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데이비드 무어,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中, 아몬드
2024/6/25
어쩌다보니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와 병렬 독서가 되었다. 후성유전학은 여전히 알쏭달쏭한ㅡ 생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더 그렇게 느끼는 듯ㅡ 학문이지만 조금은 이해했다. 이 책의 원서가 나온 지 10년이 지났으니 확발히 연구되는 이 분야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찾아 봐야겠다.
과학자가 아닌 일반인 중에는 우리의 눈동자 색깔을 결정하는 유전자, 특정 질병을 유발하는 유전자, 지능이 뛰어나도록 또는 음악적 재능이 있거나 유머 감각이 있게 하는 유전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유전자는 이 모든 것의 절반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가 로어노크 식민지의 운명을 주민들 탓으로만, 혹은 그들이 겪은 가뭄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눈동자가 갈색인 사람이 있고 파란색인 사람도 있는 이유 역시 유전적 요인만 살펴서는 이해할 수 없다(학교 생물 시간에는 그렇다고 배웠을지 모르지만). 사실 얼굴 모양 같은 신체적 형질과 성격 같은 심리적 특징 등 사람의 특징은 생물학적 분자들과 그 사람이 처한 맥락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결과다. 전에도 이 주제에 관한 글을 읽어본 사람에게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겠지만, 이 분야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본성 대 양육 논쟁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과학자들이 인간의 특징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항상 유전적 요인과 상황적 요인이 모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전작에서도 설명했듯이, 두 요인 중 더 중요한 요인은 없다고 보는 것이 유용한 관점이다.(15-16p)
특히 행동 후성유전학이라는 분야의 최근 연구는 우리의 분자 수준의 생물학적 상태가 어떻게 심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우리의 심리 상태는 어떻게 분자 수준의 생물학적 상태에 영향을 미치는지 밝혀내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영향의 양방향 고속도로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19-20p)
BRCA1 유전자라는 DNA가 유방암을 유발하지 않는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는데, 그건 바로 어떤 DNA도 단독으로는 그 어떤 질병도 유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DNA는 우리의 그 어떤 특징도 단독으로 만들어낼 수 없다! 이 말이 놀랍게 들릴 수도 있겠다. 사람들은 대부분 DNA 속 유전자들이 우리의 일부 표현형(우리의 특징이나 성격을 일컬어 생물학자들이 사용하는 단어다)을 만들어낸다고 분명히 배웠으니 말이다. 표현형은 신체적인 것일 수도 있고 심리적인 것일 수도 있으며, 눈동자 색과 머리 크기부터 음악적 재능, 주의력 지속 시간, 술에 잘 취하는 성향 그리고 그 사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 하지만 유전자가 표현형을 결정하지 않는데도, 세상에 나와 있는 다수의 생물학 교과서는 여전히 유전자가 표현형을 결정하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고, 그렇게 일종의 유전자 결정론을 유포하고 있다. 눈동자 색은 특히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다수의 생물학 교과서가 학생들에게 눈동자 색이라는 표현형이 유전적으로 단순한 방식으로 결정된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런 종류의 말과 글이 존재한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어쨌든 DNA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형질(뼈든 뇌든 눈이든 그 무엇의 특징이든)은 우리가 한 개체로서 발다랗고 생을 살아가는 동안 유전적 요인과 비유전적 요인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의해 만들어진다. 유전자들, 즉 DNA의 분절된 단위들은 항상 맥락의 영향을 받으며, 어떤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최종적으로 그것이 나타내는 표현형 사이에 절대적인 인과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현재 어떤 존재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다. 형질이 만들어지기까지는 비유전적 요인들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것이 마주한 맥락의 결과이다. 의사가 우리 유전자의 구성 방식을 살펴보고 특정 질병이 발생할지 아닐지 확률 이상을 알려줄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맥락 속에서 살아가는지가 삶에서 어떤 결과가 생길지에 언제나 일부 역할을 담당하므로, 유전자만으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단언할 수 없다.(28-29p)
이 책 대부분에서 나는 오늘날의 생물학자들이 쓰는 정의를 따을 것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후성유전이란 다양한 맥락 또는 상황에 따라 유전 물질이 활성화되거나 비활성화되는, 즉 발현되는 방식을 일컫는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DNA는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전등 스위치처럼 작동한다고 말이다. 아니, 조명을 약간만 밝히거나 적당한 밝기로 맞추거나 눈이 보실 정도로 밝게도 조절할 수 있는 조광기처럼 작동한다고 보는 게 더 낫겠다. 어떤 DNA 분절이 얼마나 활성화되는가는 그 분절의 후성유전적 상태에 달려 있고, 그 상태는 그 분절이 처한 맥락 등의 요인에 달려 있다.
