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국내소설

ㅡ 이미상, <이중 작가 초롱> 中, 문학동네

mediokrity 2023. 4. 23. 02:15

2023/4/22

 

 

규가 남편의 핸드폰에서 남편과 지경의 섹스 동영상을 발견한 건 여름이었다. 지경의 표정을 보니 다행히 합의하에 촬영된 것 같았다.

달라진 건 없었다. 평소대로 일하고 저녁 차리고 애들 숙제를 봐줬다. 그러다 김이 술에 곯아떨어지면 음소거를 하고 섹스 동영상을 봤고, 몸을 뒤척이면 화면을 끄고 숨을 죽였다. 반전으로 복수를 준비해둔 건 아니었고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그저 둘의 섹스가 눈에 익기를, 고통에 담담해지기를 기다렸다. 그게 아니면 뭐. 싸우고, 이혼하고, 재산분할하고, 주말마다 상대의 집에 애들 라이딩해주고, 이따금 그래도 집에 남자가 있을 땐 이런 무시는 안 당했는데, 라는 생각이 드는 불 보듯 뻔한 일을 겪어나갈 에너지나 있나? 내일 발표할 PPT 자료 만들 여력도 없는데····· 그렇게 규는 현실감각과 현실도피가 섞인 괴로운 상태로 여름을 버텨내고 있었다.(48p)

 

 

규는 자신의 변화에 놀랐다. 원래 규는 말을 절대 안 놓는 사람이었다. 남들이 편하게 말하라고 해도 끝까지 알겠습니다, 하는 사람이었다. 규가 보기에 반말은 관계를 무리하게 좁혔다. 사람들은 예의가 없어서 반말하는 게 아니라 반말을 하고부터 예의를 잊었다. 멀리서 정중히 목인사를 하던 사람도 남의 콧구멍에 손가락을 넣게 되는 것이다.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묻고 바라면 안 될 것을 바랐다.(62p)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회피하는 사람들. 실눈 뜨고 사는 사람들. 구지경도 눈꺼풀을 바짝 내리고 사는 거죠. 집에 수북이 쌓인 단수 경고장을 볼 때도. 피임을 안 하고 했던 섹스를 떠올릴 때도. 후회할 때. 살기 싫을 때도. 위아래로 떨리는 눈꺼풀 안쪽 어둠 사이로 세상을 흐릿하게 보는 거죠. 그래서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를 똑바로 보면 모두를 똑바로 봐야 하니까요. 걔도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

세간의 기준으로, 규는 지경에게 한참 더 함부로 굴어도 되었다.

그러나 규는 그만 지경을 더 괴롭힐 새도 없이 자신이 싫어져버렸다. 과거에 규는 사람들이 지경에게 너무 모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자기 일이 되자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지경이 더 미웠다. 지경은 겹으로 잔인했다. 배우자의 배신을 보게 했고, 그것이 아니었다면 지킬 수 있었을 규 자신의 자부심을 파괴했다. 그리하여 규도 살짝 내디뎌보았다. 말을 놓고 사생활을 캤다. 내가 이래도 네가 어쩔 건데, 하는 낯두꺼움으로, 상대의 콧구멍을 꿰고 끌고 다니는 힘의 쾌감으로.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젊은 시절에는 남이 나에게 한 잘못 때문에 잠 못 이루지만, 나중에는 자신이 남에게 한 짓 때문에 잠들지 못한다.(65-66p)

 

 

그럼에도 그날 ‘악하다’는 말이 나온 까닭은 소설이 악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악하다는 말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 창작반에서는 뜬금없이 어떤 말이 유행했다. 복기나 오독처럼 평소 잘 쓰이지 않는 한자어가 유행했고 그러면 너도나도 아무 때고 그 말을 썼다. 악하다, 도 그런 말 중 하나였다. ‘되짚다’보다 ‘복기’가, ‘잘못 읽다’보다 ‘오독’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지듯, ‘생각이 짧다’ 정도면 족했을 텐데도 사람들은 기어이 초롱의 소설에 대해 악하다는 표현까지 썼고 거기에는 ‘아’ 해도 될 것을 ‘악!’ 하고야 마는 문학의 낯간지러운 과장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부당한 환기가 맴돌이치고 있었다. 초롱도 그 점을 잘 알았지만 그렇다고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74-75p)

