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윤경희, <분더카머> 中, 문학과지성사
2021/7/24
처음 글을 읽어가며 느낀 것은 특정 사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까지 집요하고 진지하게 서술할 일인가라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아래의 발췌는 보물찾기를 쓰레기 줍기로 착각한 것에 대한 작가의 서술이다.
‘나는 착한 어린이가 아니라 구제 불능으로 주의력이 결핍된 바보였다. 나는 단편적인 정보들에서 사건의 정합적 이행을 유추해내는 유능한 탐정이 아니라 상투적인 도덕 규범에 얽매여 판단의 오류를 저지르는 편협한 꽁생원이었다. 나는 예리한 관찰자가 아니라 세계의 접힌 귀퉁이들을 펼쳐 읽지 못하는 문맹자였다. 나는 보물 탐험가가 아니라 넝마주이였다. 나는 최초의 말을 놓쳤다. 나는 타인의 말을 알아듣지 않음으로써 세계를 잘못 파악했다. 나는 잘못 축조한 세계 안에서 그릇된 자아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놓친 말이 진리처럼 되돌아온 순간, 모든 허상이 깨지고 무너지고 벗겨졌다.
외부 사건의 연속적 흐름, 사건 생산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때 수행해야 하는 규칙들, 보다 근원적으로 그 사건을 정초한 타자의 언어, 이 세 가지를 인지하지 않음으로써 게임의 장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킨 잘못에 기인하여 사후적 몽타주의 간헐만 가능한 이날의 기억은 하나의 장면으로 집약된다.’(47-48p)
....... 뭐 이런 식이다. 좀 놀리고 싶기도 했는데 계속 읽으니 작가가 정말로 자신의 말과 글에 진심이라 그럴 마음은 사라졌다. 읽는 동안 한국어 어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철회라는 단어를 한 번쯤 꼭 써보고 싶었으니까. 우아하고도 애상적이다. 언술의 내용은 취소하되 화행의 기억은 보존한다. 그러므로 철회는 오류를 자인하는 가장 예의 바르고 세련된 방식이 아닐까.(151p)
살아오면서 그와 비슷한 사람들을 의외로 많이 마주쳤다.
논변 혐오에서 논변의 대상인 지식 혐오로, 지식 혐오에서 지식의 도구인 언어 혐오로, 그리고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 혐오로, 점차 자신의 사유와 감정을 변질시키는 사람들. 타인의 말을 비판하면서 정확한 논리와 올바른 어법을 촉구하지만, 가만히 통찰하여 들어보면,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수사적 술책 속에 언어, 지식, 인간을 향한 강박적 증오와 분노를 욱여 담아 표출한 뿐인 사람들.
너무나 많은 예가 있다. 타인의 사소한 맞춤법 실수나 비문을 지적할 때, 조용히 친절하게 언급하는 대신 굳이 떠벌려 조롱함으로써 언어의 품격 자체를 훼손한다거나. 논쟁 중 말꼬리를 잡는 데 급급하여 공동의 사유가 더 넓고 생산적인 언어의 장으로 나아가는 것을 기어코 방해한다거나. 한줌의 명제로 환원되는 논리적 엄밀성을 구실로 언어의 우발적이고 시적인 운동성을 소거한다거나. 자기에게만 소중한 허상의 규칙, 관습, 어법, 문체를 따르지 않는 글쓰기는 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논문도 아닌 양 비하하거나. 질문하는 까닭은 지식을 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대답으로 주어지는 타인의 언어를 더럽히고 제 것처럼 타락시키려고. 사소한 낱말, 표현, 어법에 과민하게 집착하여 반대하기. 그리고 집요하게 지적하고 교정하기. 가독성을 내세워 문학적 목소리의 음역 연습을 저지하고 문장의 분방한 기운을 꺾기. 일본어식 한자, 외래어, 소위 번역투 문장 등 단일 국가어의 순수성을 오염시킨다고 여겨지는 말들의 결벽증적 청소. 세계, 현실, 사적인 삶에서 불의와 부조리에 대항하는 싸움에 지쳐, 말이 무슨 소용이야, 말해 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그것을 불완전하게 지시하고 표상할 수밖에 없는 언어에 악감정을 투사한다거나, 그럼으로써 여전히 힘껏 싸우는 사람들에게 열패감을 전염시키기.(192-193p)
무심히 눈길을 준 기사 제목은 「이유식 만드는 법」. 날짜는 1973년 6월. 이때의 고요한 감동을 나는 너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까. 내가 아직 세상에 있지 않았을 때 나를 기다린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의 상상 세계에 나는 이미 한참 전에 도래해 있다. 남은 달들을 무사히 채우고 나와, 젖도 떼고, 벌써 사람의 밥을 먹으려 한다. 이 사람이 이렇게 지을 밥을 먹기 위해서라도, 나는 있지 않으면 안 되었구나. 미래의 상상은 사랑의 한 형식임을, 너의 생이 저 앞 멀리 지속되리라는 기원과 확신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가장 큰 선물임을, 나는 배웠다.(228-229p)
ㅡ 윤경희, <분더카머> 中,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