(...)
전통적 관점에서는 우리가 어떤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 관점에 따르면 당신의 눈이 파란 것은 파란 눈과 관련된 유전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방암과 관련된 유전자를 갖고 있다면 유방암이 발병할 위험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러나 후성유전의 정의에 따라 생각해보면, 이런 일들을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 유전자의 활동 정도가 다양한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DNA가 무엇을 하는지다. 유전자의 스위치가 '꺼질'수 있다면 그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후성유전학의 관점에서 볼 때 특정 유전자를 가진 것은 열쇠 하나를 가진 것과 비슷한 일이며, 딱 맞는 열쇠 구멍이 없다면 그 열쇠는 있어도 무용지물이라는 말이다.(33-34p)
일반적으로 어떤 개인의 유전체, 즉 그 사람의 세포 속에 들어 있는 유전 물질의 총합은 평생 변함없이 유지된다고 여겨진다.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를 제외하면 우리가 수정될 때 받은 DNA 염기서열 정보는 죽을 때 몸속에 있는 정보와 똑같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종의 유전체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진화 과정 때문이며, 진화에 의한 변화는 한 개체군의 유전체 안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일어나므로 이런 종류의 변화는 한 개인이 살아가는 동안 일어나는 유전체의 변화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 때문에 전통적으로 생물학자들은 발달이란 유전체가 아닌 유기체의 특성이라고 여겼다. 사람은 유아에서 성인으로 성장하지만 그들의 유전체는 성장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일단 DNA의 일부가 시기에 따라 다르게 행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우리의 유전체가 아주 중요한 방식으로 역동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유전체가 기능하는 방식의 차이가 DNA의 화학적 구조 변화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다. 즉 사람의 유전체가 살아가는 동안 확실히 변화한다는 점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됐다.(35p)
지난 60년 동안 생물학에서 진행된 거의 모든 연구의 밑바탕을 이루는 신다윈주의 종합설은 우리가 살면서 획득하는 형질, 즉 경험의 결과로 얻게 되는 형질은 절대 유전될 수 없다는 주장을 견지한다. 하지만 후성유전의 대물림 현상이 발견되면서 그 주장이 사실과 어긋난다는 것이 밝혀졌고, 따라서 생물학의 기본 견해 일부를 재고할 수밖에 없다.(39p)
하지만 만약 모든 세포가 똑같은 '설명서들'을 가지고 있다면 어째서 그에 따라 만들어진 우리의 머리는 우리의 발과 똑같아 보이지 않는 것일까?
(...)
오늘날 우리는 드리슈가 발견한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후성유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선구적인 연구 이후, 우리는 아주 어린 배아의 세포들이 '다능성'세포임을 알고 있다. 즉, 이 배아세포들 각각은 간세포, 피부세포, 뇌세포 등 몸을 구성하는 서로 무척이나 다양한 세포 중 어떤 세포로도 발달할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머리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자원과 꼬리(그리고 신체의 다른 모든 부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자원 모두가 어린 배아를 이루는 모든 세포 각각에 분명히 존재하며, 이 세포들을 일컬어 이른바 배아줄기세포라고 한다. 이 세포들이 다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세포 속에서 서로 다른 DNA 분절들이 활성화되거나 비활성화됨으로써 그 각각의 세포가 결국 서로 다른 종류의 세포로 발달하게 하는 후성유전 과정이, 생물 발생의 핵심임을 의미한다.
(...)
