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폴린 그로장, <가부장 자본주의> 中, 민음사
2024/7/21
두 권 중 한 권만 읽을 거면 '커리어 그리고 가정'에 한 표.
특히 호주 연방 의회의 성폭력 스캔들이 터져 나온 때와 집필 시기가 겹치며 나의 격분과 화는 절정에 치달았다. 여성 보좌관에 대한 강간으로 추정되는 스캔들이 의회 한가운데에서 터졌고, 피해자는 혐의를 일체 부인하는 장관을 전례 없이 고발했지만 이후 자살했다.(13p)
남성 종특인가. 세계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행태가 똑같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이후 공장에서 일하는 백인 남성을 대체하며 블루칼라로서 전후 노동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앞서가게 된 것은 여성이 아니라 흑인 남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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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처럼 미국의 공공 정책은 여성보다 남성, 특히 퇴역 군인의 이익에 집중됐다. 실업 회계의 역사적 기록이 보여 주듯 이런 공적 노력은 차별적인 임금 조건에도 보람 없는 구직을 이어 나간 여성의 의지를 거스른 일이었다.
하지만 여성의 상황은 다른 수단을 통해 진화했으며, 여성 노동에 관한 사회적 관습과 규범이 지속적으로 영향 받았다. 여성 노동자의 아들은 전쟁 동안 여성이 공장에 나갔을 때도 바깥 세상과 가정이 여성의 가사 노동 덕에 멈추지 않았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를 당연시했다. 하지만 문화적 변화는 시작되었고, 이 책에서 수업이 확인하듯 여성 진보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이 문화적 변화다. 전시에 엄마가 공장에서 일했던 미국 남성은 여성 노동에 더 우호적이며 아내가 노동하는 것에 더 개방적이다. 게다가 일하는 여성과 결혼할 가능성이 더 크다.(37p)
피임약이 섹스의 가격을 상당히 낮추면서 약을 먹는 여성들이 결혼 내 협상력은 줄어들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를 설명하기 전에 내가, 그러니까 사회 과학 연구자들이 섹스의 가격이라는 표현으로 무엇을 말하려는지 설명해 보겠다.
여기서 엄밀한 의미의 성매매를 대상으로 하는 제한된 시장을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관념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교환되고, 모든 것은 시장이며, 이 모든 것에 수요와 공급이 존재한다. 분명 환원주의적인 시각이지만 이런 관점을 탈규제 시장에 동조하려는 새로운 시도로 봐서는 안 된다. 환원주의적 시각은 몇몇 특정한 동역학을 더 정확히 이해하는 것만을 위한 단순화일 뿐이다.
시장을 적절히 규제하려면 서로 다른 재화를 대상으로 한 각 시장의 경계를 인식해야 한다. 모든 것이 시장이고 모든 것에 수요와 공급이 존재한다는 단순화 속에서 동의하에 이루어지는 모든 성관계는 시장 교환의 대상으로 개념화된다. 여기에 특히 중요한 것은 동의 여부다. 성폭력과 섹스 시장의 관계는 노예제가 노동 시장과 맺는 관계와 같이 순수하게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제약적인 지배 관계라는 점에서 시장 개념에 반대된다. 성관계의 대가가 반드시 돈은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나 섹스 파트너, 친구를 비롯한 타인이 내게 품는 이미지, 애정, 더 나아가서는 결혼 기회 등이 존재한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성매매의 대가가 바로 돈인 셈이다. 경제학자들은 섹스 시장을 남성의 수요가 여성의 공급보다 높은 시장으로 모델화한다. 대부분 남성인 내 경제학과 동료들이 때로는 성차별적이지만 이런 예시와 관련해 꼭 그렇지는 않다는 점에 주의하자.
