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국내소설

ㅡ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中, 허블

mediokrity 2020. 5. 8. 03:02

2020/5/7

 

실린 작품 중 표제작과 스펙트럼이 가장 좋았다. 요즘 책도 많이 읽지 않고 있고 그나마 읽는 책도 비교적 호흡이 긴 작품이라서 독서가 지지부진했는데 앉은 자리에서 한달음에 읽었다. 분량은 300p가 넘지만 자간과 여백이 넓어서 그런 것이고 열린책들 느낌으로 편집했으면 200p초반 정도였을 듯. 그리고 읽기 싫었겠지. 

독서 모임의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에게 가장 도움이 건 강제성이다. 특히 읽으려고 찜해뒀지만 계속 미루고 읽지 않은 책을 모임원이 골라주면 그렇게나 고맙고 반가울 수가 없다. 자발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을까? 이 책 역시 그랬다. 작년에 화제가 되었을 때부터 읽어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최근에는 심지어 빌려놓기까지 했지만 역시나 방치하고 있다가 좋은 기회ㅡ강제성ㅡ를 통해 읽을 수 있었다. 모임원에 고마움을 전한다. 

 

 

‘스펙트럼’은 흔한 주제일 수도 있지만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무엇을 내 능력 밖이라고 쉬이 놓아버리거나 포기하는 대신 어떻게든 이해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조금은 감동적이기도 했다.

'나의 우주적 영웅에 관하여‘의 한 대목은 소수자가 처한 현실을 잘 짚었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본 ’우먼 인 할리우드‘에서도 비슷한 대목이 나오는데 남자들은 실패를 해도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만 여성은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이래서 여자는 안 되는거야.”라는 말로 과대대표되어 필요 이상으로 비난 받고 도태된다는 말이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상황 설정이 참 재밌었다. 기술의 개발로 가족을 먼 곳에 보낼 수 있었지만 같은 이유로 가족과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다는 것.

 

다음 책은 정지돈이 유튜브에서 언급했던 살라미나의 병사들.

 

 

 

 

 

“정하야, 우리 관계는 결혼의 예행연습이 아니야.”(199p)

 

 

그때 나는 문득 얼마 전 오만상을 찌푸리며 보았던 신파 영화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내 옆자리에서 세상이 무너진 듯 엉엉 울며 손수건으로 코를 닦던 한 중년 여성을 떠올렸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나는 영화에 대한 메모를 하고 있었고, 그녀는 내 옆에서 한참이나 훌쩍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이런 억지 신파 영화에 그렇게 감동을 했을까 생각하던 찰나였다. 그녀가 가방에서 영화 포스터를 꺼낸 다음 신경질적으로 구겨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돌아보지도 않고 자리를 떠났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 여자에게 영화의 내용은 중요했을까? 그 순간이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다.

의미는 맥락 속에서 부여된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니라 단지 눈물 그 자체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215p)

 

 

재경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 사람들은 재경을 닮은 다른 약한 사람들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이래서 결함이 있는 존재를 중요한 자리에 올리면 안 된다고, 표준인간의 기준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비난들은 분명히 재경의 잘못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가 속한 집단 전부의 실패가 되는데,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렇지 않다.(308p)

 

 

우주 정거장에서 우주선을 기다리는 안나의 이야기는 ‘가짜 버스 정류장’에 대한 기사를 보고 떠올렸다. 독일에 있는 이 정류장은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데, 요양원 노인들이 시설을 나와 길을 잃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되었다고 한다. 해가 저물고 노인들을 데려가는 것은 버스가 아닌 시설 직원이다.(338p)

 

 

ㅡ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中, 허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