드리슈의 연구에서 나온 중요한 통찰 하나를 꼽자면, 세포의 발달은 그것이 처한 맥락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완전히 똑같은 세포라도 다른 상황에 두면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발달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느 줄기세포 하나를 그냥 두면 그것이 독립적인 한 사람으로 발달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세포를 다른 세포에 붙여 두면 예컨대 우리 뇌속에서 정보를 처리하는 세포인 뉴런으로 발달할 수도 있다. 태아가 자궁 속에서 발생 과정을 거치는 동안 우리의 뇌와 심장(각자 고유한 뇌세포와 심장세포들을 지녔다)은 바로 이런 식으로, 원래는 정확히 똑같았던 줄기세포로부터 분화된다.(42-43p)
2005년, 마드리드 소재 스페인 국립암센터는(전 세계의 공동연구자들과 함께) 일란성 쌍둥이 40쌍의 후성유전적 상태에 관한 중요한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연구자들은 이 쌍둥이들의 유전체 전체에서 일어난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를 모두 검토하여 젊은 일란성 쌍둥이들이 서로 극히 유사한 후성유전적 표지 패턴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쌍둥들이 나이 들면서 각자 삶에서 서로 다른 경험이 쌓일수록 그들의 후성유전적 상태도 달라졌으며, "나이가 더 많고, 서로 다른 생활방식을 영위하며,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든" 쌍둥이에게서는 유전체 전체에 나타난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에서 현저한 차이의 증거가 보였다. 이 연구에 담긴 의미는 살면서 겪은 경험들이 DNA에 '표시'를 남기며 이 표시들이 우리의 유전체가 발현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113-114p)
이런 상황, 그러니까 A 먹이를 먹으면 일벌이 되고 B 먹이를 먹으면 여왕벌이 되는 상황에 직면하면, 먹이 하나만으로 일벌에게 꽃가루 바구니와 벌침이 발달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결국 모든 벌은 유전적으로 동일하고 벌들의 환경에서 유일한 차이는먹이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A 먹이가 단독으로 꽃가루 바구니를 발달시킨다는 말이 사실일 가능성은 없다. 만약 내가 갑자기 암꿀벌 애벌레를 일벌로 키운 먹이를 먹기 시작한다고 해도 내 다리에 꽃가루 바구니가 발달할 리는 없으니 말이다! 꽃가루 바구니가 생기는 것은 먹이와 꿀벌의 유전체 사이의 상호작용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왕벌과 일벌의 차이는 먹이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먹이 자체가 단독으로 벌들의 행동이나 표현형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여기서 이 점을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차이를 만드는 것이 이 예시의 먹이처럼 환경 요인일 때 어떤 특징을 초래한다는 것과 특징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이라는 것이 서로 다른 일임을 머릿속에 새겨두기가 더 쉬울 듯해서다. 상황이 반대여서 차이를 만드는 것이 유전자라면, 우리는 이 상황의 차이를 놓치고서 유전자만이 원인을 제공할 능력을 지녔다고 가정하기 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유전학자가 X라는 질병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존재하지만 그 병이 없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유전자 하나를 발견했다고 상상해보자. 이 경우, 많은 사람이 단독으로 그 병을 초래하는 유전자가 발견되었다고 결론지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새롭게 발견된 이 유전자가 그 병의 표현형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이 유전자가 환경 요인과 무관하게 그 표현형을 초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섭식이 단독으로 한 표현형의 발달을 초래할 수 없듯이 유전자 역시 그럴 수 없다. 정말 복잡하지만, 유전 요인도 환경 요인도 독립적으로 표현형을 초래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118-119p)
또 후성유전적 변형이 어떻게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 자손 세대로 대물림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까지 아직 엄청난 양의 연구가 더 필요하다.
(...)
행동 후성유전학을 접할 때 이전에는 본 적 없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당연히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유전자 결정론을 거부하는 문제에서는 주의할 필요가 없다. 유전자 결정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수십 년 동안 명백한 사실로 밝혀졌기 때문이다.(128-129p)
발달기에 겪는 끔찍한 경험이 특정한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생각은 우리 대부분에게 상식으로 여겨진다. 그렇다고 방임과 학대가 반드시 그리고 항상 심리적 상처를 영구적으로 남긴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는 정말 나쁜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건강한 성인으로 자란 이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에 관한 경험적 증거는 많다. 심리학자들은 예상 밖의 회복탄력성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이런 연구는 어떤 조건에서는, 발달 초기에 위험 요인들이 존재했음에도 건강한 결과를 성취한 사람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하지만 '위험 요인'이 허투루 만들어진 단어는 아니다. 위험 요인에 노출된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성인기에 잘 살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일례로 생애 초기에 학대나 방임을 당한 아이는 나중에 불안증이나 우울증 같은 정신장애를 겪을 가능성이 더 크다.(150p)
생애 초기의 경험이 특정한 발달상의 결과와 관련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도 가치 있지만, 그 경험이 어떻게 그 결과를 만들어내는지를 밝혀내는 일은 더 중요하다.
(...)
생애 초기에 경험한 상황이나 사건은 어떻게 수년 후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일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방식을 우리가 이해하게 해줄,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어떤 메커니즘이 있을까? 다시 말해, 어려서 한 경험이 실제로 몸속에 새겨지도록 우리 내부에 물리적 변화를 초래하는 어떤 방식이 존재할까?
내가 이런 질문들이 정말로 결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예컨대 아동기의 방임이 성인기의 불안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모들에게 자녀를 방임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만약 방임이 어떻게 불안으로 이어지는지 않다면 그 외에도 의지할 수단들이 많을 것이다. 발달상 결과의 기계적 원인을 추적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은 추상적으로 생각해보면 더 명확하다. N(방임)이라는 조건이 A(불안)라는 달갑지 않은 결과와 연관된다는 것을 안다면, 할 수 있는 일은 N에 영향을 주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N이 D를 초래하고, D는 W를 초래하며, W는 P를 초래하고, 이것이 A라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면, 앞선 네 단계 중 어느 단계에 개입하더라도 그 좋지 않은 결과를 피할 가능성이 생긴다.
