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김지은, <김지은입니다> 中, 봄알람
2020/11/9
저자가 이미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평생 따라다닐 고통과 공포는 감히 짐작도 되지 않는다. 저자의 삶을 응원한다. 당신의 앞길이 다복하길 빈다.
불공정함을 바로잡고 약자를 보호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곳이 더없이 세상의 부정과 불의를 함축하고 있었다.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대의 앞에서 다른 모든 것은 사사로움으로 치부됐다. 때로 용기 내어 조직의 문제에 대해 말하면 그저 견디라고 했다.(81p)
이 이야기를 직장 선배에게 하자 선배를 “네가 예민한 것이니 참아라, 사과하지 않았느냐, 너 말고도 수행비서 할 사람 많다, 자꾸 문제 제기하면 잘리는 건 너다”라고 했다. 그 선배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내가 말한 이후 그 어떤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낙담했다.
안희정 조직 내의 또 다른 선배에게 말했을 때도 반응은 비슷했다. 힘든 건 알겠지만 이곳에선 어쩔 수 없다고,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떠나야 한다고.(86p)
제일 처음 인계받은 내용은 지사가 구두를 편히 신을 수 있도록 어떤 위치에 어느 정도의 각도로 놓아야 하는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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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 때리지 마라, 절대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 격식 있는 자리인지 미리 확인해라, 지위에 맞지 않는 자리를 싫어하신다, 행사 시 앉는 자리에 착석하는 끝까지 봐야 한다, 보안이 필요한 식사는 수행비서 개인 카드로 결제해라, 사우나, 미용, 마사지 등 지사의 개인 일과 비용도 수행비서 개인 사비로 써라, 지사 가족들의 비용도 수행비서가 부담한다, 현금을 넉넉히 가지고 다녀라, 한도 500만 원짜리 카드를 만들어라, 지사의 식성을 파악해라, 아주 세세한 음식 기호를 외워서 맞춰드려야 한다, 얼굴이나 이름을 못 외우니 수행비서가 보조 기억 장치로 있다가 옆에서 알려드려야 한다, 각종 신고서도 수행비서가 써서 챙겨드려라, 경제 용어도 외워라, 못 알아들으면 안 된다, KTX를 탈 때 수행비서 앞에 있는 받침대는 지사의 커피와 가방을 놓을 수 있게 펼쳐놓아라, 아메리카노에 각설탕은 1개, 시럽일 때는 2번 펌핑해야 한다, 빵을 사 오라 하면 크루아상이나 따뜻한 플레인 베이글을 사라, 크림치즈와 나이프를 같이 준비해드려라, 가끔 단 것을 찾으시면 그럴 땐 옛날 꽈배기를 사라, 우유는 예전에는 커피우유만 드셨으나 요즘에는 흰 우유를 주로 드신다, 꼭 빨대 챙겨라, 자주 부르고 자주 심부름을 시키신다, 병장을 웃기는 이등병의 마음을 가져라, 공식 일정 이후 시간, 기업, 친구, 여자 이야기는 주변에 함구하라, 특히 여자 관련해서는 인수인계서 메모에서도 삭제해라, 단어 언급조차 하지 말고 어디에 쓰지도 마라, 보고 듣고 알아도 비밀을 유지하고 반드시 함구하라, 중요하니 재차 강조한다 (···)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인수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사님 기분’이다, 여기에 별표 두 개를 그려라, 인수인계 사항들은 모두 지사님 기분을 맞춰드리기 위한 것이다.”
