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데이비드 립스키, <처음부터 진실되거나 아예 진실되지 않거나> 中, 엑스북스
2020/11/12
DFW에 다시 관심이 생기도록 만들었다. 아마 내년에 infinite jest가 번역 출간될 듯한데, 몇 꼭지 읽고 포기한 그의 다른 작품을 좀 더 끈기를 가지고 읽어볼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The End of the Tour도 빨리 챙겨봐야겠다.
나는 야심과 다다름에 대한, 영화와도 같은 미국적인 신념을 길잡이 삼아 살아왔다. ‘어느 장소에 이르는 최선의 길은 내가 이미 그곳에 가 있는 것처럼 사는 것’말이다. 마법 같은 생각이자, 언어를 배울 때 사용하는 효과적인 공부 방식이기도 하다. 프랑스어만 듣고 말하면 마침내 프랑스어 실력이 는다.(대학에서도 이 방식을 쓸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준다. 기둥들과 완만한 언덕, 학생들은 아테네인이 되거나 부자가 될 것이다.) 소설만 생각하고 소설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다 보면, 마침내 세상이 날 둘러싼 서점이 된다. 눈을 낮추는 건 합리적이지 못하다. 불운일 뿐 아니라 본격적인 침몰에 가까워지는 일이니. 나는 칠 년 동안 소설가처럼만 살았고 두 권의 책을 냈다. 그리고 이 방식이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했다.(35p)
근래에 제 독서 취향이 꽤 현실적으로 바뀌었어요. 아주 실험적인 글은 읽기에 지독히도 재미가 없어서요.
아이디어가 우선이 되면 그런가요? 그런 경우에 글이 안 좋아지나요?
실험적인 글이 못쓴 글이라는 말은 할 수 없어요. 다만, 그런 글은 독자의 입장에서 수고를 들여 읽어야 하는데, 그 보상에 비해 들여야 하는 수고가 말도 안 되게 커요. 제가 그런 실험적인 글을 읽는다고 할 때, 여기서 실험적이라 함은 정말 실험적이고 따라가기 힘든 걸 말해요. 실험적인 출판사와 다양한 글을 작업 하기도 하니까 그런 걸 읽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전 어린애이고 어른들이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하는 걸 듣는 느낌이에요. 그 책이 실은 다른 작가, 이론가, 비평가들을 위해 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바람에 “와 이거 뭐지! 엄청 재밌네. 지금 밥 먹을 때가 아니야, 당장 읽어야겠어”라는 배고픔도 가시게 하는 마법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죠.(103p)
작가들이 가진 건, 자리에 앉아서 주먹을 불끈 쥐고 사람들이 대개는 어느 정도까지만 인식하고 있는 것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절실하게 인식할 수 있는 면허와 자유예요. 작가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한다고 할 경우, 그가 기본적으로 하는 행위는 독자가 얼마나 명석한지를 독자에게 상기시키는 일이에요. 독자가 본인이 늘 인지하고 있던 무언가에 눈을 뜰 수 있게 해주는 거죠. 이건 작가가 일반 사람보다 능력이 더 뛰어난지에 관한 문제가 아니에요. 그보다는, 작가가 어떤 것으로부터 기꺼이 본인을 분리하고 발전하는···정말로 열심히 깊게 생각하는 문제예요. 누구나 그런 사치를 누리는 건 아니죠.(111p)
아마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 아닐까.
사람이 노력을 통해서 진실될 수는 없다. 처음부터 진실되거나 아예 진실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지, 애써 도달하는 상태가 아니다.(151p)
기자님과 제가 삶에서 이른 시기에 얼마간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면, 우린 궁극적으로 운이 좋은 거예요. 그런 성공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남보다 이르게 꺠닫게 되니까요. 그러니까 무엇이 내게 의미가 있는지 찾아가는 과정을 일찍 시작하게 된다는 말이에요. 솔직히 터놓고 말해서 지금 이 상황에서 제가 가장 흡족한 건 기자님이 정말 잘하고 있다는 거예요. 제가 이제는 기자님이 좋아지기 시작해서 이런 이야기까지 털어놓게 되었으니까요. 미친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제가 지금 이렇게 유명해지게 된 상황이 제게는 큰 의미가 아니라서 흐뭇해요.(155-156p)
TV를 많이 보고서 공허함을 느끼는 한 가지 이유, TV를 유혹적인 존재로 만드는 한 가지 요소는 TV가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환상을 제공한다는 거예요. TV는 방 안의 사람들이 말하고 즐기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만, 나에게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저는 그들을 볼 수 있지만, 그들은 저를 볼 수 없다는 얘기죠. 또 그들은 저를 위해 그곳에 존재하고, 저는 TV로부터 즐거움과 자극을 받아요. 뭔가를 도로 주어야 할 필요는 없어요. 다만 살짝 스칠 정도의 관심만 주면 되죠. 그 점이 무척 유혹적이에요.
