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박현주, <당신과 나의 안전거리> 中, 라이킷
2020/9/16
그러나 실패는 주저앉기 쉽지만 언제까지나 머물 수는 없는 집과 같다.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하고 너무나 미워하지만, 일단 한번 찾아오면 언제까지나 거기 있고 싶다는 마음도 든다. 또 다른 실패는 더 크고, 더 아프고, 더 강렬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미 맛본 실패는 헤어날 수 없는 나쁜 친구처럼 어느새 편안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안온한 실패를 언젠가는 떠난다.(31p)
대부분 신중하게 파트너를 고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뭔가 어긋나 있는걸 발견하게 된다. 그래, 많은 사람이 궁금해할 만하다. 왜일까?
이 칼럼에 따르면,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시간이 지나서야 발견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는 자신의 성격조차도 잘 모른다. 기분 좋고 느긋할 때의 나와 일에 몰리거나 위험할 때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 사람의 다면적인 모습을 다 알기란 불가능하고,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우리는 행복을 찾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익숙한 것을 행복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외로워서 실수를 저지르며, 좋은 느낌을 영구히 고착하려고 결혼을 하지만, 결혼 자체가 인생의 변화로 우리를 밀고 나간다. 이 글의 논리대로라면, 잘못된 사람과 결혼할 가능성이 ‘제대로 된’ 사람과 결혼할 가능성보다도 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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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알랭 드 보통의 칼럼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하는 선택인 결혼의 경우에도 실망은 찾아오며, 그것은 ‘보통의 일’이다. 대다수 사람이 결국은 실망하게 된다는 것, 그것이 그렇게 드문 경험이 아니라는 말이다.(39-44p)
충고에서 제일 중요한 해답은 결국 나 자신에게 있다. 어떤 결과를 맞이하더라도 내게 충고를 해준 타인을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즉, 내가 앤 엘리엇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충고는 타인의 판단이지만 그 판단을 따를지 말지는 나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아니, 적어도 그 판단을 따른 나와 타인을 원망하지 않는 것도 자신의 결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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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내게는 일이 잘못되었을 때 남을 원망하지 않는 인내와 현명함이 없다. 나는 남의 탓을 할 수 있다면 진심으로, 한껏 원망하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나는 가르침은 일단 받되, 결정은 내가 하겠다고 다짐하는 방식으로 마음의 평화를 조금이나마 찾았다.(112-113p)
타인의 시선으로 자기 존재를 정의할 수밖에 없다는 것, 우리 모두의 고민이다. 나의 노력이나 곧은 원칙이 언제나 이해받는 것은 아니며, 사람들의 긍정적인 관심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도 어렵다. 내가 원하는 애정과 호의를 받으려고 해도 미묘한 경쟁이 존재한다. 나는 쭉 나의 길만 가려고 했는데, 누군가 내 앞으로 끼어든다. 혹은, 내가 그들 앞에 기어들고 만다.(123p)
인생은 무언가를 얻고 좋아하고 식어버리는 과정의 연속이다. 애착이 없는 인간은 없다. 대상이 꼭 사람이나 생물이 아니라도, 물건 혹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개념일 뿐이라도, 거기에 지속적인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가상의 상호작용을 하고,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아끼고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다. 그러다 어느 날 서서히, 혹은 갑자기 마음이 멀어지고, 그러다 잊어버린다. 대체로 영원히 이러한 과정을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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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애착은 시간과 함께 다른 방식으로 변모해간다. 처음의 들뜸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편안함이 자리 잡는다. 편안함은 이제 곧 소홀함으로 바뀌어간다. 뜨거운 햇볕을 쬐어 색이 변색될까, 비를 맞아 얼룩질까 실내 주차장을 찾아 몇 바퀴를 돌던 것도 과거의 일, 이제는 어디든 가장 가까운 데 세운다. 아직도 손세차를 맡기지만, 주기가 길어졌다. 여전히 살뜰한 감정은 있지만, 차에는 점점 세월의 흔적이 묻었다. 언젠가 이 차를 쉽사리 팔거나 폐차하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어느 날에는 내 인생에서 사람은 없고 인간은 늘 고독하며 친구는 쇳덩어리 너뿐이야, 라고 생각했대도,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잊을 것이다.(182-183p)
ㅡ 박현주, <당신과 나의 안전거리> 中, 라이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