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국외소설

ㅡ 프란츠 카프카, <소송> 中, 문학동네

mediokrity 2020. 5. 10. 13:47

2020/1

 

 

이곳이 처음이시죠? 글쎄, 그러니까 전혀 이상할 게 없어요. 여기 지붕 구조물에 햇볕이 내리쬐면 뜨거워진 나무가 실내 공기를 아주 후텁지근하고 답답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여기는 사물실로 쓰기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아요. 물론 그것 말고는 몇 가지 장점도 있어요. 하지만 공기에 관해 말하자면, 소송 당사자들의 왕래가 많은 날은 거의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인데, 거의 매일이 그런 날이지요. 게다가 또 이곳에는 여러 세탁물을 말리려고 널어놓는데, 세입자들에게 그걸 전혀 못 하게 할 수도 없는 일이거든요. 속이 좀 메스꺼워도 이젠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게 되니까요. 하지만 결국에는 모두 이런 공기에 익숙해져요. 두세번쯤 오시게 되면 더 이상 이곳에서 짓누르는 느낌은 받지 않을 거예요. 이제 좀 나아지셨어요?(93p)

 

 

(...) 그래서 첫 청원서를 작성할 때 무엇을 겨냥하고 써야 할지 보통 모르거나 정확히 알 수가 없으며, 따라서 첫 청원서가 소송에 뭔가 의미 있는 내용을 담는 경우는 사실 우연에 불과하다. 정말 실효성이 있는 논거를 갖춘 청원서는, 피고인에 대한 심문 과정에서 개개의 공소 사실과 그 근거 제시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거나 추측이 가능할 때 비로소 작성이 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변호는 당연히 매우 불리하고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나 이것도 다 의도된 것이다. 변호는 사실 법률에 의해 허용되지 않으며, 묵인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당 법조문이 적어도 묵인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법원의 인정을 받는 공인 변호사라는 것은 없으며, 법정에서 변호사라고 등장하는 자들은 사실 모두 무면허 변호사에 불과한 셈이다.

(...)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오직 정직한 개인적 관계, 특히 고위 관리들과의 연줄인데, 물론 여기서는 하급 법원의 고위 관리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통해서만 소송의 진행에 영향을 미칠 수가 있는데, 처음에는 그 영향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나중에는 갈수록 더 뚜렷해진다.

(...)

법원의 서열과 직급 체계는 끝이 없어서 그 세계에 정통한 사람들조차 제대로 가늠하기 어렵다. 그런데 법정에서의 재판 과정은 일반적으로 하급 관리들에게도 비밀이며,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이 다루는 사건의 향후 추이를 완전히 파악할 수가 없고, 따라서 재판 사건은 대부분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른 채 그들의 시야에 나타났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계속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런즉 개별적인 소송 단계들, 최종적인 결정, 그리고 그런 결정의 근거들을 연구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 같은 것이 하급 관리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142-147p)

 

 

이 거대한 법원 조직은 말하자면 영원한 부유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만일 누군가가 자신의 위치에서 독자적으로 무언가를 바꿔버리면, 그것은 자기 발아래에 있는 지반을 없애는 행위와 같아서 자신만 추락하게 될 뿐이고, 그 거대한 조직은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사소한 장애는 다른 곳에서 손쉽게 보완하여 이전과 다름없는 상태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조직은 전보다 더 단호하고, 더 주의 깊고, 더 엄격하고, 더 악의적이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

