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그 외

ㅡ 황정은, <일기> 中, 창비

mediokrity 2021. 10. 22. 23:43

2021/10/22

 

 

우리 자매의 부모는 여전히 불행하고 불운해 당신들의 감정과 삶에 가족 구성원이 모두 휩쓸리기를 바라고 있으며 마땅히 그렇게 되는 것을 화목이고 친밀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나는 그런 시도들에 동의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친밀한 관계가 아니다. 내가 내 부모와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씁쓸하거나 놀랍다는 듯한 얼굴로 그래도 부모인데 가족인데, 하고 말한다.

(...)

그래도 부모인데 가족인데.

이 말은 그래서 아무런 입장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의견도 생각도 마음도 아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이 입장이고 의견이고 생각이고 마음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부모이고 가족’이라는 말은 그중 어느 것도 아닐 뿐 아니라 누군가를 죽음으로 등 떠밀 수 있는, 상투적이라서 해로운 말이다. 나는 뒤늦게 발견되곤 하는 가정폭력 사망의 첫 번째 원인으로 어른들의 그런 상투성을 꼽는다. 자기가 가진 것만을 헤아리는 그 게으른 태도들 때문에, 어린이가 고통 속으로 돌아가고 거기 방치된다.(52-55p)

 

 

내 최초의 감정이 하필 공포와 혐오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때가 있다. 당시 파도와 상상된 파도의 차이를 생각하면 내게 공포와 혐오란 상상된 것에 가깝다. 파도라는 생물을 상상하며 바다를 응시하던 나는 내 말랑한 몸을 보호해줄 껍데기랄 것도 없고 생존에 필요한 정보도 기술도 갖추지 못한 어린이였으므로 그때 내게는 공포와 혐오가 가장 유용하고도 쉬웠을 것이다. 파도라는 낯선 것이 내게 다가올까봐 무섭고 그것이 내게 달라붙을까봐 싫고. 공포와 혐오는 애쓰는 상태가 아니다. 그 중에 혐오는 특히 그래서, 그건 지금 내게도 쉽다. 그런 감정이 내게 문득 쉬울 때, 뭔가가 누군가가 즉시 싫고 밉고 무서울 때 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로 상상된 것인지, 혐오는 아닌지를 생각한다.(68-69p)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 정치적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런데 나는 누가 어떤 이야기를 굳이 ‘너무 정치적’이라고 말하면 그저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그건 너무 정치적,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대개 이런 고백으로 듣는다.

나는 그 일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습니까.(133-134p)

 

 

 

ㅡ 황정은, <일기> 中,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