문제는 역시나 공허하다는 거죠. 진짜 사람을 곁에 둘 때 다른 점은 제가 뭔가 행위를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제게 관심을 주고, 저도 그 사람에게 관심을 주어야 하죠. 제가 그를 바라보고, 그도 저를 바라봐요. 스트레스의 정도가 높아지죠. 그렇지만 거기에는 자양분 역시 있어요. 한 생명체로서 우리 모두가 같은 방 안에 함께 있을 방법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TV가 사탕 같다는 거예요. 진짜 음식물보다 더 즐겁고 먹기 편하다는 점에서요. 하지만 진짜 음식물과 달리 영양분은 없죠. 작가라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책 속에 담아야 해요. 그래서 저는 제 주변 세상에 대한 감각과 타인에 대한 인식의 상당 부분을 기꺼이 TV에서 얻으려고 해요. 아니, 실제로도 그러고 있어요. 그렇지만 전 현실의 진짜 사람들을 대할 때 수반되는 스트레스와 어색함, 또 제게 닥칠지도 모르는 거지 같은 상황을 굳이 감당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리고 인터넷이 발전하고 우리가 서로 연결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기자님과 제가 이 인터뷰를 이메일로도 할 수 있겠죠. 기자님을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되고 그게 제게는 훨씬 더 편할 거예요. 그렇죠? 어느 시점이 되면, 우리가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되는 어떤 장치를 몸속에 만들어 두어야 할 거예요. 기술이 점점 더 발전할 테니까요. 게다가 우리를 사랑하는 게 아닌 우리의 돈을 원하는 사람들이 제공하는 화면 속 영상을 혼자서 바라보는 일이 점점 더 쉽고 편하고 즐거워질 거예요. 그것도 괜찮아요, 적은 양이라면요. 그렇지만 그게 우리의 기본적인 주식이 된다면, 우리는 죽고 말 거예요. 아주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죽게 될 거예요.(179-180p)
제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아까와 똑같은 얘기예요. 며칠 전에 벳시가 이런 말을 했어요. “조직 문화, 조직 정신, 조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그런 글을 전부 어떻게 쓴 거야?”기자님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작가는 하나의 자질로서, 본인이 방대한 지식을 알고 있는 것처럼 독자에게 보여야 하죠. 행에서든 행간에서든 말이에요. 어떤 소재를 잘 알고 그 소재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 왔다는 인상을 심어 줄 수 있어야 해요. 작가는 독자의 신경 말단에 어떤 효과를 일으키길 원하니까요. 전 그런 걸 꽤 잘해요. 어떤 소재에 대해 상당히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어요. 실은 제가 아는 내용이 대개는 조금만 찾아보면 다 알 수 있는 것이죠. 아주 전략적인 조사 방법이에요.(269p)
장담하는데, 기자님도 중독되듯이 좋아하는 게 서너 가지는 있을 거예요. 제가 재활시설에서 깨달은 건 열한 살 때부터 헤로인을 해서 에이즈로 죽어 가는 스무 살짜리 매춘부와 제가 다른 게 그저 우연이라는 거예요. 어떤 약물을 선택했는가, 어떤 행위에 중독되었는가, 중독 대상 외에 의지할 다른 자산들이 있었는가의 문제예요. 저는 책과 글쓰기를 무척 사랑해요. 그런데 저와 달리, 그 밖에 사랑하는 것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요.(270p)
작가님이「블루벨벳」과 「브라질」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현실적이지 않은 영화에서라도 디테일이 중요하다는 것인가요?