경제학자들이 섹스의 수요를 남성에, 공급을 여성에 귀속시키는 이유는 남성이 자연적으로 섹스를 더 많이 원한다거나 섹스를 선호한다거나 섹스에서 더 큰 이득을 본다고 가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학자들이 고려하는 것은 섹스를 원하는 성향이 아니라 섹스의 비용이다. 여성이 섹스에서 얻는 이득이 남성과 같다고 하자. 하지만 이 경우에도 섹스의 가격은 같지 않다. 여성에게 비용이 전가될 수밖에 없는 잠재적 임신이라는 요인이 있어서다. 잠재적 임신은 생리학적일 뿐 아니라 경제학적이기까지하다. 남성이 임신한 상대와 결혼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득은 남성과 여성이 같으나 비용은 남성이 적으므로 남성이 여성보다 섹스를 더 많이 욕망한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만약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면 비용은 자연히 상승한다. 여기에서 여성이 결정하는 섹스의 가격은 잠재적 임신에 대한 경제적 비용 혹은 이에 가장 가까운 것, 곧 결혼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성매매를 제외하고서 섹스에 접근하기 위해 그토록 오랜 시간 남성은 여성과 결혼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경구용 피임약은 피임을 일반화해 여성의 임신 위험과 여성에게 최종적으로 전가될 비용을 줄여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이뤘고, 섹스의 비용을 감소시켰다. 이로써 결혼은 더 이상 필수가 아니게 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 일반화된 임신 중절 접근권이 지닌 효과 역시 같았다. 경구용 피임약이 약속하는 성 해방은 섹스를 위해 남성이 지불하는 가격을 낮춘 동시에 결혼 자체가 크게 줄어드는 것을 의미했다. 일반적으로 미혼 여성이 더 많이 일하므로 이러한 추세는 자동적으로 여성의 노동 시장 참여를 증가시켰다. 피임약이라는 기술은 다른 모든 여성의 섹스 공급을 늘려서 결혼 관계 내에서 여성의 협상력 또한 감소시켰고, 여성의 노동 공급에 추가적인 긍정적 효과를 이끌어 냈다.(48-51p)
프랑스는 유럽의 이웃 국가에 훨씬 앞서 1946년 이미 '여성 임금'이라는 통념을 폐지했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로 임금을 더 적게 받는 것은 법적으로 정당했다. 고용주들은 여성 임금을 후려치는 조항이 폐지된 것에 손쉬운 노동과 고된 노동을 구분하는 여러 단계를 만드는 식으로 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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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요구하는 최저 임금법을 우회하고자 온갖 종류의 수당을 만들고 필요 숙련도를 설정하는 등 고용과 관련된 변별적인 범주와 단계를 고안하기 시작했다.(54p)
여러 연구는 이 해방의 기계들과 여성의 노동 시장 참여 증가를 연결 짓는다. 몇몇 연구는 심지어 해방의 기계들이 베이비 붐을 촉발했다고 보기도 한다. 여성의 시간이 해방되면서 이들이 더 많이 일할 뿐 아니라 더 많은 자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최근 연구들은 이러한 상관관계가 오류일 가능성을 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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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최근에 내 동료 세라 워커와 고탐 보즈, 테런 제인은 여성 노동과 가전제품 채택 사이의 인과성이 실은 반대로 향한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연구에 따르면 여성의 노동과 소득 덕분에 이런 기계를 살 수 있었지 그 역이 아니다. 가전제품이 늘린 시간상 이득도 생각만큼 놀랍지 않았다. 기계 사용은 여성을 해방했다기보다는 가사 노동을 둘러싼 상황과 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기준을 바꿔 놓았다. 청결한 의복과 신선한 음식을 향한 사회적 기대치가 커지면서 기계가 여성에게 주었을 혜택의 상당 부분이 제거되었다.(56-58p)
미국 미시간 대학 법학 전공 학위가 있는 여성 변호사와 남성 변호사는 동일한 임금 수준에서 시작해 곧 자녀를 가질 나이가 된다. 여성 변호사는 장기 프로젝트를 거절하고 미국에서 특히 더 짧은 육아 휴직을 써 탁아소에서나 유모에게서 자녀를 데려온다. 이 모든 상황 때문에 야근을 할 수 없다. 여성은 자녀를 돌보려 일정 기간 일을 쉬고 또 파트타임으로 일한다. 자녀가 있는 여성의 42%가 그러한 반면 동일 표본에서 남성은 어떨까? 고작 0.68%가 그렇다. 또한 이들은 변호사로서의 삶과 엄마로서의 삶을 양립할 수 있는 환경을 지닌 팀에 합류하려 회사를 옮긴다. 이렇게 15년이 지나면 같은 시기 경력을 시작한 남성 동료보다 50% 더 적은 돈을 벌게 된다. 여성은 더욱이 경력을 유지하는 데 드는 개인적 비용이 더 크다. 이 연구에서 여성 중 70%가 결혼하고 남성 중 85%가 결혼한 것처럼 여성은 남성보다 덜 결혼하고, 자녀가 더 적고, 자녀가 없을 확률이 남성의 두 배다. 여성은 자녀가 평균 1.31명, 남성은 1.86명이었고 여성의 36%가 자녀가 없는 데 반해 남성은 19%가 그러했다. 자녀가 없는 여성 변호사의 보수 수준은 남성 변호사의 일반적인 보수 수준과 일치했다. 자녀는 여성에게만 경력상 비용으로 작용한다.
