상을 맺었던가. 배우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데 이제 와서 배운 것 가운데 무엇을 잊으려 애써야 하나. 게다가 나는 릴라와 닮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고 살아왔다.
나는 자꾸만 내 자신을 릴라와 일치시키려 했다. 릴라에게서 분리되려고 할 때마다 불구가 되는 것 같았다. 릴라가 없으면 생각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릴라 없이는 내 생각에 확신이 생기지 않았고 어떠한 그림도 그려지지 않았다. 나는 릴라와 분리된 내 모습을 받아들여야 했다. 해답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397-398p)
“너 그거 알아? 너는 언제나 ‘사실’ ‘진심’이라는 말을 참 자주하지. 말할 때도 그렇고 글을 쓸 때도 그래. 아니면 ‘갑자기’라는 말도 참 자주해. 그런데 요즘 세상에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갑자기’ 일어나는 일은 또 얼마나 돼? 세상일은 다 사기야.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법이야. 이런 것은 네가 나보다 잘 알잖아. 나는 이제 어떤 일도 ‘진심’으로 하지 않아. 그리고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갑작스러운’일은 멍청이들에게나 일어나는 거라고.”(450-451p)
“내 생각에는 남자가 여자를 가르치려 든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아. 그때 나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나를 변화시키려는 프랑코의 욕망이 사실은 그가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어. 그는 내가 다른 사람이기를 원했던 거야.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단순히 여자를 원한 게 아니었어. 자기가 만약 여자라면 되고 싶은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여성을 원했던 거야. 프랑코에게 나는 자신을 여성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어. 여성성을 취해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였고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던 거야. 자신이 남성으로서뿐 아니라 여성으로서도 완벽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존재였던 거야. 지금은 내가 자신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거야.”(504p)
지금은 외모를 가꾸는 데 재미를 붙였지만 가끔은 몸단장(그렇다. 나는 그런 표현을 썼다)하는 행위 자체가 우스꽝스럽다고 느꼈다.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남성을 위해 치장해야 할 때면 그런 느낌이 더 강했다. 얼마든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시간에 변장에 가까운 치장을 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과 노고를 들여야 한다니. 내게 어울리는 색상과 어울리지 않는 색상을 찾고 날씬해 보이는 옷과 뚱뚱해 보이는 옷을 구분하고 예뻐 보이는 머리 모양과 그렇지 않은 머리 모양을 찾는 과정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고 값비싼 준비 과정도 필요했다. 남자들의 성욕을 자극하기 위해 잘 차려진 식탁이나 군침 도는 요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준비를 하고도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까봐 불안했다. 감정과 체취와 결함을 가진 육신의 천박함을 능숙하게 숨기지 못했을까봐 두려웠다.(525p)
ㅡ 엘레나 페란테,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中,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