이런 식의 연쇄적 인과, 그러니까 한 사건이 다음 사건을 초래하며 아주 긴 연쇄를 이루는 일은 생물계에서 너무나 흔하기 때문에 생물학자들에게는 이를 가리키는 단어가 따로 있을 정도이다. 바로 '캐스케이드'다. 우리의 생물학적 형질과 심리적 형질은 사건들의 캐스케이드에 의해 초래되기 때문에, 미국의 발달 과학자 린다 스미스는 발달이 "미리 정해진 결과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 각 전 단계의 변화에 따라 뒤이은 각 변화가 좌우되는, 다단계의 연쇄적 원인들이 이어진 역사의 산물로 결정될"수 있다고 썼다. 경험이 어떻게 발달상 결과에 요인으로 작용하는지 알아내는 것이 대단히 가치 있는 일인 이유는, 대개 그런 종류의 발견은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여러 방법을 밝혀주기 때문이다.(151-153p)
구체적으로 말하면, 태어난 후 낮은 수준의 LG(핥기와 털 다듬기)를 경험한 쥐들은 뇌의 특정 영역에 있는 세포들의 유전체 영역에 메틸화가 더 많이 일어났다. 그 결과 이 쥐들의 뇌 속에서는 특정 종류의 단백질이 더 적게 생산된다. 이 단백질은 스트레스 상황에 반응하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글루코코르티코이드 수용체 단백질, 줄여서 GR 단백질이라고 부르며, 낮은 LG 경험에서 영향을 받는 세포는 바로 해마 영역에 있는 세포들이다.
(...)
그러므로 LG 행동을 적게 하는 어미들이 키운 새끼 쥐들은 성체가 되었을 때 GR 단백질을 더 적게 생산하게 되며, 이는 해마 세포들 속 GR 유전자가 후성유전적으로 침묵화되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효과가 양어미 쥐들에게서 생물학적 어미와 다른 방식으로 양육 받은 새끼 쥐들에게서도 명백히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메틸화 효과를 초래한 것은 어미 쥐가 핥아주고 털을 다듬어주는 행동 자체였으며, 그 효과는 성장한 후의 행동까지 변화시켰다.(158-159p)
LG 수준이 높은 어미 쥐의 새끼가 성장하면 이들의 해마 세포에 GR이 더 많이 만들어져 글루코코르티코이드 되먹임 민감성을 더욱 높이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식으로 초기 경험은 쥐들이 자기 몸속에 존재하는 코르티솔에 더 민감하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위협이 제거되면 곧바로 스트레스 반응을 더 효과적으로 가라앉힐 수 있게 한다. 우리는 핥기와 털 고르기가 이런 효과를 만드는 방법이 해마 속 GR 생산에 변화를 주는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LG를 많이 받은 쥐들과 적게 받은 쥐들이 성장한 뒤, 실험을 통해 그들의 GR 수준 차이를 없앴을 때 스트레스 반응에 나타나던 차이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
새끼 시절에 핥기와 털 고르기를 많이 받지 못한 쥐들은 해마에 GR이 더 적은 어른 쥐로 자라는데, 이는 후성유전적 변형(DNA 메틸화) 때문에 GR 생산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촉진유전자 부위가 접근 불가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해마에 GR이 적은 쥐는 스트레스를 겪을 때 혈류 속 코르티솔에 반응하는 능력이 떨어져 있고, 따라서 시상하부가 계속해서 CRH를 쏟아내는 바람에 스트레스 상황에서 회복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
모두 종합해볼 때 연구팀이 발견한 후성유전적 효과는, 새끼 쥐 시기의 핥기와 털 고르기 경험이 DNA 메틸화에 영향을 주고, 이것이 다시 장기적으로 염색질 구조를 변화시켜 쥐의 DNA의 GR 생산 능력에 영향을 주며, 그럼으로써 성장한 쥐의 스트레스 반응성을 형성한다는 결론을 뒷받침한다.(169-172p)
여기서 짚고 넘어갈 중요한 점은, 미니의 쥐 연구와 임신한 생쥐 연구에서는 메틸화 증가가 스트레스 증가와 연관되지만, 슈펭글러팀의 연구에서는 메틸화 감소가 스트레스 증가와 연관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앞 연구들에서 메틸화된 DNA는 GR 유전자와 연관된 반면, 뒤 연구의 메틸화된 DNA는 AVP 유전자와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시스템에 AVP가 더해지면 부신에서 코르티솔의 생산과 분비를 증가시키지만, GR이 더 많아지면 부신에서 코르티솔의 생산과 분비를 감소시킨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러니까 이 이야기에는 일관성이 있지만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 하나는 메틸화를 단순명료하게 평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메틸화(와 그에 수반하는 유전자 발현 변화) 자체는 본질적으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모든 것은 메틸화의 영향을 받는 DNA 분절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다. 물론 이 교훈은 매우 광범위하게 작용할 수 있다. 코르티솔 역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위협에 직면했을 때는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지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때도 몸속에 높은 농도로 남아 있으면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174p)
이 장에서 논한 설치류 연구는, 경험의 영향이 꼭 실시간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새로운 증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오히려 삶의 어느 시점에 한 경험이 이후 다른 시점에서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이는 어떤 후성유전적 변화들이 사실상 이전 경험을 간직한 기록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경험은 우리 몸속으로 들어올 수 있을 뿐 아니라,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 안에 새겨질 수도 있다.(176p)
외로움이나 가난, 억압 같은 스트레스 요인들이 유전자의 활동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존재할까?