안희정은 전지적 상사였다. 특히 비서는 그의 기분을 건드리면 안 된다. 기분이 중요하다는 말은 무형화된 권력을 구성하는 중요한 내용이었다. 그가 누군가를 자를 때는 “나를 기분 나쁘게 했다”는 한마디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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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사가 말을 하지 않아도 기분을 알아야 했다. 눈빛이나 호흡만으로도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안희정은 침묵만으로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침묵만으로도 불편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지위를 갖고 있었다. 문자 연락에 답이 늦으면 바로 “···”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 메시지는 내 전임자들에게도 사용하던, 무언의 질책이 담긴 불편한 심기의 표현이었다.(88-91p)
진짜 소름 돋네 시발
지사의 전화는 수행비서에게 모두 착신되어 있다. 그는 전화를 모두 돌려놓았고 개인적으로 통화하고 싶을 때만 직접 착신 전환을 풀어서 자신의 전화기를 사용했다. 한밤중에 오는 전화와 문자도 모두 수행비서가 받는다. 24시간 근무를 하는 것과 같았다. 밤이든 새벽이든 자다가도 일어나 정치인들의 전화를 받아 “현재는 통화하실 수 없는 상황”이라고 양해를 구했다. 메모를 해둔 후 지사에게 아침, 점심, 저녁으로 전화 수발신 내역을 빠짐없이 보고했다. 이런 업무를 하다 보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함은 물론 늘 긴장 상태로 있어야 했다.퇴근 후에도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야 했다. 공적 업무 외에 사적으로 지시받는 업무도 많다 보니 어느 순간 공과 사가 구분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지시하는 일이라면 수행비서는 뭐든 해결해내야 한다. 지사의 가족과 관련된 업무도 휴일 구분 없이 수시로 있었다. 휴가 때나 명절에 아들과 요트를 타러 가거나 가족끼리 놀러 가는 일정의 숙소, 식당, 체험 활동 등을 알아보고 예약해야 했고, 지사의 친구 가족이나 지인들이 묵을 장소도 알아봐야 했다. 사모나 지사가 친구들 모임에서 술을 마셔 운전을 못 하면 한밤중에 불려 나가 대리운전을 했다. 맥주, 담배 같은 개인 기호품도 수행비서가 대신 사서 숙소나 집무실로 가져다주어야 했다. 미투 이후 나는 “왜 네 번이나 지사의 방에 갔느냐”는 말을 수없이 들어야 했지만, 그날들은 사적 심부름 때문에 불려 갔던 수백 전 중 아주 일부에 불과했다. 늦은 밤, 새벽, 퇴근 후, 휴일에도 몇 번이고 불려 가 심부름을 했다. 담배나 라이터가 떨어지면 준비해두지 않았다고 질책을 받았다. 담배는 비서실의 공적 비용으로 대량 구매했고 외부에서는 내가 따로 사서 공급했다. 맥주나 커피, 컵라면, 달걀, 우유, 빵, 잼, 버터, 시리얼, 김치, 속옷, 면도기, 치약, 칫솔, 휴대폰 케이스, 보조 배터리, 충전기 등을 밤낮 상관없이 공관으로, 입 숙소로, 마포 오피스텔로 가져오라 사 오라 수시로 시켰다. 지인이 김장을 하는데 가뭄과 홍수로 고춧가루를 구하기 어렵다 하니 좋은 고춧가루 10근을 사서 보내라고 시켰고, 가족에게 줄 간식과 선물도 내가 사오도록 했다. 그리고 이런 비용들은 수행비서의 사비로 내야 했다.
안희정의 부인이 빵이 먹고 싶다고 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이 식사하는 시간에 그걸 사러 다녀왔다. 유명 빵집이 멀든 그래서 내 밥을 못 먹든 상관없이 말이다. 이런 구매에 들어가는 돈은 누구에게도 받을 수 없었다.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더 주장할 수도 없었다. 처음 수행비서 인수인계 때 선배가 만들어두라고 한, 한도를 최대로 높인 개인 신용카드의 쓰임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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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안희정의 대외적 이미지와 내가 업무를 통해 겪는 실상은 낱낱이 상반되었다. 그는 신분과 계급이 존재하는 세계에 살았다. 나의 자리에서는 그에게 아주 기본적인 인권이나 노동권도 존중받기를 기대할 수 없었다.