이렇듯 1980년대에 여성은 직업 영역에서 진보했지만 보수가 가장 좋은 직업에서는 꾸준히 배제되었다. 최소한 엄마인 여성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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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진보는 항상 자녀의 유무와 연결되어 있다. 아이가 있는 노동자에게 경력 단절, 일정이 유연한 일터 찾기, 노동 시간 단축, 파트타임 노동은 불가피하다. 불행히도 이 모든 책임은 불균등한 방식으로 엄마에게 전가된다. 앞서 살핀 변호사 표본에서 엄마가 파트타임으로 일할 가능성은 아빠보다 62배 더 높았다.(63-64p)
그렇다면 오늘날 여성-남성 불평등 설명에서 '전통적인' 요인이 차지하는 몫은 매우 적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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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남성은 서로 다른 영역에 고용되었고 지금도 변함 없이 그렇다. 경제 영역의 상당수는 초등 교육처럼 여성화되었다. 여성은 법관, 의사, 고등 교육자, 연구자가 되었고 정치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 두 요인이 여남 소득 평등화에 제동을 걸었다. 첫째, 여성은 특정 영역에서 다수 혹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지만 여전히 위계질서상 유리 천장 아래 직급을 차지하고 있다. 의회에는 입성했지만 대통령 집무실까지 진입하지는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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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천장은 거의 완전히 여성화된 직업군에조차 존재한다. 학교 교사의 82%가 여성임에도 교육 감독관에서 그 비율은 20.5%에 불과하다.
둘째, 여남 소득 격차는 여성화된 직능이 종종 본래 갖고 있던 명예와 보상을 상실하면서 유지되었다. 지난 몇십 년간 언론인 직군에서 일어난 변화가 대표적이다.(79-80p)
2013년 출간된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 셰릴 샌드버그의 저서 「린 인」에서 그는 여성이 책임을 지는 직책을 맡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하며 성공과 야망을 여성적 자질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지적했다. 내가 보기에 그 추론은 심각하게 제한적이고 근본적인 오류가 있다. 특히 「99%를 위한 페미니즘」의 저자들은 이 같은 주장이 여성이 가장 큰 책임을 지는 직책을 맡으면 여성-남성 불평등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경제 체제에서 낮은 임금을 받을 수밖에 없는 99%의 다른 여성의 존재를 무시할뿐더러 데이터에 의해 완전히 반박된다. 일반적으로 직업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서는 여성은 임금 사다리의 아래에 있는 여성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거나 그들을 위한 행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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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각은 부당하거니와 순진할 따름인데, 여성적 또는 남성적이라 간주되는 특성은 부분적으로 사회적 구성물로부터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항상 결정된 방식으로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회적 구성물은 굳어진 것이 아니다.(82p)
또 허위 이력서에 기반한 연구는 여성에 대한 체계적 차별을 보이지 않지만 엄마에 대한 차별이 있다는 점은 분명히 드러낸다. 다른 어떤 실험은 고용주들에게 모든 점에서 비교 가능하며 부모인지 아닌지 여부가 포함된 여남 지원자의 허위 이력서를 보냈다. 그 결과 여성이 엄마인 것은 고용 전망뿐 아니라 임금 측면에서도 상당한 불이익을 주었고, 그와 달리 남성이 아빠인 것은 이득이었다! 엄마들은 이력이 같음에도 덜 유능하고 업무에 덜 헌신적이라 인식되었으며 더 낮은 임금을 제안받았다. 반면 업무에 더 헌신적이라 판단된 아빠들은 더 높은 임금을 제안받았다. 아빠는 영웅으로 인식된 것이다.
나 또한 임신했을 때 학생들로부터 완전히 바닥인 강의 평가를 받은 적이 있다. 나 자신은 처음이 아닌 그 강의의 질이 특별히 나빴다고 인지하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반면 육아 휴직을 치고 복귀했을 때는 밤에 잘 잠들지 못하는 딸을 돌보느라 완전히 녹초가 된 상태로 저녁 수업을 해야 했지만 평가는 평소 거의 다름없이 좋았다. 이러한 차이는 임신해 불룩해진 배가 생산한 효과다.(90p)
앞으로 사회적 규범과 그 규범에 따른 유형화, 가정 및 교육 환경이 이 문제에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강하고 용감하고 경쟁적인 남자아이, 수줍고 얌전한 여자아이라는 구분은 클리셰에 불과하다. 이는 결국 스테레오 타입을 만드는 유형화이며, 고정관념이 만든 예언이 실현되게끔 한다. 여자아이는 부드럽고 수줍음이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녀를 경쟁적인 환경에 밀어 넣지 않는다. 이들은 소녀를 가여워하고 그들의 아픔을 달래 주지만 남자아이에게는 울지 말고 일어나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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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이 같을 때 임금이나 전일제 일자리에 대한 접근권에서 나타나는 불평등 등을 보면 말이다. 우리는 이런 측면을 설명하고자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일자리가 더 많고 보상이 더 큰 이공계에 진학하는 경향이 더 짙다는 점을 관찰했다. 남학생들은 프랑스의 HEC나 미국과 중국의 엘리트 대학 입시처럼 빛나는 커리어를 약속하며 학생을 선발하는 시험에서 더 성공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시험의 본성은 여학생에게 불이익을 주며 고소득층에서 여남 불평등을 재생산한다.(104-105p)
