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신의철, <보이지 않는 침입자들의 세계> 中, 21세기북스
2021/11/24
오늘날 면역학에는 필요 이상의 과다한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다. 인간이 앓고 있는 수많은 질병 중 면역학적인 원리나 기전과 상관없는 질병에까지 면역학적 해석의 틀을 갖다 대는 것이다. 바이러스나 세균의 감염으로부터 우리의 몸을 방어하는 것이라는 면역반응의 원리를 이와는 전혀 상관없는 온갖 종류의 질병에까지 범주를 확장시켜 건강의 기준으로 삼고는 한다. 이는 면역학자로서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논리다. 앞서 여러 번 이야기했던 자가면역질환의 경우만 봐도 면역반응은 너무 강하게 작동할 경우 오히려 건강에 해를 끼친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언론이나 광고에서는 마치 면역을 불로장생의 비밀이라도 된 듯이 ‘면역력’이라는 개념까지 사용하며 이야기한다. 면역과 건강은 결코 일차원적으로 연결 지을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면역이 극단적으로 낮은 질병인 면역결핍질환에는 선천성면역결핍증primary immunodeficiency과 앞서 이야기한 후천성면역결핍증이 있다. 선천성면역결핍증은 유전자 이상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특정 면역세포가 존재하지 않거나 사이토카인이 제 기능을 안 하는 등의 문제가 있는 경우다. 이와 달리 흔히 에이즈라고 하는 후천성면역결핍증은 HIV에 의해 CD4 T세포가 감염되어 발생한다. 다른 면역세포들의 작용을 도와주는 CD4 T세포가 장기간의 HIV 감염에 의해 파괴되면 면역반응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 면역결핍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최근에는 HIV 증식을 억제하는 우수한 효능의 항바이러스제들이 개발되어 더 이상 불치의 병으로 인식되지 않으며, 감염자도 정상적인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모두 앞서 살펴본 이야기다. 면역력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 또 다른 사례는 장기이식 후 거부반응을 막기 위해 면역 억제제를 복용하는 환자나 항암 치료를 받는 암 환자의 경우다. 고전적으로 사용되는 항암제들은 빠르게 증식하는 세포들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항암 작용을 하는데, 이때 암세포 외에도 빠른 속도로 증식하는 장 상피세포나 모근 세포들도 파괴시키는 부작용이 나타난다. 이때 골수세포도 영향을 받아 면역세포의 일종인 호중구neutrophil의 숫자가 감소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항암 치료는 혈액 검사를 통해 계속해서 호중구 수치를 확인하며 진행된다. 호중구 수치가 급격히 감소할 경우 세균 감염에 취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는 골수에서 호중구 생성을 촉진시키는 약을 사용해 호중구 수치를 정상으로 증가시킨 후 항암 치료를 이어가기도 한다.
이상에서 말한 몇몇 경우에는 면역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 만큼 면역력이라는 개념을 도입해도 좋다. 그러나 이런 질병에 걸린 것이 아닌 이상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면역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큰 의미가 없다. 특히 최근에는 코로나19 시대를 맞이하며 특정 음식이나 건강보조식품이 면역력을 높여준다는 속설과 광고가 난무한다. 면역의 기능이 정상 범주 내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모두 소용 없는 노력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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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면역력이란 결코 과도하게 맹신해서도 안 되며, 쉽게 측정할 수도 없는 개념이다. 특정 질병의 경우 환자 상태의 평가에 도움이 되는 검사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한 가지 지표로 면역력을 점수화한 측정은 불가능하다. 즉 면역력을 높인다는 논리 자체가 모순이며, 이처럼 홍보하는 건강보조식품에는 어떤 과학적 근거도 없다.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면역력이 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흔히 피곤할 때 입술에 물집이 생기는 경험을 하는데, 이는 몸속에 잠복해 있던 헤르페스 바이러스가 면역 시스템이 일시적으로 약화되었을 때 다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이런 경우에까지 면역력이라는 개념을 갖다 대며 건강보조식품을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다. 우리 모두 경험해봤듯이, 입술에 생긴 헤르페스 바이러스 물집은 잘 자고 잘 먹는 등의 기본적인 안정만 취해도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가.
이런 정보 홍수의 시대에는, 특정 논문은 어디까지나 특정 학자의 주장이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큰 강의 흐름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논문 한 편은 아직 정설로 굳어진 팩트가 아니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한 연구팀의 주장이다. 결코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지만 비판적 사고를 통해, 과학의 이름으로 포장된 거짓이 없는지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큰 강의 흐름을 봐야 한다. 와인이 심장병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에 반대되는 연구 결과가 새롭게 나오면 어떨까? 혼란스러울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행동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바꿀 필요는 없다. 큰 강의 흐름을 보면 된다. 담배가 폐암의 주요 원인이라는 것은 오늘날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이런 주장이 영국에서 처음 제기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다는 주장을 하는 논문들도 꽤 출판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더욱 과학적인 근거를 가진, 사실에 가까운 결론을 주장하는 논문들이 자연스럽게 우세해졌고 오늘날에 담배와 폐암의 상관관계는 일반 상식으로 받아들여진다. 큰 강의 흐름을 본다는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다.
ㅡ 신의철, <보이지 않는 침입자들의 세계> 中, 21세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