 

 

예전부터 초롱은 궁금했다. 삶에 어떤 위기가 닥쳐야 소극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과연 나라는 사람이 설사가 나온다고 화장실에서 앞사람을 밀칠 수 있을까? 배우자의 불륜 상대에게 물을 끼얹거나, 의료 사고로 가족을 죽게 한 병원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할 수 있을까? 자의식을 이기는 시련이란 무엇일까?(83p)

 

 

초롱이 선생에게서 소설을 배울 무렵 선생은 극히 드물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씨앗만 심고 빠지는 스타일로 학생들이 서로의 소설을 물고 뜯다 올려다보면 그제야 한두 마디 던지는 식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혹은 십 년 뒤, 선생이 심은 씨앗이 잭의 콩나무처럼 학생들의 머리에서 솟구치곤 했다. 그제야 학생들은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선생의 악담을 볼 수 있었다. 세상에나. 그러나 파종은 십 년 전의 일이었다.(89p)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제3의 원은.”

두 사람은 허공에서 돌아가는 손을 바라보았다.

“나는 소설에서 친구를 그리지 않았어. 친구의 고문도 그리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떳떳했어. 설사 친구를 떠올리며 어떤 것을 썼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 변형이면 아무도 그게 친구의 이야기인지 알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본인은 알아보더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걔랑 나는 알았어. 내가 친구에 관해 한 자도 적지 않은 채 친구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너도 작가니까 알겠지만. 큭.”

선생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곤 다시 올라와 손을 흔들었다. 선생의 손이 이발소 회전 간판처럼 끝없이 돌아갔다.

“소설을 쓸 때 옆에서 이런 게 오르내리지 않니? 소설을 쓰다 고개를 돌리면 제3의 원이 보이지 않니? 물론 내가 친구만 생각하며 소설을 쓴 것은 아니야. 친구에게서 시작된 이야기는 바뀌고 바뀌어 친구도, 친구가 아닌 것도 아닌, 제3의 원이 되었고, 나는 그것을 보며 소설을 썼어. 하지만 그 제3의 원에는 친구의 삶이 들어있지. 친구의 삶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들어 있지. 그 미묘한 뉘앙스를 친구는 감지했던 거야. 이제는 알겠어. 친구는 괴로웠던 거야. 내가 소설에 쓰지 않았지만 쓰는 내내 보고 있던 것, 소설에 담지는 않았지만 소설의 대전제였던 것, 친구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구의 이야기가 아닌 것도 아닌, 제3의 원. 그 알 수 없는 구멍을 종일 노려보다 결국 나를 찾아온 게 아닐까? 친구는 단지 내가 인정하기를 바랐어. 내가 실은 자기에 대해 썼다는 것을.”(98-99p)

 

 

“나왔다! ‘이상한’ 사람.”

“그 말이 왜 안 나오나 했다. 나는 그 말보다 비겁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 차라리 위험한 사람이 낫지. 이상한 사람은 위험한 사람의 완곡어잖아? 위험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위험하다고 말하는 위험은 감수하기 싫어서 이상함의 두 가지 측면, 두려움과 매혹 중 매혹에 살짝 발을 걸치고 있는 거지. 여차하면 ‘튀려고’.”(132p)

 

 

“너 동대학은 아냐?” 수진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얼마 전까진 동대학이 동국대 말하는 건 줄 알았다. 세상 사람들이 왜 다 대학원을 동국대로 가나 했지. 동이 동국대 동이 아니라 같을 동이란다. 너도 어디 가서 기 안 죽으려면 알아둬.”(156p)

 

 