이 질문에 확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관련 데이터는 쌓이기 시작했다. 한 연구에서는 만성적으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백혈구 세포가 사회적으로 잘 융합되어 살아간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백혈구 세포와 유전자 발현 패턴이 서로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이 연구자들은 DNA 메틸화나 히스톤 변형에 나타난 차이를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변화된 유전자 발현 패턴이 면역계 세포의 GR 활동 감소에 기인한 것임을 추적해 알아냈다. 따라서 외로움이 후성유전적 활동을 촉발함으로써 생물학적 효과를 일으킬 가능성은 상당히 크다.(196-197p)
이제는 고전이 된 한 논문에서 스티븐 제이 굴드와 엘리자베스 브르바는 굴절적응을 현재는 적응에 유리한 특징이지만 "자연선택이 현재의 역할을 위해 만든 것은 아닌" 특징이라고 정의했다. 그들이 제일 먼저 제시한 예는 깃털이다. 오늘날의 새들에게 날개는 날 수 있게 해주므로 적응에 유리하다. 하지만 깃털은 날지 않는 일부 공룡들에게도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론가들은 깃털이 원래는 비행이 아닌 다른 용도를 위해, 아마도 공룡의 체온 조절을 돕기 위해 진화했으리라고 주장했다. 깃털은 다른 이유로 나타났지만 이후에는 비행을 위한 용도로도 사용될 수 있으니 굴절적응의 전형적인 예가 되었고, 자연선택이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화한 특징을 전혀 다른 문제에 직면했을 때도 재사용하는 방식의 실례를 보여주었다.(211p)
내가 보기에 특정 생물학적 영향이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우리가 한 시스템의 작동 방식에 관해 더 많이 알아가다 보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다른 영향력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 꽤 흔하기 때문이다. 성숙한 세포는 '영구히' 분화된 것이기 때문에 포유동물의 복제는 불가능하다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던 생물학자가 느꼈을 창피함을 상상해보라.
(...)
그뿐 아니라 유전적 요인들을 복잡한 표현형의 유일한 원인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태아기의 영양부족 같은 한 가지 경험을 복잡한 표현형의 유일한 원인으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
(...)
그들은 태아기 영양 같은 환경 요인이 심장병이나 당뇨병 같은 질병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이후의 비만 유발성 환경에서 질병 위험성에 영향을 줄 뿐"이라고 썼다. 여기서 '비만 유발성' 환경이란 말은 현재 서구 사람들 다수가 처해 있는 쿠키와 프렌치프라이가 가득한 환경을 말한다. 성인이 자기가 섭취한 정도에 걸맞은 칼로리를 소비한다면, 태아기에 어떤 경험을 했든 상관없이 비만해지거나 비만으로 인한 증후군을 겪지 않는다.(247-248p)
바이스만의 주장은 결국 현대 생물학에서, 생식세포(정자나 난자)와 체세포(우리 몸을 구성하는 나머지 모든 세포) 사이에 존재한다고 가정된 경계선을 뜻하는 '바이스만 장벽'이라는 개념으로 고이 모셔졌다. 이 장벽은 체세포에 생긴 변화가 장벽 너머 생식세포에 영향을 주는 일을 방지함으로써, 획득된 형질이 유전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요한센의 통찰을 떠올려보면 자손은 생식세포에 들어 있는 것만을 물려받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획득 형질의 유전'의 예가 되려면 연습을 통해 커진 역도선수의 근육세포가 그 선수의 아들이 어떤 경험을 하든 상관없이 큰 근육을 갖게 만드는 방식으로 선수의 정자세포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 바이스만이 보기에, 연습을 통해 누군가의 체세포(예컨대 근육세포)에 일어난 영향이 그 사람의 생식세포에 영향을 줄 수 없다면 획득 형질의 유전을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대 생물학에서는 수정 후 2주가 지난 인간 배아에서 그때까지 분화되지 않은 세포 중 일부가 '원시 생식세포'가 되도록 유도되며, 이들이 결국 이후 정자나 난자로 발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생물학자들은 이 과정을 '생식계열의 분리'라고 일컫는데, 이 표현은 일단 생식세포가 체세포와 분리된 후에는 경험의 영향을 받지 않게 '보호'받는다는 그들의 믿음을 잘 담아낸다. 그리고 실제로도 바이스만이 주장한 그대로 생식계열의 분리는 경험이 체세포에 유발한 결과가 생식세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방지한다. 이리하여 만약 증조부와 조부, 아버지가(나머지는 모두 정상이지만) 양손에 여섯 손가락을 갖고 태어났다면, 세 조상이 모두 어렸을 때 손가락 하나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더라도 나 역시 양손에 여섯 손가락을 갖고 태어날 가능성이 커진다.