나는 많게는 주 140시간을 일했고, 통상 주 130여 시간을 일했다.(99-101p)
안희정은 성 평등을 지지하는 진보적 지도자인 것처럼 알려져 있었지만 내가 본 그는 누구보다 자신의 권세를 잘 알고 누리는 사람이었다. “내 위치에 이런 것까지 해야 되겠느냐”며 일정을 당일에 취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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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자 안희정의 정치를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던 내게는 이런 괴리가 고통스러웠다. 대선 경선 당시 그는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을 줄이겠다는 연설을 하며 환호받았지만, 정작 그를 위해 일하는 이들의 노동 시간에는 한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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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웠던 일은 노동자로서 내가 할 이유가 없으며 해서도 안 되는 일들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안희정이 아들과 가는 요트 강습을 예약하거나 의약품을 대리 처방받아 전달하는 등의 일이 비일비재했다. 도로 주위에 어려움을 토로하면 “비서는 업무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지사가 지시하는 것이라면 뭐든 해내야 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105p)
안희정은 성폭행을 한 후 매번 즉각 사과했다. “대통령이 되는 길이 버겁다.” “내 위치가 너무 힘들고 외로워서 그랬다.” “어린 너를 가져서 미안하다.” “내 직원에게 부끄러운 짓을 해서 미안하다.” “너는 수행비서이니 나를 이해하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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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수발까지도 수행비서가 감내해야 할 일인 양 세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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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과 사과는 아무렇지 않게 반복되는 연속적 일상이었다. 집무실이나 관용차 안에서는 가슴이나 허벅지 등 신체를 수시로 툭툭 치고 만졌다. 그가 차 안에서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할 때면 나를 옆에 앉히고 손 마사지를 시켰다. 늦은 시간 외진 장소, 화장실 앞이나 기차, 식당 안에서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성추행은 계속됐다. 그의 성추행과 성희롱은 점점 더 과감해지고 심해졌다. 처음에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자 무감각해졌다. 이 조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참고 일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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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고 안희정의 힘을 알면 알수록 더 이상 대항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갔다.(110-111p)
“왜 성폭행 당시 즉각 수사 기관에, 경찰청에, 감사 기관에 말하지 않았느냐?”
“왜 바로 그만두지 못했느냐?”
성폭력을 다루는 세상의 방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피해자들이 얼마나 어려운지, 수사가 어떤 식으로 진행 되는지, 처벌 여부가 어떻게 결정되고 처벌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안타깝게도 내 삶 가까이에서 성폭력 피해 사실들을 보아왔기에 나는 이 모든 과정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희정을 24시간 수행하며 나는 수시로 경찰 고위 간부의 전화를 지사에게 연결해주었다.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을 만나고 있는 지사를 수행하고 있었고, 대통령과 만찬을 하고 있는 지사를 청와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사에게는 일상인 그런 대화와 만남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며 그가 가진 권력을 항상 다시 실감했다. 나는 그와 싸울 수 없음을, 내가 겪은 것을 어느 곳에도 상의할 수조차 없음을 알았다. 내가 신고한다면 그 신고를 받게 될 사람들은 안희정과 관계를 갖고 있는 이의 부하 직원들일 것임을 알았다.(112-113p)
