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그 외

ㅡ 존 제러마이아 설리번, <펄프헤드> 中, 알마

mediokrity 2024. 6. 7. 13:50

2024/6/7
 
'이 반석 위에서'가 압도적으로 잘 썼고, '정말 리얼한 것의 차원으로'에서의 리얼리티에 대한 통찰있는 분석도 좋았다. 내가 살면서 절대 경험하지 않았거나 못할 것에 대해 취재를 기반으로 독자를 대리 경험의 장으로 초대하는 에세이라면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이하 DFW)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둘 다 읽은 입장에서 비교하자면 DFW가 쓰는 글이 상대적으로 더 집요하고 집착적이며 읽는 사람들을 질리게 만들지만 그만큼 읽고 난 후의 충만감이 크다면 존 제러마이아 설리번의 글은 덜 집요해서 쉽게 읽히고 유머러스하다. 다만 에세이마다 편차가 큰 것 같다. 관심도 때문일까?
 
 
 
크리스천록의 순조로운 성공은 이런 맥락에서 이뤄진다. 만약 그들의 음악이 완전히 엉망이라고 생각하다면, 그건 당신이 우선시하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무언가 멋지고 새로운 걸 듣고 싶어하지만,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찬양하는 한편 그들의 청중이 좋아한다는 사실이 이미 확인된 곡들을 연주한다··· 그것이 크리스천록이다. 반면에 크리스천 밴드는 그냥 보통 밴드인데 구 구성원 가운데 한 명 이상의 크리스천이 있는 경우다. U2가 그 전형이라 할 수 있겠다.
(...)
아주 잠깐 시건방진 소리를 하자면, 바로 이 지점에서 그들의 음악이 얼마나 좋은가 하는 간단치 않은 문제가 개입한다. 이 질문을 제기해야 하는 건, (데이미언 주라도 같은 이처럼) 끝내주는 노래를 쓸 능력이 있는 어떤 열성 크리스천이 이제 막 열아홉살이 됐는데 크리스천록과 관련된 뭐라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재능은 표면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일정한 수준의 섬세함과 예민함과 더불어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 크리스천록 시장을 주도하는 이들은 U2나 스위치풋 같은 밴드들이 노골적으로 '예수-사랑'의 메시지를 내세우는 이들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조용히 노력하는 것에 일종의 유보적인 승인을 해주는 태도를 취해왔다. 현실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 위해서는 이런 노골적인 메시지를 피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크리스천록은 하나의 음악적 장르ㅡ정말로 그렇게 보인다ㅡ라고 말할 수 있는데, 뛰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한 장르는 내가 알기로는 이것 하나 뿐이다.(36-37p)
 
 
가장 말을 아껴서 표현한다고 해도, 그들은 매력적이었다. 나는 질문을, 그것도 수도 없이 많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걸 즐겼다. 대답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복음주의가 작동하는 방식 중 하나다. 평균적인 불가지론자들은, 이를테면, 성서를 구성하는 텍스트들 사이에서 보이는 불일치의 문제들에 대해 명쾌하고 심사숙고된 변론을 내놓을 수 있도록 잘 훈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거듭난 크리스천들은 그런 문제들에 대해 의문을 품은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에 대비해 훈련을 받는다. 당신이 이제 막 열네 살이 됐고 지적인 야심은 있지만 적절한 영양 공급은 안 되고 있는 상태인데, 카리스마 넘치는 어른이 당신을 앉혀놓고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자, 달력의 한 해 중 이 기간을 유태인 달력으로 전환시켜놓고 그걸 7배수한 뒤 그걸 아무개 왕 치세의 어느 날짜에 연결시키면, 성서의 이 구절이 예수의 탄생을 거의 시간까지 예측하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단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이런 정보에 대해 알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혹했다.(50p)
 
 
기독교에 관한 모든 것은 기독교 신앙이라는 맥락 안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그 조건들을 수용한다면 말이다. 일단 그러고 나면, 당신은 신앙의 이름으로 데이터를 수정하기 시작하고(그것들이 스스로를 논리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 수정된 데이터들은 다시 신앙을 강화한다. 이 과정에서 명백하게 비논리적인 순간을 따로 분리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어쩌면 그런 순간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건 확대경을 들고 팔을 쭉 폈다 눈 가까이로 가지고 올 때 일어나는 현상과 다르지 않다. 멀리 들고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뒤집혀 있고, 가까이 가져오는 동안에도 계속 뒤집혀 있다 어느 순간 바로 서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의 중간에 무엇이 개입하고 있을까? 무언가가 있었다면, 관찰하기 어려울 정도로 빨리 지나가버렸다. 이것이 신앙에 속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진정한 크리스천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건, 격언에도 있지만, 그들이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ㅡ많은 경우들이 존재한다ㅡ신앙이란 것은 당신의 뒤에서 잠기는 논리적인 문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생각의 끈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을 휘어지면서 원을 그리고 있고, 그 원은 당신을 안에 가둔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배교자는 진정한 크리스천이었던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나는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나는 이 두 가지 진술 모두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내 옛 친구들에 대해 쓰면서 어쩔 수 없이 미안해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걸 보면 사실은 내가 그들의 일원이었던 적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게 아닐까?(54-55p)
 
