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中, 문학동네
2020/2/11
배수아의 다른 역본도 있으니 차후에 비교해서 찾아보기 쉽도록 텍스트 번호로 남겨둔다.
모든 바다를 항해한 자는 자신 안의 지루함을 항해했을 뿐이다.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 많은 바다를 건넜다. 땅 위에 존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산들을 보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도시들을 둘러봤고,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거대한 간들이 나의 눈길 아래로 장엄하게 흘러갔다. 내가 만일 여행을 떠난다면, 떠나지 않고도 보았던 것들의 조악한 복사본을 볼 뿐이리라.
(...)
모든 풍경과 모든 집이 나의 상상력을 재료로 신 안에서 창조된 나였으므로, 나는 모든 것을 보았다.(138)
불행히도 지성의 병은 감정의 병보다 덜 아프고, 불행히도 감정의 병은 육체의 병보다 덜 아프다. ‘불행히도’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인간의 존엄성이 그 반대를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풀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혀 느끼는 지적인 고뇌는 사랑, 질투, 그리움 등의 감정만큼 우리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 강렬한 육체적 공포처럼 우리를 압도하지도 않고, 분노나 야심처럼 우리를 변화시키지도 않는다. 그런가 하면 영혼을 파괴하는 어떤 아픔도 치통이나 복통, 출산의 진통(상상하건대)만큼 생생할 수는 없는 법이다.(140)
나는 이루어질 리 만무하고 특별한 일을 꿈꾸는 사람들보다 접근 가능하고 합리적이고 이루어질 법한 일을 꿈꾸는 이들이 더 딱하다. 원대한 꿈을 꾸는 사람들은 좀 미쳐 있기 때문에 자기가 꿈꾸는 것을 믿으며 행복해한다. 아니면 그들은 단순한 몽상가라 영혼의 음악 같은 공상이 별 의미 없이 그들을 달래준다. 하지만 가능한 것을 꿈꾸는 이들은 진짜 환멸을 느낄 가능성이 다분하다. 로마 황제가 될 수 없는 건 크게 실망할 일이 아니지만, 매일 아침 아홉시경 거리에서 마주치는 재봉사 아가씨에게 한 번도 말을 걸지 못하는 일은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불가능한 꿈은 처음부터 우리의 접근을 막지만, 가능한 꿈은 우리 삶에 개입하고 그 꿈을 이루려는 방향으로 삶을 진행시킨다. 불가능한 꿈은 단독적이고 독립적인 반면, 가능한 꿈은 삶에서 일어나는 우연적인 일들에 의존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나는 불가능한 풍경과 결코 가보지 못할 넓은 평원을 사랑한다. 특히 과거의 역사 시대에 열광하는데, 거기에서 애초에 내가 이룰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꿈꾸며 잠든다.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꿈은 나를 잠에서 깨운다.(143)
자신을 알려는 일 자체가 오류다. “너 자신을 알라”는 신탁은 헤라클레스의 임무보다 어려운 과제이며,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보다 더 난해하다. 의식적으로 자신을 모르는 것만이 길이다. 그리고 성심성의껏 자신을 모르는 것이 역설의 실질적인 과제다. 우리가 스스로를 모르는 방식에 대해 참을성을 갖고 설득력 있게 분석하기, 우리의 의식에 대한 무의식을 의식적으로 기록하기, 자율적인 그림자에 대한 형이상학, 환멸의 황혼을 노래한 시.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의 위대하고 가치 있는 특징이다.
하지만 무언가는 항상 놓치기 마련이고 어떤 분석은 항상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며 진실은, 심지어 그것이 가짜일 때도, 언제나 다음 모퉁이 너머에 있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를 지치게 하는 인생보다 더 우리를 지치게 만들고, 늘 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지식과 명상보다 더 우리를 피곤하게 만든다.(149p)
영혼의 비극 중 하나는, 완성한 작품이 조금도 훌륭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그 작품이 영혼이 이룰 수 있는 최선이었음을 깨달을 때 비극은 더욱 극대화된다. 하지만 영혼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고문이자 모욕은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자기 글이 불완전하고 부족할거라는 사실을 미리 아는 것, 그리고 쓰는 동안에 글이 불완전하고 결함투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은 만족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쓸 글 역시 결코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철학적으로 알고, 몸으로 알고, 글라디올러스 꽃 사이로 희미하게 엿보여서 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늘 포기한다고 선언하면서도 실은 온전히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와 산문에 끌리는 마음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러니 벌칙을 수행하듯 글을 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장 큰 벌은 내가 쓰는 글이 완전히 쓸모없고, 결함이 많고,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시를 썼다. 엉터리 시를 많이 썼는데 그때는 완벽한 줄 알았다. 그때 느꼈던, 완벽한 작품을 썼다는 몽상에 불과한 기쁨을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쓰는 글은 그때보다 훨씬 낫다. 심지어 다른 훌륭한 작가들이 쓸 수 있는 것보다 더 낫다. 하지만 왠지 모르지만, 내가 쓸 수 있을 듯한 글이나 또는 써야 할 것 같은 글 보다는 한없이 뒤떨어진다. 그래서 내 어린 시절에 썼던 형편없는 시가 마치 죽은 아이, 죽은 자식, 사라져버린 마지막 희망인 양 그 위로 눈물을 떨어뜨린다.(231)
우리에 대한 타인의 이해는 참으로 복잡한 오해들로 구성된다.