유전 물질은 경험 요인에서 영향받을 수 없다는 이 개념은 '경성' 유전이라고 알려진 것으로, 표현형은 반드시 유전자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유전자 결정론이 널리 퍼진 원인이기도 하다. 또한 이 개념은 20세기 초기 생물학자들이 다윈의 진화 개념에, 새롭게 등장한 유전학 개념들을 더해 끼워 맞춘 일련의 개념들의 총합인 이른바 현대 종합설의 중심 믿음이다. 신다윈주의 종합설이라고도 알려진 현대 종합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대부분의 생물학자가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
표현형의 세대 간 전달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경성' 유전뿐이라는 신다윈주의 가정에는 문제가 딱 하나 있다. 바로 가망 없을 정도로 단순하다는 것이다. 유전자 결정론이 불완전한 관념인 이유는 유전자가 진공 속에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표현형은 유전자들이 더 넓은 환경에서 영향을 받는 주변의 비유전적 요인들과 상호작용함에 따라 전개된다. 발달생물학자인 스콧 길버트의 말대로 "표현형 산출에 관한 환경의 조절은 발달의 정상적 요소로 간주해야 한다". 따라서 만약 부모가 특정 형질을 발달시킴으로써 살아남았고 그 자식 역시 같은 형질을 발달시켜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자식이 물려받아야 하는 것은 부모의 유전자만이 아니다. 부모가 애초에 그 적응에 유리한 형질을 발달시키도록 도와준 비유전적 요인들도 '물려받아야'한다.(289-292p)
"종의 형질은 그 종의 발달을 위한 자원들의 구조화된 집합체에 의해 구축된다. (...) 이 발달 자원에는 유전적인 것도 있고, 접합자의 세포질 기구부터 심리적 발달에 필요한 사회적 사건들까지 비유전적인 것도 있다. 그러니 요한센의 생각이 옳았던 것이다. 형질들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는 조상이 물려준 원재료(발달의 자원)로 그 형질들을 구축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재료가 오로지 염색체뿐이라고 여겼던 대부분의 요한센 추종자들과 달리 그리피스와 그레이는 발달의 맥락 의존적 성격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발달에 필요한 자원에 DNA 이외의 것들도 포함됨을 알아낼 수 있었다. 형질을 구축하는 데 사용하는 발달 자원에는 당연히 유전자도 포함되지만, 다양한 비유전적 요인들도 포함된다.(293p)
세균은 인간 내장의 발달에서 결정적 역할을 맡고 있음에도, 생식계열을 통해 자녀에게 대물림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세균들은 모든 갓난아기 안에 존재한다. 스콧 길버트가 설명했듯이 "우리에게 이 미생물 요소들이 부족한 일은 결코 없다. 우리는 양막이 터지자마자 어머니의 생식관에서 미생물들을 얻는다." 다시 말해 어머니의 '양수가 터진' 직후, 곧 태어날 딸의 환경에는 갑자기 이 미생물들이 넘쳐나고, 이어서 딸의 몸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살아가면서 소화관이 정상적으로 발달하도록 돕는다. 이 딸이 자라 본인도 임신하게 되면, 똑같은 방식으로 이 유익한 미생물들을 자기 자녀에게 물려준다. 이런 메커니즘에는 생식계열이 전혀 관여하지 않지만, 일종의 '대물림'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 점은 부모의 특징과 유사한 특징을 '물려받는'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는 이 장의 메시지를 부각시킨다.
(...)