네. 어떤 초현실주의 작품이든, 그 작품의 99.9퍼센트가 전적으로 현실적이면 더 큰 효과가 발휘돼요. 제가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았다면 분명히 설명하지도 못했을 거예요. 제자들에게는 이렇게 말하거든요. “이건 충분히 현실적이지 않아.” “그런데 이건 초현실적이어야 해.” “음, 그런데 넌 이해하지 못했구나.” 초현실주의는 효과를 내지 못해요. 초현실주의라는 말은 대개 현실주의라는 거예요. 추가적인 현실주의라는 뜻이에요. 현실주의 위에 존재한다는 거죠. 린치의 프레임 안에 있는 한 가지예요. 그 밖에 모든 것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지 않고 완전하게 조직되지 않으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해요. 관객들에게 파급을 일으킬 수 없죠.(314-315p)
“악마가 어떤 줄 알아?” 이 영화를 한 번밖에 보지 못했지만 절대로 잊히지 않아요. “붉은 망토를 두른 모습일까? 와우! 아냐. 악마는 마음씨 좋고 호감 가는 사람일거야. 그러고는 선에 대한 우리의 기준을 서서히 낮추게 될 거야. 그게 그가 하는 일이야. 그리고 그는···”(354p)
그런데 제가 좀 더 똑똑해질 수 있었던 건 제가 다른 사람들보다 크게 똑똑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덕분이에요. 내지는 다른 사람들이 저보다 훨씬 더 똑똑한 면이 있다는 걸 깨달은 덕분이에요.
(...)
제가 보기에 글로 표현하는 자신이 현실 속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모든 글을 쓸 때 초고를 여섯 번 내지는 여덟 번씩 써요. 제가 가장 똑똑한 작가는 아닐지도 몰라요. 그런데 이런 면은 제 성격에 딱 들어맞아요. 정말 정말 열심히 하는 거요. 저한테 24시간만 줘 보실래요? 이 인터뷰를 메일로 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전 정말, 정말, 정말로 똑똑해질 수 있어요. 전 그리 빠른 사람이 아니에요. 저를 많이 의식하기도 하고요. 더욱이 쉽게 혼란을 느껴요. 혼자 방 안에 있으면, 거기에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전 아주 똑똑해질 수 있어요.(379-380p)
기분은 정말 좋았어요. 사람들이 전부 거실에 앉아서 그 기사를 읽고 있었거든요. 기분이 굉장히 좋았고 좀 과장하자면 날아갈 듯 황홀했어요. 그런데 30초간은 그렇게 좋다가 굶주린 듯 그걸 더 원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바로가 아닌 이상, 진짜 문제는 좀처럼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이라는 걸 알겠죠. 그렇게 단 몇 초간 좋다가 그걸 더 많이, 그보다 더 나은 걸 갈망하는 굶주림이 생겨요.(436p)
어떤 종류의 설렘이든 현실을 인식하고 나면 한풀 꺾이고 말아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떤 기제가 돌아가고 있다는 현실을 인식하게 되면요.(469-470p)
전에도 그렇게 많은 호텔에서 숙박한 적이 있나요?
없었어요.
어땠나요?
괜찮았어요. 다만 크루즈선 탔던 경험과 좀 비슷했어요. 제가 얼마나 금세 사치에 익숙해지는지, 미니바 서비스가 얼마나 금방 어마어마한 호사에서 그저 부차적인 서비스로 변하는지 알게 됐어요···. 심지어 지금도 제가 식료품점에 먹을 걸 사러 나가야 한다는 게 짜증이 나요. 제가 어지르면 누군가가 대신 치워 준다는 걸 아는 일에도 익숙해졌죠.(473-474p)
어찌 보면 더 외로워질 수도 있어요. "내가 이렇게 하면 이 사람에게 이런 영향을 미칠까?“ 뭐 이런 식이 된다면 말이에요.
뉴욕에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누가 그런 농담을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요. 섹스 후에 작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요? ”당신에게만큼 내게도 좋았나?“
[우리가 웃는다. 그리고 나는 농담을 확실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깨닫는다.]
그 농담의 어떤 점이 재밌는 건가요?
그런데 왜 그렇게 크게 웃었죠? 제가 보기에 글쓰기에는 완전히 헐벗은 진심과 조작이 절묘하게 섞여 있는 것 같아요. 또 무언가가 어떤 특정한 영향력을 발휘할지 늘 가늠하려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건 아주 귀중한 자산이긴 하지만 가끔은 신경을 끊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제가 이번 책처럼 긴 글을 쓸 때 여자들과 관계가 그토록 어려워지는 이유는 제가 자발적이면서도 저를 무척, 무척, 무척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에요.
작가가 형편없는 배우자라고 생각하나요?
보통 사람으로서 제가 짐작하자면, 작가는 유쾌하고 노련하고 만족스럽고 겉보기에는 배려심 깊은 배우자가 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오히려 외로움을 느끼겠죠.(495-496p)
ㅡ 데이비드 립스키, <처음부터 진실되거나 아예 진실되지 않거나> 中, 엑스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