이해받기를 원하는 자는 결국 타인에게 이해받는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주기 바라는 자들은 항상 복잡하고 난해해서 결국 그들은 이해받는 행복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이들이 쉽게 이해하는 단순한 사람들에게는 타인에게 이해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없다.(328)
타인이여, 우리 모두는 서로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적 있는가? 우리가 서로에 대해 얼마나 모르는지 깊이 생각해본 적 있는가? 우리는 마주보고 있어도 서로를 보지 못한다. 서로의 말을 듣고 있지만 각자 자기 안에 있는 말을 들을 뿐이다.
다른 사람의 말은 우리 청력의 실수이고, 우리 이해력의 난파일 뿐이다. 타인의 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생생한 관능을 표현한 말에서 우리는 죽음을 듣는다. 다른 이들이 심오한 뜻은 조금도 담지 않고 입술에서 떨어지게 놔둔 말에서 관능과 삶을 읽는다.(329)
가끔 나는 다른 이들의 눈에는 내가 어떤 부류의 사람으로 비칠지 궁금해하는 무의미한 상상에 빠진다. 내 목소리는 어떻게 들리는지, 그들의 무의식적이 기억 속에 나는 어떤 인상으로 남았는지, 내 몸짓과 말, 눈에 보이는 나의 인생은 다른 이들의 해석의 망막에 어떻게 새겨지는지 궁금하다. 나는 나를 밖에서 본 적이 없다. 우리로부터 우리 자신을 밖으로 데려갈 수 있는 거울은 없기에, 우리는 밖에서 보이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없다. 외부에서 보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다른 영혼, 다르게 바라보고 생각하는 방식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스크린에 나오는 영화배우가 되거나 내 높은 목소리를 녹음한다고 해도 여전히 밖에서 보이는 내 모습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나를 밖에서 기록하더라도,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나는 나에 대한 나의 의식이라는 나만의 공간,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 항상 머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지는 잘 모르겠다. 인생의 과학은 본질적으로 인간을 자신으로부터 멀리 분리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분리하고, 그래서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떨어져나간 상태로 삶에 참여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자신 속에 깊이 빠져서 오로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 미개함에 완전히 항복하고 사는 걸까. 그런 상태로 사람들은 꿀벌이나 개미처럼, 꿀벌들이 어떤 인간 사회보다 잘 조직된 사회를 형성하는 기적이나, 복잡하기만 하고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의사소통을 훨씬 능가하며 개미들이 그 작은 안테나로 소통하는 기적 따위에 의지해 살아가는지도 모른다.(338)
뭔가를 상상하면, 나는 그것을 본다. 내가 여행을 정말 떠난다면 그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느끼기 위해서 장소를 옮겨야 한다면 그것은 상상력이 극도로 빈곤한 탓이다.
“여기 소박한 엔테풀의 길을 포함해 모든 길은 당신을 세상의 끝으로 데려갈 것.” 하지만 세상을 한 바퀴 돌고 나서 도착하는 끝은 결국 처음 출발했던 엔테풀이다. 사실 세상의 끝이란 세상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한 우리의 개념일 뿐이다. 풍경이 풍경이 되는 것은 우리 안에서다. 그러므로 내가 풍경을 상상하면, 풍경을 만들어낸다. 만들어내면, 존재한다. 존재하면, 그것을 다른 풍경을 보듯이 볼 수 있다. 그러니 왜 여행을 가겠는가? 마드리드, 베를린, 페르시아, 중국, 그리고 남극과 북극, 어디서든 나는 나 자신 속에, 나만의 고유한 유형의 감정 안에 있을 뿐이 아닌가?
삶이란 우리가 삶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행이란 결국 여행자 자신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재다.(451)
시골에 있고 싶어하는 이유는 도시에 있는 것을 좋아하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더라도 도시에 있는 걸 좋아하지만, 시골에 있을 때는 도시가 두 배로 더 좋아진다.(459)
추상적인 생각이든 추상적인 감정이든 추상적인 세상에 계속 머물러 있다보면, 우리의 감정과 의지와는 반대로, 현실 세계의 일들이 유령처럼 느껴지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우리 자신의 성격에 따라 마땅히 더 민감하게 느껴야 하는 일마저도 그렇게 된다.
아무리 친한 친구, 정말 친한 친구라고 하더라도 그가 아프거나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느낌은 애매하고 불분명하고 흐릿할 뿐이라서 부끄러울 정도다. 그런 일은 직접 목격해야만 어떤 감정이 살아날 것이다. 너무 상상에 의지해 살다보니, 결국 상상하는 능력을 잃었고, 특히 현실에 대한 상상력을 잃고 말았다.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는 것들로 정신적인 삶을 영위한 결과, 우리는 존재할 수 있는 것을 성찰하는 능력을 잃었다.
오늘 나는 오래된 친구 하나가 수술하러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만난 지 오래됐지만 그리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감정으로 늘 기억하는 친구다. 그런데 그 소식이 내게 불러일으킨 확실하고 선명하고 유일한 감정은, 그를 위문하러 병원에 가야 할 터이니 성가시다는 심정과, 가기 싫지만 가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는 난처함이었다.
그것뿐이었다····· 그림자를 오래 상대하다보니 생각하고 느끼고 나로 존재하는 가운데 나 자신이 그림자가 되어버렸다. 내가 한 번도 되어보지 못한 보통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실체가 됐다. 정말 그것만을 느꼈다. 곧 수술을 받을 친구의 소식을 들었는데도 적절한 안타까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수술을 받을 예정인 모든 사람들과 이 세상의 고통받고 동정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느껴 마땅한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다만 안타까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468)
ㅡ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中,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