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금정연, <난폭한 독서> 中, 마음산책
2015/12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잘 정돈된 이야기를 읽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이고 소설에는 명백한 플롯과 손에 땀을 쥐는 드라마가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은 소설을 예술가병에 걸린 비대한 자의식의 배설물일 뿐으로 그렇게 독자들을 무시할 거면 자기들만의 성을 짓고 그 안에서 굶어 죽든 역병에 걸려 뒈지든 아무튼 알아서 하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소설이 있고 다양한 독서가 있다. 가독성이 높고 흥미진진한 서사를 가진 소설에는 그것에 맞는 독서가 있고,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러한 소설에는 그것에 맞는 독서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쉽게 읽히는 소설만이 소설이라고 주장하며 그렇지 않은 소설은 현실에 발을 붙이지 않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분노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화를 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그런 독서를 갖지 못한 게 작가의 잘못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독서의 등급을 나누려는 게 아니다. 어떤 소설이 더 낫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분노를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두 종류의 독자가 있다. 자신의 독서로 이해할 수 없는 작품 앞에서 조용히 책을 덮거나 호기심을 느끼는 독자와 작가를 향해 분통을 터뜨리는 독자. 어떤 독서로 어떤 책을 읽을지 혹은 읽지 않을지 선택하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자유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방식에서 벗어난다고 무작정 작품을 비난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207~208p)
스물여덟 살의 그는 또래 남자들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아니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모든 남자들이 간단없이 그러는 것처럼 자신이 그리 아름답지는 않지만 딱히 못나지는 않고 자세히 살펴보면 은근히 매력적인 것이 어디에서 꿀리지 않는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물론 그의 코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코는 한쪽으로 휘어 있었고 그는 그것도 모른 채 휘어진 코와 함께 28년을 살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더 나쁜 것은,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알고 있던 비탄젤로 모스카르다가 아니었다. 멍청이다. 흰 코로 거들먹거리는 못난이다. 그가 믿었고 또 살았던 현실은 그렇게 무너졌고, 그날 이후 그는 무시무시한 광기에 사로잡힌다.(256p)
코가 없는 남자에게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코가 없어졌으니 코를 찾는 것인데 코가 없기에 코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삶이란 게 그렇다.(262p)
그들은 곧 눈에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서 묶이고 말았다. 게다가 서로에 대해 느끼는 그들의 호감을 어떻게 설명할까? 한 사람의 하찮은 특징이나 가증스러운 결점과 같은 것들이 왜 상대방의 마음을 끄는 것일까? 첫눈에 반한다고 하는 것은 열정의 세계에 있어서는 진실이 아닐 수 없다. 일주일도 되기 전에 그들은 서로 말을 놓았다.
그들은 골동품 삼정이 늘어선 거리를 산책하고, 공예 학교, 대성당, 국영 공장, 기념관 그리고 모든 공공 전시장을 함께 다닌다. 가끔은 영국인이나 외국인인 체하면서 즐거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는 법. “생각이 많아질수록 그들은 더욱 많은 고통을 느꼈다.”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난 그들은 머리를 합쳐 세상의 모든 비밀을 풀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그들이 가진 학식과 시간이 너무 짧았던 것이다. 단조로운 사무실도 지겨워졌다. 예전에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동료들이 이제는 어리석게만 느껴졌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횟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게다가 날마다 지각을 해서 상사에게 혼나기 일쑤였다.(289p)
ㅡ 금정연, <난폭한 독서> 中, 마음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