그럼 어쩔 텐가. 누워만 있을 텐가. 누워서 상상만 할 텐가. 상상은 안전하니까. 나쁜 상상과 나쁜 행동은 다르니까. 상상 ‘속’에서 죽이고 강간할 수는 있지만, 상상‘으로’ 죽이고 강간하지는 못하니까. 택시 기사의 목을 뒤에서 조르는 ‘상상’을 하는 것은 괜찮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두 줄 서기 하는 사람을 밀어버리는 ‘상상’을 하는 것은 괜찮다. 사고행위융합오류는 오류일 뿐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상상이 우세할까. 상상이 끝나고 행동이 시작되는 시점, 작은 불씨가 확 번져 걷잡을 수 없는 산불이 되는 순간, 결국 칼을 들고 초등학교 교문 앞에 서게 하는 격발의 타이밍이 영원히 오지 않으리라 누가 감히 보장할 수 있는가. 상상이 커지고 커지다 퍽 터져 현실의 발치까지 줄줄 흘러들길 내심 기대한 적 없는가? 상상을 믿지 마라.(186p)

 

 

모기와 인간은 다르다? 모기를 때려잡듯 인간을 때려잡을 수는 없다? 휴머니즘이라는 견고한 경계가 있다? 심장의 차가운 부분ㅡ노인이 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누르는 부분ㅡ을 지속 확장하고, 심장의 따뜻한 부분ㅡ서점에서 가장 헐한 책을 골라 사는 부분ㅡ을 지속 축소하면, 우리도 금세 유씨를 따라잡을 수 있다. 휴머니즘을 극복할 수 있다.(191p)

 

 

적의 수준이 곧 나의 수준이다.(196p)

 

 

우리는 사장의 호의가 헤퍼서 싫었고, 그러느니 차라리 호의의 각을 좁혀 우리에게 더 큰 호의를 베풀어주길 바랐다. 사장이 창 너머로 근사한 술을 건넬 때 우리는 우리의 것을 뺏기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느끼기 싫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런 기분이었다. 도서관에서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이 품은 마음 때문에 스스로 다쳤고, 초라해지지 않으려 무척 애를 써야 했다.(197p)

 

 

사장은 과거 자신이 주최한 책 모임을 돌아보며 사람들의 수동성에 대해 짜증을 부리곤 했다. “다들 그저 떠먹여주길 바라. 더 똑똑한 사람이 혼자 커리큘럼을 짜고 양질의 독서 목록을 제공해주길 바라. 독서는 그것과 정확히 반대로, 자치 정신을 기르기 위함인데.”

그리하여 우리는 강제성을 띤 자발성으로 매주 책을 가져왔고, 그것은 그것대로 괜찮았다. 그러나 보이는 사장의 은근한 장악을 싫어했다. “사장 새끼는 취지가 너무 많아 짜증나.” 언젠가 보이는 말했다. 사장은 우리에게 어떤 책이든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늘 골치를 썩어가며 책을 골랐다.

보이와 나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부침개가 먹고 싶다면 부침개가 다 부쳐질 때까지 전도사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와인이라고 다를까. 우리는 책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장이, 보이가 우리끼리 있을 때 “사장 새끼 책 점 치는 거 진짜 짜증나”라고 했던 바로 그 행동을 했다. 사장이 물었다.

“그래서, 이 책에선 어떤 부분이 제일 좋았어?”

보이는 그걸 ‘책 점’이라고 불렀다. 사장이 독후감을 빙자해 우리의 수준과 사연을 알아내려는 수작이라는 것이었다.

(...)

나는 보이가 어리다고 생각했다. 사장이 우리에게 책에서 마음에 드는 장면과 구절을 물어 그것으로 우리의 내면을 부당하게 읽는다 한들 뭐 그리 대순가 싶었다. 그러나 보이는 프라이버시에 예민했고, 보통 사람보다 프라이버시의 범위가 넓었다. 나는 정말 신경이 쓰이면 제대로 된 신호 대신 소음을 보내면 된다는 주의였다. 그러나 보이에게는 책에서 어디가 좋았다는 신호뿐만 아니라 대놓고 아무 말이나 하는 소음도 프라이버시에 속했다.(205-206p)

 

 

우리가 부모를 원망하자 율 리가 말했다.