지시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완곡한 표현입니다. 비서는 지시를 거스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거스를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에서 자신이 모시는 상사를 충실히 보좌하는 비서라는 전문직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현실입니다. 부당한 것에 싫다고 말하라고요? 아니라고 하라고요? 이런 언사는 비서라는 역할과 그 특수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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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현 검사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례식장에서, 장관을 옆에 모셔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말할 수 없음. 문제제기할 수 없음. 그것이 바로 위력입니다.(138-139p)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가해자 측은 성범죄 사건을 ‘합의에 의한 관계’ ‘불륜 관계’로 정의하면서 ‘법적 문제’에서 ‘도덕적 문제’로 전환시키고, ‘꽃뱀’ 담론을 끌어와 생존자를 가정 파탄을 초래한 ‘가해자’로, 안희정과 그의 주변 사람을 ‘피해자’로 이미지화했다. 또한 ‘성적 자기결정권’에 관한 페미니즘 담론을 재해석하여 성폭력의 책임을 생존자에게 돌리는 전략을 취하며 성폭력 문제를 ‘개인화’했다”.(170p)
상사에게서, 교수에게서, 선배에게서 힘의 작동 원리에 따라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함께 적용되는 것이 위력이다. 위력의 무서운 점은 위협적인 말을 듣지 않아도, 스스로 몸이 굽혀진다는 것이다. 위력은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다. 타인의 의사를 제압할 수 있는 유형적·무형적인 힘이다. 폭행이나 협박을 동원한 경우는 물론,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이용하여 의사를 제압할 경우도 포함된다. 우리는 살면서 그런 힘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고, 느끼고, 경험하고 있다. 때로는 직급으로 인해, 때로는 성별로 인해, 때로는 나이로 인해, 때로는 조직이나 재물로 인해······. 그렇게 각자의 일상에 위력은 늘 존재하고 있다. 그 위력에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참는 일은 많다. 그럼에도 개인은 그 안에서 자신의 업무나 학업을 쉼 없이 이어나간다. 위력이 존재한다고 해서 학교나 직장을 바로 그만두지는 않는다. 그것이 위력의 실상이자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이다.(174-175p)
죽어야만 시선이 바뀔까? 그래야 나를 믿어줄까? 그들이 말하는 ‘가짜 미투’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 한국 사회에서 누가 대체 성폭력을 당했다며 제 인생을 그렇게 해체하면서까지 강간 경험을 내놓을까? 내가 살아 있는데도 저렇게 새빨갛게 거짓말을 하는데, 내가 죽는다면 더한 거짓말로 모든 게 새롭게 날조될 것이라 생각한다.(271p)
성폭력이 신체와 정신에 가하는 살인이라면, 2차 가해는 현재의 삶, 과거와 미래, 자아, 인격에 대한 살인이었다. 성폭력이 비공개 살인이라면, 2차 가해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칼로 난도질 하는 살인 같았다.옷이 산산이 찢기고 벗겨져 알몸인 채로 마구 채찍질당하는 기분이었다. 산 채로 죽음을 향해 내몰리는 상황이 고통스러웠다.(275p)
성폭력 신고는 쉽지 않다. 얼굴과 이름을 내놓고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한다. 비공개로 신고를 하더라도 피해자가 속한 조직 내에서는 신고자가 누구인지 금세 알아낸다. 알음알음 피해자의 신상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대부분의 성폭력은 권력의 차이에서 비롯되기에 가해자들은 여전히 조직의 핵심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피해자를 향한 조직적인 공격을 시작한다. 2차 가해다. 가해자는 여전히 해당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서 피해자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피해자가 그 힘 밖으로 나오려면 그 분야에서 쌓아온 자신의 미래도 함께 버려야 한다.(295-296p)
“왜 안희정 지사와 그렇게 친밀하고 오래된 관계였는데도, 알고 지낸 지 얼마 안 된 후배의 이야기를 믿었느냐? 그 이야기를 듣고 안희정 지사와 상의할 생각은 하지 않았느냐?” 선배는 아래와 같은 맥락으로 답했다고 들었다.
“제가 GOP에서 소대장으로 복무할 때 일입니다. 아침에 철책을 점검하고 오는 길에 전입 온 지 얼마 안 된 이병이 입 주변에 피를 흘리는 걸 보고 왜 그러냐고 물어봤습니다. 이병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부소대장에게 맞았다고 조심스레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부소대장은 제 방에 찾아와 이병과 셋이 이야기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부소대장이 못 들어오게 문을 잠그고, 헌병대에 연락해서 연행해가도록 조치했습니다. 사실 관계는 그곳에서 판단하도록 했습니다. 부소대장은 저와 1년을 넘게 근무한 사람이었고, 이병은 부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습니다. 부소대장이 저와 훨씬 친했지만, 계급과 권력의 차이가 확실한 둘을 동일 선상에 놓고 사실 관계를 물어본다는 것은 공정하지도 않고, 피해자에게도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김지은 씨의 이야기를 듣고 신고를 통해 수사 기관의 정확한 판단을 받으라고 조언했습니다.”(328p)
ㅡ 김지은, <김지은입니다> 中, 봄알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