 
어떤 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안다는 것과, 만약 그것이 진실이었을 때 그걸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이 견고하다는 건 다른 이야기다.(72p)
 
 
라이틀은 남북전쟁에 이토록 가까이, 어린 아이였을 때 잠에 빠져들면서 그 핀을 만지작거릴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시대에서 한 세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18세기였다. 그렇게 한 시대가 다른 시대로 이어져 있었다. 한 사람이 아흔이 넘도록 살다보면 이런 식으로 시간이 겹치는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라이틀이 태어났을 때, 라이트 형제는 아직 제대로 된 비행기 디자인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가 죽었을 때는 보이저 2호가 태양계를 벗어나고 있었다. 살아 있을 동안 이런 구체적인 일들이 공존하는 걸 목격할 때 우리는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것은 그에게 무거운 문제였다.(117p)
 
 
나는 여러분이 이 쇼와 그걸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고 어디까지 인정할 준비가 돼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일단 이게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설명한느 시늉이라도 해보겠다. <리얼 월드>의 한 시즌이 끝나면, 그 시즌 동안 인기를 끌었던 멤버들(이 인기는 신체적인 매력, 모든 미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특성, 그리고/또는 흔히 볼 수 없는 이상한 짓들을 통해 얻어진다)은 그 시리즈의 빛나는 표면 바로 밑에 존재하는 그림자의 세계 속으로 초대된다. 이 세계에만 있는 수많은 구역들과 그에 걸맞은 할 일이 있다. 클럽에 나타나고, 봄방학(이건 바와 클럽이 여러 개 있는 바닷가 리조트에서 며칠 동안 질펀하게 노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클럽을 확대해놓은 것이다)을 즐기고 "강연"(대학이나 청년 단체, 금연 단체 등 어디가 됐든ㅡ특히 쇼를 통해 어떤 특성, 이를테면 동성애자라거나 알코올의존증, 식욕이상항진증, 유방 확대 수술 뒤의 불만족, 분노 조절 장애, 빈곤, 큰 배만 보면 기절하는 증세,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인종차별주의 등을 드러냈을 경우, 그에 관련된 주제를 다루는 그룹에 초대받는 데 유리하다)을 다닌다. 그리고 '제품 소개'도 있다. 마지막으로, 이게 가장 중요한 건데, <리얼 월드/로드 룰스 챌린지> 쇼에서 가장 눈에 잘 띄고 질투를 받을 정도로 보호받는 위치를 차지하는 일이 그것이다.(147-148p)
 