“맞아, 어른들은 나쁜 짓을 해. 너희의 가슴을 찢어놔. 하지만 슬퍼 마. 억울해 마.”

(...)

“너희는 클 거야. 자랄 거야. 그럼 너희도 다른 사람의 가슴을 찢어놓을 수 있어. 어릴 적의 일은 뒤로하고, 우리는 죽는 날까지 죄의 항상성을 향해 나아간단다.”

(...)

당신도 말의 시간차공격을 당하는가? 나는 요새 자주 말의 시간차공격을 당한다. 오래전에 들은 별 것 아닌 말이 멀쩡히 몸을 돌아다니다 갑자기 내장을 찢는다. 그러면 나는 시간차공격을 당한 배구 선수처럼 속수무책이다. 상대편 공격수가 뛰어서 나도 뛰었는데, 어느새 공격수는 사라지고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다음 공격수가 스파이크를 때려넣는 것 같다. 말의 강타. 나는 그저 당할 뿐이다. 도끼날 아래 장작처럼. 게다가 배구와 달리 말의 이차 공격은 수년, 심지어 수십 년 후에 비로소 시작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남이 나에게 했던 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색무취였던 말이 뒤늦게 악취를 풍겨 때늦은 앙심을 품게 했다. 그러다 다행히ㅡ계속됐다가는 유치원 시절 문방구 아주머니를 ㅡ수소문해 칼을 들고 찾아가게 된다ㅡ점차 내가 남에게 했던 말 때문에 괴롭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은 오묘하다. 오묘하게 치사한 것이다. 분명 내가 남에게 한 악담인데 마치 내가 들은 악담처럼 느껴진다. 과거로 돌아가 이번에는 내가 상대가 되어, 어린 내가 하는 나쁜 말을 꼼짝 못하고 듣는 것이다. 내가 한 말에 나 자신이 상처받는 격으로.(232-234p)

 

 

“있잖니, 사람이 응? 너무 내 탓이오 내 탓이오, 하잖아? 그것도 꼴사납다. 자기를 미워하는 짓 같지만 실은 자기가 좋아 죽겠는 짓거리거든. 나중에, 아주 나중에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거다.(242p)

 

 

한 순 있지만 정말 하기 싫은 일.

그것은 할 수 없는 일과 다르다. 할 수는 있다. 할 수는 있는데 정말 하기 싫다. 때려죽여도 하기 싫다. 그러나 정말 때려죽이려고 달려들면 할 수는 있는 일이다. 그것은 가능의 아니라 선택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그 일을 대신 해준다는 것이 고모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목경과 무경의 부모가 밖으로 돌았을 때, 자식을 굶겨 죽일 만큼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지만 애들을 돌보기가 죽기보다 싫었을 때, 놓아지지 않는 정신이, 최소한의 양심이 저주처럼 느껴졌을 때, 차라리 불능이길 바랐을 때, 그럴 때 나타난다는 것이, 게다가 아무 설명 없이 생색 없이 철없는 가출의 형식으로 나타나 상대가 가장 바라는 것을 해준다는 것이 고모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좋은 마음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목경은 생각했다. 메리 포핀스처럼 날아다니며 ‘할 순 있지만 정말 하기 싫은 일’에 빠진 사람들 앞에 짠, 나타나는 고모에게는 오만한 고약함도 있었다. 그러나 목경은 무수한 의도 중에서 실오라기 같은 악의를 건져올리려는 결벽증을 버린 지 오래였다. 고모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사람들은 시간을 벌었다. 할 순 있지만 정말 하기 싫은 일이(결코 하고 싶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럭저럭 하기 싫은 일로 바뀔 때까지 숨 돌릴 틈을 얻었다.

목경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언니가 너무 어린 나이에 그것을 알았다는 사실이었다.(308-309p)

 

 

 

ㅡ 이미상, <이중 작가 초롱> 中,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