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마이클 슈어,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 中, 김영사
2023/5/1
그러나 1초만 더 생각해도 금방 모호해진다. 일단 부족하고 과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적절한 이유로, 적절한 대상에게, 적절한 양만큼 화가 났는지 대체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 점이 덕 윤리를 두고 가장 흔히 일어나는 비판이다.(그러니까 무턱대고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하고 연습하면 이 설명할 수도 없고 측정할 수도 없는 이론상 ‘완벽한’ 자질, 그것도 모든 자질이 갑자기 짠 하고 생긴다는 거지? 좋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조차 중용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48p)
중용에는 시도하고 실패하고 또 시도하고 실패하며 성공과 실패를 되돌아보는 과정, 즉 중용의 지점을 찾아 헤매는 멋진 과정을 계속 연마해야 다다를 수 있다.(50p)
그러나 의무론 역시 새로운 문제를 동반한다. 그중 으뜸은 이것이다. 감정과 주관적 판단을 모두가 발견해 따라야 하는 엄격한 보편 준칙으로 대체하면, 그래서 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알아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이다. 때로 윤리적 행동은 ‘감을 믿고 가는’ 활동인데 칸트는 그 감은 어리석은 것이라 고려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점이 칸트 사상에서 가장 자주 비판받는 부분이다. 칸트 사상을 따르는 것은 완전히 지적인 활동이지만 정말 더럽게 어려운 일이다. <굿 플레이스>에서 치디 아나곤예는 철저한 칸트주의자인데 언제나 정확한 칸트식 준칙 수립에 정신을 쏟다 보니 본질적인 결정 장애를 앓아 세상에서 가장 간단한 상황에서조차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한다. 어느 순간 치디는 정언명령에 반하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다 결국 자기와 친구들을 망쳐버릴 진짜 악마에게까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104p)
현실에서 상황은 대부분 트롤리 딜레마처럼 잘못하면 다 죽어버리는 그런 경우가 아니다. 대개는 상황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지루하므로 쉽게 칸트식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트롤리 딜레마는 의무론의 한계를 잘 드러낸다. 준칙을 정하는 데 오래 걸리고, 그 준칙을 따르려는 의무감에서 나오는 행동 역시 여전히 틀릴 때가 있고, 그러면 다시 시작해서 새로운 준칙을 정해야 한다.
(...)
기억하자. 중요한 것은 원래의 의도다.(108-109p)
칸트가 순수이성으로 만들라고 주장한 이 멍청한 준칙 공식은 망할 불가능에 가깝다. 내게 윤리 사상의 핵심은 실제 생활에서 쓸 수 있느냐에 있다. 칸트의 추론에는 시간과 인내심을 쏟아부을 수 있는 시나리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무척 많다. 건물이 불타고 있는데 그 상황에 맞는 적절한 보편 준칙을 발견해야 한다면 글쎄···,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까. 창문에서 소리치고 있을 그 사람들을 좀 생각하자.
같이 소리를 지르는 건 어떤가.
“여기 갇혀 있어요! 살려주세요!”
“아, 네. 잠시만요. 지금 구출을 시도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꼭 필요한 일인지 아직 확실치 않아서요!”
“전부 이해합니다! 꼭 의무론 준칙을 따르고자 하는 의무감에서 나온 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이해해주어 감사해요! 30~40분이면 답이 나올 것 같아요!”(152-153p)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스스로 생각하는 내 단점은 인내심이 없고 무모하며 지나치게 퉁명스럽고 감정적으로 극단적이며 앙심을 품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에 따르면 적당한 선만 지키면 이 모든 것은 괜찮다. 인내심을 잃어본 적 없는 사람은 무언가를 이룰 수 없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사람은 제한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진실을 회피하고 고통과 기쁨을 표현하지 않으면 정신적, 감정적으로 정체되고 결핍이 생긴다. 또한 자신에게 해를 가한 상대에게조차 아무런 앙심을 품지 않으면 그 역시 스스로를 착각하고 있거나 자존감이 너무 낮은 것이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제나 미소 짓고 한 번도 성질을 내지 않으며 스승에게 좋은 말만 하는 완벽한 성인군자가 되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사람은 어떤 덕을 실현하려 했든 딱 알맞은 수준, 즉 골디락스의 과녁에 정확히 명중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정말 짜증나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지루하다. 이 사람이랑 어울리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다보니 언제나 완벽해서 사람들에게 잘난 척이나 하는 그런 사람. (161p)
X를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X와 상관없는 Y가 훨씬 더 급한 일이라며 망신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을 ‘피장파장의 오류’라고 하며 요즘 말로는 ‘그쪽이야말로’다.