여러 가지 면에서 관리들은 어린아이 같다고 한다. 관리들은 종종 악의 없는 일에도 마음 상하기 일쑤인데, 유감스럽게도 K의 태도는 물론 그 범주에도 속하지 않지만, 아무튼 쉽게 마음이 상해서 가까운 친구들하고도 말을 안하고 그 친구들을 우연히 만나도 외면하며 가능한 한 모든 일에서 친구들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가도 의외로, 또 별다른 이유도 없이, 워낙 절망적인 상황에서 상대방이 아무렇게나 던져보는 대수롭지도 않은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마음을 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동시에 쉬운 일이기도 한데, 거기에 무슨 원칙 같은 건 없다. 가끔은, 여기서 성공적으로 일을 해나가는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그저 평범한 삶을 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다고 했다. 물론 누구나 그렇듯이 우울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성취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 결말이 좋은 소송은 하나같이 처음부터 특별히 손을 쓰지 않았어도 좋은 결과가 나오도록 예정돼 있던 것들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다. 반면에 다른 모든 소송들은 백방으로 쫓아다니고 온갖 애를 다 써서 작가는 해도 겉보기에는 그런대로 성공을 거둔 것 같아 기뻐했지만 결국 패소해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확실해 보이는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게 된다.(148-150p)

 

 

소송에 대해 이전에 품었던 경멸감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그가 세상에 혼자 사는 것이라면 소송 같은 건 가볍게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경우라면 소송 같은 건 아예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숙부가 벌써 그를 변호사에게 끌고 왔으며, 집안과 가족들도 고려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그의 직위 또한 소송 진행 상황과 완전히 무관할 수는 없었다. 조심성 없게도 그 스스로가 몇 명의 지인들 앞에서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일종의 만족감을 느끼며 소송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고,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도 소송에 대해 알게 되었다. 뷔르스트너 양과의 관계도 소송에 따라 흔들리는 것 같았다. 요컨대 그에게는 소송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는 소송의 한복판에 서서 자신을 방어해야 했다. 그가 지쳐 있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154-155p)

 

 

“그런데 이 두번째 무죄 판결도 최종적인 건 아니겠군요.” K가 냉담하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물론 아닙니다.” 화가가 말했다. “두번째 죄 판결에 이어 세번째 체포가 따르고, 세번째 무죄 판결 다음에는 네번째 체포가 이어지며 계속 그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외견상의 무죄 판결이라는 개념에는 바로 그런 것들이 포함됩니다.” K는 잠시 침묵했다. “외견상의 무죄 판결이 당신한테는 별로 유리해 보이지 않는군요.” 화가가 말했다. “아마도 당신에게는 판결 지연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판결 지연이란 소송이 가장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도록 잡아두는 걸 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피고인과 조력자, 이중에서도 특히 조력자가 법원과 끊임없이 사적인 접촉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경우에는 외견상의 무죄 판결을 얻어낼 때만큼 노력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주의력이 훨씬 더 필요합니다. 소송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그리고 특별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담당 판사를 찾아가 어떤 식으로든 호감을 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담당 판사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할 때는 잘 아는 판사를 통해 영향을 주어야 하며, 그렇다고 해서 직접 상담에 나서는 것도 아예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점들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소송이 그 첫 단계를 넘어서는 일이 없다는 것을 자신 있게 가정할 수 있습니다. 소송이 끝나는 건 아니지만, 피고인은 유죄 판결을 받을 염려가 없기 때문에 자유로운 신분이 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외견상의 무죄 판결에 비해 판결 지연은 피고인의 미래가 덜 불안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피고인은 갑작스러운 체포로 놀라게 되는 일도 없고, 또한 가령 여타 상황이 아주 좋지 않을 때 하필 소송 관련 일이 겹쳐 외견상의 무죄 판결을 얻어내기 위해 겪어야 할 긴장이나 흥분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판결 지연도 피고인의 입장에서 보면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단점들이 있습니다. 피고인이 결코 자유로운 몸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외견상의 무죄 판결의 경우에도 피고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몸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다른 종류의 단점입니다. 소송은 적어도 그럴듯한 이유가 없는 한 가만히 멈춰 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에서 볼 때 소송에서 무슨 일이든지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이런저런 지시들이 내려져야 하고, 피고인은 심문을 받아야 하며, 심리가 행해지고, 그 밖의 또 다른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 소송은 인위적으로 제한해놓은 작은 범위 내에서 계속 맴돌아야 합니다.(197-198p)

 

 

 

ㅡ 프란츠 카프카, <소송> 中,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