야블론카와 램이 설명한 세대 간 정보 전달 시스템은 모두 네 가지인데, 유전과 후성유전, 행동, 상징이 그것이다.(302-303p)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전달되는 대물림의 특별히 흥미로운 한 예는 경험의 후성유전적 효과가 생식세포의 DNA에는 후성유전적 영향을 입히지 않으면서도 '유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앞서 10장에서 보았듯이 새끼를 많이 핥아주고 털을 골라주는 암컷 쥐(즉 높은 LG 어미)가 키운 딸 쥐는 자신도 LG가 높은 어미로 자라는데 이때 그 딸을 키운 어미가 생모인지 양모인지는 상관 없다. 그 효과는 높은 LG 양육자에게 받은 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양육 스타일의 세대 간 전달에 필요한 것은 행동 메커니즘이다.(308p)
당시의 생물학자들은 그런 결과가 생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확신했다. 보통 후성유전적 표지들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지워지기' 때문이다. DNA가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옮겨갈 때 후성유전적 표지들은 전형적으로 두 번 '지워진다'. 실례를 들어보기 위해, 당신의 어머니를 생각해보자. 외할머니 배 속에서 어머니가 수정된 직후, 막 새로 구축된 어머니의 유전체에 있던 후성유전적 표지들은 후성유전적 '리프로그래밍'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제거된다. 생각해보면 이건 상당히 이치에 맞는 일이다. 분화하고 성숙한 세포들에는 각자 어떤 종류의 세포인지 구별해주는 후성유전적 표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이는 성숙한 정자세포와 난자세포에도 해당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새로 만들어진 배아는 분화하기 전 상태인 줄기세포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그 배아를 만든 정자와 난자를 특징지었던 후성유전적 표지들을 갖고 있으면 안 된다!
(...)
그래야 어머니의 세포들이 다능성을 띨 수 있기 때문인데, 다능성이란 몸을 구성하는 아주 다양한 세포 중 어느 세포로도 발달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런 다음 2주 안에, 배아 상태인 세포 중 일부는 나중에 결국 어머니의 난자(그중 하나는 당신으로 발달할 것이다)가 될 원시생식세포로 분화되는 과정을 시작한다. 원시생식세포를 만들 때 처음에는 몇 가지 후성유전적 표지가 더해지지만, 이후 최종적으로 이 세포들 속 DNA에서도 후성유전적 표지가 모두 제거된다. 그러니까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동할 때 DNA는 2단계의 재설정 절차를 거치는 셈이다. 첫 단계로, DNA의 후성유전적 표지들은 새로운 개체의 수정에 관여한 다음 잠시 후 대부분 사라지며, 이후 이 개체가 자신의 새로운 정자세포 또는 난자세포를 만들기 시작할 때, 후성유전적 표지는 완전히 '깨끗하게' 지워진다.
30년 전, 생물학자들의 '상식'은 이랬다. 첫째, 후성유전적 표지는 세대와 세대 사이에서 완전히 '지워지므로' 세대 간 후성유전적 대물림은 불가능하다. 둘째, DNA 서열정보만이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대물림될 수 있다. 셋째, 따라서 '경성'유전만이 유일한 유전이다. 이런 상식에는 라마르크주의를 향한 바이스만의 불신이 잘 담겨 있다. 바로 부모는 자기가 살면서 한 경험의 결과를 자녀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1997년에 생쥐의 생식계열을 통한 후성유전적 대물림이 발견된 뒤 이 이야기에는 대대적인 수정이 필요해졌다.
(...)
DNA 메틸화가 생식계열을 통해 대물림될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런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에 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현재까지는 여전히, DNA가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이동할 때 대부분의 후성유전적 표지가 지워지는 것으로 여겨진다.(313-316p)
생식계열을 통한 후성유전적 표지의 직접적 대물림과 동물의 행동과 경험에 따른 변화와 같은 후성유전적 대물림의 간접적 메커니즘을 모두 생각해보면, 야블론카와 동료들이 위와 같이 말한 지 4년 후에 "후성유전적 대물림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라고 결론지은 이유를 알 수 있다.
DNA 메틸화는 경험에서 영향을 받는 것과 생식계열을 통한 대물림이 둘 다 가능하므로, 이제 획득 형질이 유전될 수 있다는 라마르크의 생각을 다시 검토해봐야 할 때다.
(...)
