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로라 베이츠, <인셀 테러> 中, 위즈덤하우스
2024/2/15
전자책으로 읽어서 페이지는 따로 없다.
인셀의 논리는 절망적인 모순을 보여준다. 여성은 남성과 잠자리를 한다는 이유로 욕을 먹는 동시에 남성과의 잠자리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욕을 먹는다.
여성이 성적 자율성을 누리는 통에 남성의 삶을 사악하고 압제적으로 통제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남성의 고통의 근원에는 여성해방이 있다. 그러므로 확실한 해결책은 여성의 자유와 독립성을 박탈하는 것인데, 특히 이를 위해 (강간과 성노예 같은) 성적인 수단을 활용해야 한다.
한 개인의 폭력 행위가 집단 전체를 반드시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그 커뮤니티 소속이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고 단순히 넘겨짚을 수도 없다. 실제로 위의 사례 대부분에서 정신건강 문제, 유년기의 학대, 순탄치 않은 가족사 등 살인범의 행위에 일정하게 기여했을 수도 있는 다른 여러 요인이 있었다. 하지만 정신건강 문제를 겪거나, 유년기 학대에서 살아남았거나, 가족 붕괴를 경험한 사람들이 모두 대량의 인명을 살상하는 폭력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데도, 어째서 범인들은 유독 남성들뿐인지 이런 요인들로는 설명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한 게시글에서 어떤 이용자는 강간에 대한 처벌이 훨씬 가벼워져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고대 그리스 도시에서는 강간을 오로지 벌금형으로 다스렸을 뿐이라는 말을 갖다 붙인다. 과거 문명은 위대하고 고귀하다는 식의 이런 자동적인 전제는 고대사회의 법칙과 고정관념에 대한 광범위하고 향수 어린 갈망과 맞닿아 있다. 이런 경향은 인셀 커뮤니티와 그를 포괄하는 매노스피어 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날 뿐 아니라 대안우파와 백인민족주의자들과의 추가적인 연결고리기도 하다.
어쨌든 우리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처럼 젊은 개종자들을 유혹해서 왜곡되고 편향된 신념의 이름으로 폭력을 저지르게 만드는 다른 형태의 온라인 급진화의 위협은 재빨리 파악하고 조치를 한다. 인셀이 등한시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표적이 여성이라는 데 있다. 우리는 인터넷은 고사하고 오프라인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폭력을 진지하게 여기는 일이 좀처럼 없고, 장난이니 농담이니 하면서 쉽게 웃어넘긴다. 어떤 무슬림 공격자가 온라인 급진화를 거쳐 길을 가던 백인을 차로 덮치면 언론 보도와 정치 논평가들은 즉각 우리에게 그 관계에 대해 경보를 울리고, ‘테러’라는 단어가 재빨리 신문 1면을 장식하며, 살인범의 이데올로기와 온라인 행적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낱낱이 까발려진다. 남성이 노골적인 여성혐오 때문에 살인을 저지를 때는 이렇지가 않다. 축소 보도된 이런 유의 공격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 사람들조차도 범인이 명백하게 밝힌 의도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인셀 커뮤니티는 조용히 성장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충원하고, 승리에 도취한다.
그리고 인셀들이 섹스에 대해 절망하듯 픽업아티스트들은 섹스를 쉴 새 없이 추구한다. 하지만 이 두 집단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공통점이 있다. 두 집단 모두 남성과 여성을 고정관념에 갇힌 협소한 범주로 구분한다. 두 집단 모두 이성애적 섹스를 남성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성취로 여기고, 여성을 마치 포르노적인 슬롯머신처럼 남성에게 성적인 쾌락을 제공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물건으로 취급한다. 차이가 있다면 인셀은 이 기계를 이미 정해진 사회적으로 우월한 소수의 엘리트에게만 일확천금을 안기는 편협한 존재로 여기고, 다른 남자들은 이 기계에 아무리 동전을 넣어도 보상을 받지 못하거나, 애당초 접근하지 못한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픽업아티스트가 쓰는 용어들은 매노스피어처럼 사이비 과학과 심리학자연 하는 말투를 활용해서, 이 경우에는 여성혐오를 재밌고, 용인 가능하고, 궁극적으로는 바보라도 써먹을 수 있는 섹스용 지침으로 포장한 다음 남자들에게 팔아먹을 수 있는 인상적이고 학술적인 느낌을 풍기는 근거를 만들어낸다. 수천 달러짜리 입문자용 캠프를 제공하는 한 픽업 전문가는 ‘세포 수준의 심오한 정체성 변화에서 절정에 달한’ 집중 연구와 몰두를 통한 자기 변화의 경험을 언급하며 자신의 기술을 홍보한다. 그리고 단 몇천 달러면 당신의 세포 역시 바꿔줄 수 있다고 암시한다.
