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김기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中, 문학동네
2024/5/21
소설집이 나오기 전에 여러 형태로 작가의 작품을 미리 접했다. '소설 보다'에서 '롤링 선더 러브', '창비 계간지'에서 '보편 교양',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세상 모든 바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적어도 김기태 작가의 팬이거나 그게 아니라도 한국문학의 현재를 성실히 따라가는 독자처럼 보이는데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소설집에 실린 9작품 중 3편은 미리 읽은지라 건너뛰고 다른 작품을 순서대로 읽었는데 어째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그나마 제일 마지막에 실린 '팍스 아토미카'가 기억에 남는다.
묘사가 다른 예술과 구분되는 소설의 유일한 특징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장기를 거의 이용하지 않고 소설을 전개한다는 사실이 작품을 모아놓고 읽으니 확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작가가 대중문화 일반에 관심이 많고 잘 알며 그 소재를 자주 작품에 사용하는데 그게 그렇게 유효한지 모르겠다. 재밌지가 않다. 예를 들어 '나는 솔로'를 위시한 한국의 짝짓기 예능을 소재로 만든 '롤링 선더 러브', 아이유 및 다양한 아이돌을 소재로 만든 '로나, 우리의 별'은 소재를 제하면 작품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아마도 비슷한 연배로 생각되는 남성 작가가 다루는 세계와 소재를 동시대를 살고 있는 내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소설적 재미를 크게 못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다 그렇지 않나. 자신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주제를 타인이 이야기할 때 관용이 부족해지는 것처럼.
결국 모두가 헤어질 이유는 많고 계속 만나야 할 이유는 적었다.(88p)
귀화할 수 없느냐고 진주가 물었다. 그건 니콜라이조차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한 과정이었다. 사회통합프로그램 이수나 필기시험, 면접 따위를 따져 보기 전에 일단 귀화 신청 자격을 갖추려면 영주권을 취득해야 했다. 물론 영주권을 받는 데도 여러 조건이 있었다.
니콜라이는 전년도 한국인 평균 이상을 벌어야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으며, 그건 연봉 삼천팔백만원 정도라고 설명했다. 진주는 마트에서 받는 월급에 열둘을 곱해봤다. 공무원 시험에 붙는다고 해도 금방은 어려운 돈이었다.(125p)
때로는 팬을 자처하는 이들이 더욱 날카롭게 광고 상품의 생산과정과 음악적 동료들의 언행과 신곡 가사의 함의를 따졌다. '개념 연예인'이나 '소셜테이너' 딱지를 달았던 스타들이 오랫동안 사랑받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진정성을 검증하는 눈이 많아지면 행동반경이 좁아진다. 로나는 급기야 잠시 상업광고 출연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조차 돈을 벌 만큼 벌었느냐는 비아냥을 샀다. 우리는 로나가 불필요하게 소모되기보다는 음악에만 집중하길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 위축되었을 뿐, 우리보다 멀리 가고 있었다.
이런 저런 구설 때문에 저에게 흠집이 나더라도 괜찮다는 생각에 닿았어요. 저는 완벽하지 않아요.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결과를 만드는 게 더 중요하죠.(190p)
나는 잘 살고 있을까.
잠들기라는 마지막 과제를 수행하려면 "나는 잘 살고 있다"라고 핵에게 알려주는 편이 좋다. 그러나 그 주문은 너무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다. 내가 연구한바, 구체적 행위나 상태에 대한 간결한 주문일수록 효과가 높다. 나는 통원 치료중인 질병이 없다. 나는 임금 근로자 평균 이상을 번다. 나는 일 년에 삼 주 이상 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 나는 어떤 소송에도 연루되지 않았다. 나는 건조기와 식기세척기와 세 곡 이상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가졌다. 나는 방 세 개에 화장실이 두 개인 자가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 주택의 자산 가치는 상승중이다. 나는 명절이나 경조사가 아니더라도 연락하는 친구가 세 명 이상 있다······ 이런 주문들의 총합이 어떤 임계점에 도달하면 '나는 잘 살고 있다'라는 주문이 유효해질까. 위에서 나열한 주문들은 나에게 대개 사실이 아니지만, 전부 사실이라면 충분한 걸까.(281-282p)
지구 종말 시계가 자정 90초 전을 가리키는 2024년은 '슈퍼 선거의 해'로 불린다. 76개국에서 대선 혹은 총선이 시행되어, 인류의 절반에 가까운 사십억 명이 참여한다. 그중 약 육 퍼센트인 이억삼천만 명만이 미국 대선 투표권을 갖고 있으며 실제로 투표하는 이는 더 적다.(283p)
ㅡ 김기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中,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