만약 '획득'이라는 말을 꼭 꼬집어 바이스만이 생쥐에게 가했던 꼬리 절단 같은 것을 가리키는 뜻으로 정의한다면, 도킨스의 말이 옳다. 한 세대가 경험한 절단이 다음 세대에도 나타나리라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없다(다음 세대도 앞 세대가 한 것과 똑같이 절단을 경험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나 지금쯤이면 '획득'과 '유전(대물림)'이라는 단어를 정의하는 방식이 단 한 가지가 아니라는 것과 다른 정의는 다른 결론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명백히 이해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유전의 넓은 정의, 즉 어떤 표현형이 이어지는 세대들에서 한결같이 복제되는 한 그 표현형은 '유전된'것이라고 보는 정의를 채택한다면, 다양한 경험이 유전되는 표현형에 기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317-318p)
20세기가 끝나가던 무렵에는 유전자가 결정론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분명해졌고 경험이 유전자를 침묵화하거나 활성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제는 모두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아마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후성유전학을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다른 형태의 결정론들을 부추기는 마뜩잖은 방식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행동 후성유전학과 관련해 강한 설득력을 발휘한 발견 가운데 몇 가지가 생애 초기 경험의 장기적 영향에 관한 연구에서 나왔다는 점 때문에, 아기가 초기에 한 경험이 반드시 그들의 특징에 영속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암시하는 저술가도 있다. 그러나 아기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미래의 고통을 예방하는 '접종'이라는 주장은 대체로 경계해야 한다. 영양이 풍부한 섭식과 질 좋은 환경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사람의 발달은 결정론적으로 이뤄지는 과정이 아니다. 따라서 성숙한 상태에서 우리가 지니는 특징들을 유전이 결정하는 게 아니듯 후성유전이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후성유전적 표지, 영양 요인, DNA 염기 서열 정보, 특정한 경험을 포함해 우리의 표현형에 원인을 제공하는 모든 발달 자원은 그중 어느 하나만으로 발달 결과가 결정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이렇듯 후성유전적 결정론, 다시 말해 한 유기체의 후성유전적 상태가 반드시 어느 특정 표현형을 초래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또 하나의 결론적이며, 유전자 결정론보다 아주 조금 덜하기는 하지만 위험한 생각이기는 마찬가지다. 두 관점 다 중요한 발달 과정들이 전개되기도 전인 삶의 초기에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운명이 완전히 결정된다는 잘못된 가정을 하고 있으며, 똑같이 근거가 없다.
특히 언론은 환경적 요인이 유전자의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특정 질병 상태나 작은 키 같은 표현형을 독자적으로 초래할 수 있다고 암시함으로써 후성유전적 결정론으로 슬그머니 빠져드는 경향을 보인다.
(...)
하지만 키 같은 특정 표현형이나 질병은 유전자나 유전자 스위치 같은 단 하나의 요인으로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복잡한 시스템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 간 상호작용을 통해 단계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므로 후성유전적 이상이 질병을, 또는 더 일반적으로는 표현형을 단독으로 초래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표형형의 발달은 후성유전적 표지가(물론 다른 발달 관련 요인들과 함께) 속해 있는 맥락에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362-363p)
어떤 종류든 생물학적 결정론은 옳지 않다. 이는 일단 아이를 궤도에 올려놓기만 하면 이후로는 아이의 발달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안전하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우리를 속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로 인한 또 다른 위험은, 예컨대 어떤 아이는 '절대 어떤 수준까지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거나 '어떤 불리한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에서 오는 파괴적 결과다. 아이가 앞으로 어떤 일은 절대 하지 못할 거라고 말하는 것은, 그 아이가 결국 어떤 일을 할지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 생물학적 결정론은 어른에게도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출산하는 순간부터 갓난아기와 '유대'를 형성하는 게 절대적 원칙이라고, 그래야만 아기가 '애착 문제'가 없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다고 믿는 여성은 만약 출산 후 입원하게 되어 아기와 시간을 함께할 수 없게 되면 걱정으로 몹시 심란해할 가능성이 크다. 다행스러운 점은, 갓난 생쥐에게 어미 분리가 스트레스 심한 일일 수 있다는 증거는 있지만, 갓 태어난 아기가 제일 처음 한 경험이 엄마와의 관계에 영원한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아기와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형성할 기회를 영원히 놓쳐버렸다고 믿는 여성은 그러한 자신의 오해에서 해를 입을 수 있다.
태아기의 특정 경험이 매우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결정론은 사람의 발달에 관한 사고의 틀로 부적절하다. 예를 들어 오늘날 임신 중의 음주가 태아에게 나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과학자들이 이 연관 관계를 입증하기 전 수백 년 동안에도 무수히 많은 태아가 어느 정도 알코올에 노출되고도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했다. 그렇다고 임신한 여성이 자유롭게 술을 마셔도 된다는 말은 물론 아니지만, 발달의 결과란 때로 생각만큼 쉽게 예측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는 하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결정론적 세계관을 적용하는 것은 언제나 부적절하다. DNA 분절뿐 아니라 후성유전적 표지도 운명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후성유전적 표지처럼, 초기 경험도 운명이라고 보면 안 된다. 예컨대 어떤 아이가 한 가지 트라우마를 겪은 후 어떻게 발달할지는 그 트라우마 경험 자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에 달려 있다.(365-366p)
ㅡ 데이비드 무어,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中, 아몬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