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그 외

ㅡ 버트란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中, 사회평론

mediokrity 2015. 10. 4. 20:55

2015/9/23

 

 

기계의 생산력으로 인류에게 혜택을 준 발전된 경제 조직이 여가를 파격적으로 증대시키는 것으로 이어져야 마땅하지만 여가가 많아지면 상당한 지적 활동과 관심사들을 보유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루해하기 십상이다. 여가를 가진 인구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교육받은 인구이며, 또한 그 교육은 직접적 유용성을 가진 과학기술적 지식뿐 아니라 정신적 기쁨도 목표로 했음이 틀림없다.(45p)

 

이런 단락을 보면 단순히 여가시간이 주어진다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은퇴 후 넘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괜히 노년기에 우울증이 찾아오는 게 아니다. 러셀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꼭 교육을 통해서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하며 보낼지 충분한 고민과 숙고가 필요한 걸로 보인다.

 


숙고하는 습관의 이점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가장 심오한 것에 이르기까지에 폭넓게 걸쳐 있다. 우선 벼룩 때문에 괴롭다든지, 기차를 놓쳤다든지, 함께 사업을 하는데 걸핏하면 싸움이 일어난다든지 하는 작은 번민들부터 생각해 보자. 이런 고민거리들은 영웅적 행위의 뛰어남이나 모든 인간적 불행의 덧없음에 비하면 별로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들로 보이기 쉽다. 그렇지만 바로 그런 일들에서 생겨나는 짜증들이 많은 사람의 좋은 성격과 즐거운 인생을 망쳐 놓는 것이다.

그럴 경우, 그 순간의 문젯거리와 약간의 연관이 있을 뿐인 동떨어진 지식(실제로 연관이 있든 그렇게 생각한 것이든 간에)에서 의외로 큰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설사 그 문제와 아무 연관이 없는 지식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현재의 골칫거리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는 데는 큰 도움이 된다.

격분해서 안색이 하얗게 된 사람이 마구 공격해 올 때는, 데카르트의 열정에 관한 논문에 나오는, ‘분노로 안색이 하얘지는 사람이 안색이 빨개지는 사람보다 두려움을 더 많이 타는 이유란 제목의 장을 돌이켜보면 즐거워질 것이다.(48~49p)

 

숙고하는 습관의 이점에 대한 러셀의 위트 있는 문장

 


죽음이 떠오르면 다소 금욕주의적인 태도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다. 다시 말해 죽음의 중요성을 최소화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것을 초월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냉정하게 사고해야 한다.

이런 원칙은 다른 공포감도 마찬가지다. , 공포를 일으키는 대상을 단호하게 주시하는 것이 유일한 처치법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래, 좋아.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지?”

사람들은 전쟁터에서 죽음에 직면했을 때 이런 방법으로 대처한다. 그렇게 하고 나면 자신들이 생명을 바치려 하는 명분이나 자신이 아끼는 사람의 중요성이 확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느끼는 방법은 어느 경우에든 바람직하다.(87p)

 

이런 식의 생각은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러셀이 언급하는 것처럼 단지 죽음의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힘든 스트레스 상황이나 공포를 일으키는 대상에 대해 그래, 좆도 이게 뭐라고'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는 것. 만사가 이런 식이면 곤란하겠지만.

 


과거에는 훈육의 개념이 대단히 무시무시해서 교육이 잔인한 충동의 통로가 되었다. 아이에게 고통을 주면서 쾌감을 느끼는 일이 없이 최소한의 징벌을 내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물론 옛 관습에 젖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런 쾌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부인할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회초리로 후려치며 다음과 같이 말했던 일화는 누구나 알 것이다.

얘야, 맞는 너보다 때리는 내 마음이 더 아프단다.”

그러자 아들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아버지. 제가 대신 아버지를 매질하게 해주시겠어요?”(237p)

 

 

인생에서 만나는 고통스런 일에 대한 지식을 아이들에게 숨기려 해서도 안 되고 강요해서도 안 된다. 상황이 불가피할 때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고통스런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땐, 있는 그대로 감정을 넣지 말고 얘기해야 한다. 단 가정에서 누군가 죽었을 경우엔 예외다. 이때 슬픔을 감추려드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어른들은 슬픔 속에서도 쾌활한 용기를 보여 주어야 하며 그것을 보고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배워나갈 것이다.

청년기에는 사사롭지 않은 많은 관심사들이 젊은이들 앞에 제시되어야 하며 자기 외부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삶이 있다는 것을(드러내놓고 훈계하는 방법이 아닌 암시의 방법으로)깨쳐 주어야 한다. 불행이 닥쳤을 땐 아직도 살아야 할 이유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견뎌내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일어나지도 않은 불행에 깊이 파고들게 두어선 안 된다. 설사 그것이 불행에 맞설 준비를 하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젊은이들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혹시 자신이 교육에 필요한 훈육적 요소들로부터 가학적 쾌감을 느끼고 있지나 않은지 스스로를 엄밀하게 감시해야 한다. 훈육의 동기는 항상 품성이나 지성의 발달에 두어야 한다. 지성에도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훈련 없이는 결코 정확함을 얻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성의 훈련은 좀 성격이 다른 문제여서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훈육은 내적 충동에서 솟아나올 때가 가장 좋다는 얘기다. 그러기 위해선 아이나 청년에게 어려운 무엇인가를 달성하고자 하는 야심이 있어야 하고 그 목적을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와 같은 야심은 흔히 주변의 누군가로부터 제의받는 수가 많다. 결국 자기 단련조차도 교육적 자극에 의해 좌우된다는 얘기다.(239~240p)

 

 


버트란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 사회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