이는 보통 방어 전략으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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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내 혐의를 주장하는 사람 눈에 모래를 뿌리는 전략으로, 일시적으로 그의 눈을 가려 혐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 방식으로는 악행의 도덕적 결점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대부분 빠져나가기 힘들다. 예를 들어 팀이 여성혐오성 농담을 했다고 치자. 친구 조가 그것을 지적하며 팀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창피한 줄 알라고 한다. 팀이 답한다. “그래서 너는 완벽하니? 너는 동물 농장에서 알파카를 훔친 적도 있잖아!” 이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조가 알파카를 훔친 것은 팀의 행동과는 무관한 일이다. 팀은 조가 저지른 도덕적 잘못을 이용해 조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거나 효력이 없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바보 같은 짓이다. 두 가지 모두 사실일 수 있다. 조는 알파카를 훔치는 짓을 저질렀고 팀의 발언 역시 여성혐오성인 것이 맞다. 중요한 것은 조가 언젠가 알파카를 훔쳤다는 사실 때문에 팀의 모욕적인 발언을 지적할 기회를 빼앗아야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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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나쁜 짓을 했으니 나도 나쁜 짓을 해도 된다’는 윤리적으로 허술한 주장이다.
어떤 잘못을 했을 때 전혀 상관없는 다른 행동으로 주의를 돌리는 것은 논점 일탈이다. 논점은 ‘내가 잘못했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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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그 도덕적 관점은 철학 사상마다 모두 다르다. 그러나 어떤 행동과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사람의 행동을 기반으로 자신이 한 일을 평가해야 한다고 할 철학자는 아무도 없다. 이 점은 고정불변이지만 2023년 현재 상황을 보면 세상은 자기가 한 일과 관련 없는 다른 일을 들이대며 면피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197-199p)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가 ‘가능한 한 이기적일 것!’을 주요 윤리 사상으로 인정하는 세상에 사는 것은 사실이다. 이 사상은 분명 존재하며 여기저기 다니면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하라고, 타인 인생의 가치 같은 건 무시하고 타인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라고, 누구에게도 빚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작은 도덕을 위반하면 그것이 당장 크게 해를 끼치지는 않아도 모두의 오버톤 윈도가 아인 랜드의 얼빠진 ‘합리적 이기주의’같은 이론이 좀 더 합당하게 느껴지는 세상 쪽으로 기운다. 하지만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 윤리적 무단횡단을 할 때마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기억함으로써 정기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점검해보는 일이다. ‘좋은 일’계좌에서 출금해쓰되 잊지 않도록 영수증을 책상 앞에 붙여놓으면 된다.(226p)
그래서 바꿨다. 거래 은행을 바꾸는 게 얼마나 어렵고 성가신 일인지 불평불만을 쏟아낸 뒤 안 사실은 내가 생각한 대로 정말 짜증나는 일이었다는 거다. 어쩌면 생각보다 더. 여러 서류 작업과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전화 통화를 하고, 수신 은행 코드를 틀리고, ATM카드를 새로 받고, 모든 일이 혼란이었다. 일이 다시 순조롭게 돌아가는 데는 몇 달이 걸렸다. 거래 은행을 바꿔서 확실히 좋긴 하지만 그 과정의 여러 지점에서 속이 탔었다는 점을 숨기고 사탕발림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이 일로 두 가지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하나는 더 나은 선택을 하는 것은 상당히 성가신 일이라는 점이다. 이건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다른 사나는 하고자 하는 의자가 있고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면 가능한 일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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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실패는 좋은 일을 하려는 시도에서 나온다. 계산 착오가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런 실패는 윤리 여정에서 100퍼센트 일어나며 또한 100퍼센트 용서받는다. 더욱이 우리를 실패로 이끈 윤리적 시도에서 배우는 점이 있기 때문에 미래에 성공할 가능성이 커진다. 내가 거래 은행을 바꾸기 싫어서 취한 것은 무관심과 ‘윤리적 게으름’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원래 하던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낫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렵고 귀찮아서 실행하지 않았다. 완벽함이란 불가능하며 가끔 무단횡단할 때(실제로도 비유적으로도) 어느 정도는 너그럽게 용인해 자신에게 숨 쉴 공간을 내줘야 한다는 내용에 전체 장을 할애했다. 고단한 나날을 보내며 자신에게 너그러운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나 자신에게 솔직히 털어놓자면 거래 은행을 바꾸는 문제에서 조금 일찍 포기한 것도 사실이다. 거래 은행을 바꾸지 않았다고 내가 ‘나쁜’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바꾸고 나니 기분이 더 나아졌다. 이 일을 못하게 할 뻔한 주범은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의 게으름이다.(234-236p)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다시 말하지만 그냥 넘어가지 않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질문하는 간단한 행동만으로도 괜찮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더 잘할 수는 없을까?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의문을 던지는 것은 아프고 성가신 일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 무감각하고 냉담해진 마음을 고칠 치료제다. 기대만큼 잘하지 못했을 때 그 결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시민 참여의 중용에도 다가가지 못한다.(256-257p)
지난 20년간 소장해온 DVD로 <애니 홀>을 본다고 해서 우디 앨런에게 새로 돈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최신 영화 티켓을 사서 앨런의 주머니에 새로 돈을 넣는 것도 아니다. 물론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을 한 사람이 만든 작품을 보기로 한 결정을 자각하고 계속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큰 의미였고 내 삶과 작가로서의 경력에 직접 공헌한 영화라면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시 말하지만 자기 행동이 선한지 악한지에 주의를 기울여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문제가 있는 사람 혹은 어떤 것을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거기에서 떨어질 수 없다면 동시에 아래 두 가지를 생각해야만 한다.