젊은 신도들에게 교훈은 분명하다. 너는 법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여자들을 대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그리고 옥상에 올라가서 그 사실을 마음껏 외쳐도 된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
‘나는 공공장소 외에서 벌어졌을 경우 여성을 폭력적으로 취하는 것을 법으로 처벌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더 들어가서 강간법은 ‘골목길과 조깅 코스에서 강간 피해자를 임의로 골라잡는 추잡하고 정신 나간 남자들을 위해’ 남겨둬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다른 강간의 경우, 특히 주거지나 사유지 내에서 벌어졌을 경우, 일체의 강간은 완전히 합법화해야 한다.’ 그 후 발리자데는 이 글을 ‘반어적인 사고실험’의 일환으로 작성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매노스피어에서 태동한 생각들이 오프라인에서 대대적인 여파를 갖게 되는 아주 실제적인 방식 중 하나를 보여주었다. ‘추잡하고 정신 나간 남자들’에게만 강간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발상은 강간범이 전혀 모르는 여자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서 음지에 몸을 숨기고 있는,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낯선 인물이라는 사회적 고정관념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고정관념은 이미 힘든 현실을 더욱 악화한다. 젊은 남성들은 이미 강간에 대해 섬세하게 사고하지 못하고, 성적 파트너로부터 적극적인 동의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여성이 마지막 순간 혹은 성적 친밀감을 나누는 동안 마음을 바꿨을 때 남성이 중단하지 않을 경우, 이 역시 강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권리운동은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소수의 여성 집단을 선전용으로 내세움으로써 극단적이고 난폭한 여성혐오라는 이미지에서 탈피하려는 시도도 하고 있다.
개별적이고 감정적이며 종종 대단히 이례적인 사건을 부각하고, 그것이 마치 광범위한 패턴이라는 또는 성 중립적인 상황이라는 듯한 암시를 주기 위해 왜곡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아무리 압도적인 통계적 증거가 그 반대를 가리키고 있더라도 말이다.
이 페이지의 주요 구성원은 허위 강간 고발에 대한 뉴스 보도를 부각하고 여성 우주비행사가 수행하는 미션에 대한 분노(혈세 낭비)나 그와 유사한 이야기를 공유하는 남성들이다.
하지만 수천 건의 유사한 사건 중 하나에 불과한 리케네디의 사례는 이렇게 대대적으로 조직된 작전들이 피해자의 커리어를 중단시키거나 심각하게 저해할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 작가, 예술가, 제작자 등 다양한 분야의 종사자들에게 소셜미디어는 말 그대로 커리어의 생사가 달린 문제일 수 있다. 직장에서 승진하고 두각을 나타내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들에게 그냥 전원을 끄라거나, 온라인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라거나, 어떤 웹사이트 방문을 그만두라고 이야기할 때, 사실상 그 말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트롤링의 부정적인 결과를 감내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르키시안이 자신의 게임 비평 유튜브 시리즈인 ‘비유 대 여성Tropes vs Women’에 새 영상을 출시하자 이미 퀸을 공격 중이던 무리가 이 두 여성을 연결 지어서 같은 ‘위협’의 일부로 보게 되었고, 그래서 트롤들은 사르키시안 역시 괴롭히기 시작했다. 집 주소가 온라인에 유포된 뒤 새로운 살인 및 강간 위협에 시달리던 사르키시안은 퀸이 그랬듯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집에서 나와야 했다. 괴롭힘이 점점 고조되던 2014년 10월, 사르키시안은 유타주립대학교에서 진행하기로 한 강연 때문에 유타로 떠났다. 하지만 사르키시안의 강연을 취소하지 않으면 참석자뿐 아니라 인근 여성센터의 직원과 학생들까지 모두 공격할 거라는 익명의 위협이 대학 측으로 날아들었다. 협박범은 이렇게 덧붙였다.