 
사람들이 리얼리티 TV가 사실 리얼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길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다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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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는 일종의 재해석이 시도되었는데, 어쩌면 거기에 리얼한 무언가가 있다는 식의 태도였다. "그게 왜 그런 거냐면, 우리도 그렇게 자아도취적인 데가 있잖아요." "우리가 어떤 현상을 바라볼 수 있는 창문을 제공해주죠···" 이런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내가 만들어낸 이 모든 가상 인물들의 주장에는 리얼리티 TV의 가장 흥미로운 한 가지 특성이 빠져 있다. 그것은 리얼리티쇼가 적정화된 리얼리티를 성공적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92년에 <리얼 월드>가 처음 시작되고, 이 쇼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일종의 패턴은 그 후로 등장한 모든 리얼리티쇼들이 따르는 본보기가 되었는데, 그때만 해도 이 쇼가 보여주는 게임들은 조악하고 뻔한 것이었따. 인물들은 "카메라를 의식"하기도 했고, 혹은 순간적으로 "카메라의 존재를 망각"하기도 했다. 이 두 요소는 물빛이 달라지듯 뒤섞이곤 했다. 이때만 해도 리얼리티쇼라는 형식이 인스타그램의 순위 평가와 초저예산의 제작비만 들여도 만들 수 있다는 이유로 텔레비전이라는 지평에서 난마같이 뒤얽히기 전이었고, 누가 됐든 가족이나 사돈, 옛날 여자친구 중 최소한 한 명은 그런 쇼에 나온 사람이 있는 시대가 오기 전이었다. 또한 리얼리티쇼에 출연하는 것이 첫 아파트를 사거나 첫 종아리 확대 시술을 받는 것 같은 통과의례가 되기 전이었다.
(...)
이제 이런 쇼에 출연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어릴 때부터 이런 쇼를 보면서 즐기던 이들, 이런 쇼들을 통해 의식이라는 것이 형성된 이들(특히 젊은 세대 가운데) 중에서 나오는 지점에 도달했다. 저 아래 어디에선가 스위치가 켜졌다. 이제 리얼리티쇼를 볼 때 우리가 보는 건 대충 짜놓은 시나리오 속으로 거칠게 내던져진 뒤 카메라 앞에 대책 없이 노출된 사람들이 아니라, 리얼리티쇼에 출연하는 연기를 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된 사람들이다. 이것이 요즘 방영되는 모든 리얼리티쇼의 플롯이다. 그들이 지어낸 주제가 뭐가 됐든 말이다.
이 모든 거짓을 공모하는 게 자신들이 연루되어 있다는 인식이 높아지면서 더 큰 자아를 향해 스스로를 전환시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리얼리티쇼는 더욱 리얼해졌다. 왜냐하면, 당연하게도, 리얼리티쇼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정체성은 정확히 바로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여기에 이런 요소를 더해보자. 만약에 내 일이라는 게 리얼리티쇼에 출연하는 것이라면, 그 안에서 카메라에 담기고, 그래서 당신이 날 지켜보게 하고, 이 과정에서 스스로가 투사되는 모습을 자의적으로 조절하고, 불확정성이 반복된다면? 그게 만약 나의 리얼리티라면? 당신의 얼굴은 아직 녹지 않고 있는가?
여기가 바로 우리가, 그런 인간들로, 서 있는 지점이다.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다. 또 다른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ㅡ불과 지난 몇 년 사이에ㅡ그건 리얼리티 TV라는 게 나온 이후로 계속해서 보완되어온 시스템이 스스로를 급격하게 강화시킨 것과 관련 있다. 왜냐하면 제작진이 이런 쇼들에 새로 충원할 만한 그룹에 속한 이들은 이미 리얼리티쇼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는 데다, 이런 쇼에 등장하는 순간 온갖 수모를 당하고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이미지가 망가질 거라는 걸 뻔히 알고 있고, 따라서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원래 이미지를 잃지 않기 위해 잔뜩 경직된 채 "성스러운" 인간처럼 연기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지원자들을 조심스럽게 사전에 걸러내야 하는 프로듀서와 캐스팅 디렉터들로서는 "즉발적인" 개인들, 미즈가 만족스러운 듯 말한 바에 따르자면 "어쩔 수 없이 늘 자기 자신이어야만 하는" 이들을 찾아내기 위해 끝도 없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
그래서 이제는ㅡ요즘 텔레비전을 본 적이 있는가? 가능한 인력 풀을 모두 긁어모아 몽땅 스튜디오에 옮겨놓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리얼해졌다. 누구도 더 이상 연기를 하지 않는다. 내 말은, 당연히, 다들 연기를 하지만, 연기를 하지 않는 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54-158p)
 
 
나는 이 지역 출신ㅡ그녀처럼ㅡ이면서 이 지역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다 외부인들을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존재로 여길 정도로 소극적으로 변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 외부인이란, 더비데이나 되어야 켄터키주가 존재하는 걸 알거나 이런 놀라울 정도로 끔찍한 일이 일어나면 지역 사람들 모두를 (바로 인근의 맨체스터에서 그랬듯이) "정부 직원을 죽인 미치광이 촌놈들"로 여기는 존재인 것이다. 서장은 이 나라 사람들이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일을 잘 처리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이 두 가지의 결합이 사람을 짜증나게 만들었다.(271p)
 
 
그 글들에 등장하는 학계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전 지구적인 동물행동의 진화처럼 보이는 이 일련의 흐름들이 사실은 미디어가 이런 일들에 대해 좀 더 주목한 결과라고 주장하거나, 일련의 우연한 사례들이 인터넷에서 돌면서 한데 엮인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가장 너그러운 입장을 취한 이들의 경우에는, 인간의 생활영역이 더 넓어지고 동물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영역 밖으로 나오게 되었고, 그 결과 인간 개인이 야생의 동물들에게 노출되는 경우가 잦아진 것이라고 말했다.(480p)
 
 
지금은 이 집에 페이턴이 살고 있었고, 제작진은 그녀가 사용하는 것들을 들여와야 했다. 그레그는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우선, 촬영할 때마다 매번 우리 가구를 가져와서 원래 가구들과 교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ㅡ선생님 가족의 가구를 내어가고 우리 걸 가지고 들어오고, 촬영 후 그걸 내어가고 선생님 가족의 물건들을 다시 가지고 들어오는 식으로요. 매번 촬영 전에 내가는 것부터 끝나고 들여오는 것까지 우리가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면 우리가 가지고 온 것들을 그냥 그 자리에 두고, 선생님 가족이 선생님 가족 소유의 가구인 것처럼 사용하는 방법도 있고요. 시리즈가 완전히 끝났을 때까지 두었다가 가지고 나갈 겁니다. 선생님이 새로 이사 온 집을 저희가 장식해드리는 거죠. 어떤 것들은 선생님께 그대로 그대로 드릴 수도 있을 겁니다.
이론적으로는 별문제가 없었다. 다만 실제로는(이 말을 쓸 때마다 웃음이 나오는데), 우리 가족이 TV 세트에서 산다는 걸 뜻했다.(530p)
 
 
 
ㅡ 존 제러마이아 설리번, <펄프헤드> 中, 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