1. 나는 이것이 좋다.
2. 이것을 만든 사람은 문제가 많다.
1번을 잊으면 자기 자신의 한 조각을 잃고 만다. 2번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이 초래한 분노를 부정하는 셈이며 끔찍한 행동의 피해자에게 공감하지 못한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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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좋아해도 더는 소비할 수 없을 때가 오게 마련이다. 그 예술가의 행동이 참을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서 너무 추하고 고약해 몰래라도 더 이상은 그를 지지하는 데 시간과 돈을 쓸 수 없을 때다. 그렇지만 무언가가 어쩔 도리 없을 만큼 내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를 잡았고 그것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다면, 위의 두 가지 개념을 동시에 잘 간직함으로써 그것과 내가 연결된 모든 끈을 잘라내는 고통없이 여전히 자기 수양에 정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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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에 해답은 없다. 철학을 논할 때 ‘휴리스틱’이라는 단어를 쓸 때가 있다. 휴리스틱은 문제를 제공해 해결책을 찾게 하는 일종의 도구로 행동 지침이 되는 경험적 지식을 의미한다. ‘예술을 예술가에게서 분리할 수 있는가’라거나 ‘아기 기린 목을 조르면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소유한 스포츠팀을 응원해도 될까’같은 질문에는 휴리스틱을 활용한 대답이 불가능하다. 이 모든 상황에 윤리 이론을 적용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지만 어떤 때는 그저 행동해야 한다. 선택해야 한다. 삶에서 ‘이것’과 ‘이 사람’은 떨쳐내야 하지만 ‘저것’은 그냥 둬도 괜찮다고 하는 결정은 단지 우리 자신의 추론과 본능적 판단을 바탕으로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복잡한 문제를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흔히 “어디다 선을 그어야 하지?”하고 물으며 마치 사안의 모호함을 지적하기만 하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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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 선을 긋자. 사람마다 다른 위치에 선을 그을 수 있지만 각자 서로를 위해 선을 그어야 한다.
그 선을 긋는 순간 모순에 ᄈᆞ진 자신을 발견할 것이 분명하다. 두 예술가의 행동이 얼추 비슷한데도 이 사람은 계속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떨쳐내는 탓이다. 당신 친구들은 방방 뛰고 웃으면서 왜 이 영화는 보면서 저 영화는 안 되는지, 왜 이 야구 선수는 응원하면서 저 선수는 비난하는지 지적해댈 것이다. 이러한 모순이 있을지라도 포기하거나 ‘전체적이고 분열되지 않은 존재로서의 감각’인 도덕적 완결성을 이뤄가는 작업을 그만두면 안 된다. 모순을 발견하면 되돌아가 더욱 파헤치고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필요하면 처음 그은 선을 지우고 다른 곳에 선을 다시 그려야 한다.(291-294p)
잘못했으면 사과해야 한다. 정치인이든 종교기관이든 국가든 마찬가지다. 나 역시 인생에서 저지른 수많은 실수에 일일이 사과하지 않았다. 40대에 윤리 철학으로의 여정을 시작하면서 나는 여러 날을 잠들지 못했다. 내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으면서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행성에서 1~2년 넘게 사는 행운을 누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심지어 모르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사이에 있는 모두에게도 상처를 입히는 죄를 짓는다. 이는 필연적이다. 필연적으로 그런 잘못을 저질렀다면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밖에 없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완전히 이해했다. 받아들이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최대한 빨리 사과해야 한다. 359년을 기다렸다 사과하면 아무래도 효과가 감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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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행동할지 생각하는 것은 평생에 걸쳐 이어지는 실패를 받아들이고 견디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수없이 했다. 그것은 잘못을 받아들이는 일이자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일의 연속이다. 나쁜 일이라는 게 아주 미미할 때도 있으리라. 1도울러의 10분의 1도 안되고 우주를 떠다니며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중요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런가 하면 훨씬 더 나쁠 때도 있다. 많은 사람이 실제로 느끼는 진정한 고통을 초래해 그들의 삶에 확실하게 피해를 주기도 한다. 누군가가 악행을 저지르고 고통과 상처를 초래할 때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올바른 방법으로 적당한 때에 알맞은 양으로) 옳은 일이고 적절한 행동이다. 그러나 그것이 용서받을 수 있는 잘못일 때는 우리가 잘못했을 때의 심정을 기억해 같은 은혜와 이해를 베풀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타인에게 완벽을 기대하며 불가능한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누구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간단하면서도 아름다운 현실을 부정하는 일이다.(360-362p)
ㅡ 마이클 슈어,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 中, 김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