게이머게이트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면서 오프라인의 괴롭힘과 온라인의 괴롭힘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가해자들은 피해자가 안전을 우려하도록 공포에 떨게 만들겠다는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자유자재로 신상을 털었다. 온라인 폭도들은 신상 털기를 통해 노출된 개인 정보를 오프라인에서 무기로 활용했다. 표적의 집으로 피자를 수천 판씩 주문하고 몰래 사진을 찍고 온라인에 이미지를 유포하는가 하면, 피해자의 집 창문에 벽돌을 집어 던지고, 협박하고 괴롭히는 전화를 수차례 거는 등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게이머게이트에서는 심지어 여러 표적을 상대로 ‘스와팅swatting’이라는 전략이 사용되기도 했다. 이 방법은 긴급 구조대에 가짜 폭탄 협박을 넣어서 특별기동대SWAT가 표적의 집에 출동하게 하는, 표적을 아주 실제적인 신체적 위험에 빠뜨리는 괴롭힘의 한 형태다.
온라인 폭력이 우리의 현실에 피해를 주지 못하는 별개의 영역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무해한 일이라는 생각은 이런 폭력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만 공감할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 말은 이런 문제를 보도하는, 다수가 백인 이성애자 중산층 남성인 언론인들과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플랫폼을 만들고 감시하는 책임을 지닌 기술업계 종사자들, 그리고 온라인 폭력을 규제하는 법을 만드는(또는 만들지 않는) 남성 정치인과 의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문제의 근본적인 부분은 온라인 폭력으로 크게, 끝없이 삶이 피폐해지는 사람들에게는 대체로 그걸 중단시킬 권력이 없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일부 그걸 중단시킬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사실상 이런 공격을 영속시키는 자들과 동일인물이다. 여성 하원의원 중 다수가 대중으로부터 온라인 공격과 언어 폭력을 당했다는 것도 대단히 우려스럽지만, BBC 설문조사 응답자 가운데 거의 2/3가 동료 직원 또는 남성 하원의원에게서 성차별적인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는 사실 역시 똑같이 우려스럽다. 어떻게 이런 남자들이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남자들은 여자들을 해친다. 이건 사실이다. 전염병 수준으로, 공중보건을 위협하는 재앙이며,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일상이다. 전 세계 여성의 1/3 이상이 인생의 한 시기에 물리적·성적 폭력(여기에는 성적 괴롭힘이 포함되지 않는다)을 경험한다. 전 세계에서 매일 137명의 여성이 가족 구성원에게 살해당한다.
언론 보도의 속성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2011년 미국의 한 미디어 연구는 “국제 테러에서는 특히 ‘기독교 미국’에 맞서 무슬림/아랍인/이슬람이 테러조직과 협력한다는 공포가 지배적인 반면, 국내 테러에서는 문제적 개인들이 일회성으로 일으키는 중대치 않은 위협으로 그려지는 식으로 테러 보도에는 주제별 패턴”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이 같은 상황은 자신의 착하고 순진한 아들이 갑자기 튀어나온 허위 강간 고발 때문에 인생을 망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트윗한 미국 여성의 일화에 가장 압축적으로 녹아 있는지 모른다. 이 여성은 결국 아들에게 모든 만남을 영상으로 녹화하고 기술과 소프트웨어에 돈을 들여 온라인 교류를 감시하고 기록하도록 했다. 다른 트위터 이용자도 반응했듯 이는 끔찍하게 많은 수고와 비용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특히 이 어머니가 아들에게 그저 여성을 성폭행하지 말라고 가르치기만 해도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말이다.
2018년 10월 영국의 공영방송 채널4가 탄탄한 국가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상세한 조사를 진행한 결과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평범한 성인 남성이 한 해에 허위 강간 고발을 당할 가능성은 0.0002%인 것으로 확인됐다.[23] 이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이 조사 결과에 대단히 충격받는다. 그들은 실제 수치가 이보다 훨씬 높을 거라고 생각한다. 거짓말쟁이 여성과 마녀사냥이라는 편향된 생각이 얼마나 은밀하게 우리의 집단 무의식에 침투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데 당신이 그 주제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로 이제 막 인터넷에 접속한 젊은 사람이라고 상상해보자. 제공되는 영상들은 모두 고품질이고, 진행자들은 세련되고 유명한 인물들이며, 토크쇼는 인기가 많다. 이 모든 것을 처음 보는 시청자로서는 이게 비주류적이거나 극단적인 발상이 아니라, 널리 알려진 타당한 관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유튜브 알고리즘이 젊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할 만한 구체적인 이유가 있을까? 이런 콘텐츠에 그저 노출되는 것만으로 실제 영향을 받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렇다.
톰은 학교에서 애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자주 들으며, 애들이 ‘종종 위협감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톰 또래의 소년들은 친구들의 압박과 ‘혐오’ 때문에 공개적으로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밝히기가 ‘절대적으로’ 어렵다.
학자들은 이 패턴의 의미를 곧바로 이해했다. 사회학자 제이넵 투펙치Zeynep Tufekci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평범한 영상으로 시작했으나 유튜브 알고리즘이 자신과 연관된, 하지만 더 강도 높은 콘텐츠로 어떻게 자신을 끌고 갔는지 설명했다. ‘채식주의에 대한 영상은 비거니즘 영상으로 이어졌다. 조깅에 대한 영상은 울트라마라톤 영상으로 이어졌다.’[10] 《월스트리트저널》의 한 탐사보도도 이와 똑같은 현상을 폭로했다.[11] 물론 재미난 댄스 동작이나 조리법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무해한 패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주류의 유명 정치 콘텐츠를 이제 막 보기 시작한, 외부의 영향에 취약한 젊은 사람들에게는 훨씬 깊은 함의가 있다. 샬로는 뉴스 웹사이트 《데일리비스트Daily Beast》에 자신은 ‘유튜브의 추천이 사람들을 필터버블23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 빠져나갈 출구는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2018년 샬로는 다양한 매체에 우려를 표하며 한 가지 중요한 대중의 오해를 바로잡았는데, 그것은 알고리즘이 이용자들에게 가장 관련성이 높은, 또는 고품질의 콘텐츠를 제공한다는 착각이다. 샬로의 말에 따르면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대신 알고리즘은 전적으로 ‘시청 시간’에 초점을 맞춘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 시청하게 하고 더 많은 것을 보도록 클릭하게 하는 것은 차츰 강도가 올라가는 극단적인 콘텐츠다.
소년들에게 뉴스의 출처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효과적인 개입 목록의 상단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필요한 큰 변화는 조직이나 정부에서 여러 형태의 테러리즘을 모니터링하고 관련 법안을 만들고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세울 때 남성우월주의와 여성혐오 극단주의를 반드시 포함시키는 것이다(가령 국내 테러법을 도입하거나 개정해서 이런 범죄들이 극단주의적 혐오가 빚어낸 다른 폭력 행위와 똑같이 엄중하게 다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충격적이게도 인셀 관련 살인사건에서 테러로 기소된 건 (캐나다 당국에 의해) 단 한 번이었다. 이런 공격이 테러리즘의 정의에 분명하게 포함될 경우 다른 나라들도 그 전철을 따르게 될 것이다. 두 번째로 필요한 중요한 변화는 끔찍할 정도로 일상화된 테러리즘의 형태들(가정폭력 같은) 역시 진지하게 다루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사회적 집단인 이성애자 백인 남성에게서 비롯된 문제를 규명하는 게 꺼림칙하다는 이유만으로 극단주의적 여성혐오의 존재를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 집단의 주장을 그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주고 이들에게 여성과 소수자를 훨씬 능가하는 개별성과 지위를 부여하는 우리의 풍조가 극단주의자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부터 오랜 시간 보호해왔다.
소년들이 함께 어울리고 사회화할 수 있는 현실의 장소들이 점진적이고 체계적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년들은 그 대신 온라인 세계에 의지한다. 이들이 스스로 의미와 만족감을 찾을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을 만들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청소년기에는 소속감과 자율성, 독립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시기에 젊은 사람들은 강렬한 감정들을 다스리느라 애를 먹는다.
내가 이 장을 쓰는 동안 트위터와 똑같은 용기를 내는 데 수개월이 걸린 페이스북이 결국 야노폴로스와 존스, 그 외 다른 유명 극단주의 인사 5명의 활동을 영구 금지키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매노스피어가 그토록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폐쇄된 커뮤니티와 알고리즘의 지원을 받아 계속 유사한 영상을 추천하는 방식이 본질적으로 완전한 세뇌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반대되는 관점은 절대 공유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반대 의견을 나눠야 한다. 젊은 사람들에게 다른 생각, 다른 의견도 있다는 걸 전하자. 매노스피어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고 질문을 던지자. 젊은 사람들이 ‘증거’라며 접했을 그릇된 사실과 조잡한 과학의 한계를 뒤흔들자. 젊은 사람들에게 신뢰할 만한 정보를 가능한 한 많이 제시하고 이들이 스스로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이들을 소외시키거나 무시하지 않고 이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ㅡ 로라 베이츠, <인셀 테러> 中, 위즈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