자녀 출산과 관련한 소득 불이익은 엄마의 역할과 노동에 관한 사회적 규범 및 기대에 따라 각 국가에서 달라진다. 더욱이 한 국가에서도 이 불이익은 여성이 가정을 지탱해야 하고 자녀가 태어나면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도식에 가족들이 순응하는 정도에 따라 달라지며, 이러한 가족 내에서 세대를 거쳐 전승된다.(114p)
애초에 여성이 다수였지만 기술 발달로 보수 수준이 높아지면서 남성적으로 변한 영역도 있다. 사람들은 정보공학이 바로 그런 사례라는 것을 잘 모른다. 오늘날 남성 지배적인 직업의 본보기인 정보공학은 원래 여성이 많은 직군이었다. 1940년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개발한 초창기 컴퓨터 중 한 대는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팀이 만들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 활용한 에니그마 암호를 해독해 낸 연합군 통신 센터 블레츨리 파크의 직원 1만 명 중 3분의 2는 여성이었다. 1967년 《코즈모폴리턴》에 실린 기사 「컴퓨터 소녀들」은 정보공학이 전형적으로 여성적인 자질을 요구한다고 설명했다. 프로그래밍과 코딩은 정확히 다음과 같은 일로 묘사되었다. "저녁 식사 준비하기 : 미리 생각하고, 무언가가 필요할 때 쓸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계획해두어야 한다. 인내심을 갖고 세부 사항에 주의해야 한다. 프로그래밍은 여성에게 본성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심지어 여성은 이 직군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다. 자료 처리와 관리 분야 최초의 직능 단체가 1969년 처음으로 수여한 '올해의 남성'(!)상을 받은 사람은 여성인 그레이스 호퍼였다.
1940년대에 여성은 최초의 컴퓨터를 프로그래밍할 수 있었고 사람들은 이를 쉬운 일로 여겼다. 노동, 그러니까 컴퓨터를 만드는 '진짜' 노동은 남성의 일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래밍과 코딩이 사소한 작업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고 프로그래밍이 권위를 얻게 되면서, 프로그래밍에 요구되는 자질이 저녁 식사 준비에 필요한 것보다 천재적인 특성에 가깝다고 간주되면서 남성이 이 영역에서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됐고 여성은 사라졌다. 비율로 보자면 오늘날 정보공학을 공부하는 여성은 40년 전보다 더 적다!" 이제 집단적 상상계와 대중문화, 영상에서 컴퓨터 괴짜는 오로지 남성으로 표현된다. 그 결과 이 분야에 요구되는 자질은 전형적으로 남성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정보공학 분야의 천재는 약간의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자신의 감정과 거리를 두고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항상 남자인 논리적 존재로 등장한다. 그는 사회적으로 유복한 환경의 백인이기도 하다.
서로 연결된 두 물병 속 물이 '남성' 직업과 '여성' 직업 사이에서 움직일 때마다 그 직업의 사회적 이미지는 달라진다. 따라서 여성이 특정 직군에 진출하기 시작하면 시소 효과가 관찰된다. 어떤 산업에서 여성 참여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그 산업이 빠르게 여성화하는 것이다. 클로디아 골딘은 남성의 이러한 집단 탈출을 오염으로 인한 분리 이론으로 설명한다. 여성적 자질과 결부된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를 고려하면 어떤 직능의 사회적 이미지는 여성이란 존재 때문에 손상되고 오염된다.
요약하자면 여성이 어떤 직능을 수행할 수 있으면 이는 그 일이 어렵지 않고 높은 신체적·지적 자질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에 프로그래밍은 저녁 식사를 계획하는 것 정도의 숙련이 필요한 쉬운 일로 취급되었으나 이제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천재로 불린다. 초등학교 교사는 존경받고 보수가 좋은 엘리트 직종이었지만 지금은 존경도 못 받고 보수도 적다. 만약 어떤 직능이 여성이 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고 많은 자질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런 일을 왜 굳이 존중하겠는가?
여성이 어떤 직능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이 일의 사회적 이미지는 변한다. 이러한 변화로 이 직능에 속한 남성이 품는 자기 이미지가 손상될 수도 있다. 같은 남자들 사이에서 남자는 남성의 일을 하는 쪽이 편할 것이다. 모두 각자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있는 법이니까. 그런 이유로 이들은 여성의 일을 맡길 거부한다. 이 해석은 성차별적인 사회일수록 여성화하는 직종에서 남성의 이탈이 더 빨리, 아마 여성이 맨 처음 진입하는 때부터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현상이다.
자신이 속한 직군에서 자기 이미지와 관련된 이득을 보는 여성에게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여자들이 더 여성적인 직군에서 여성을 채용하길 선호한다는 점을 관찰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한 번 더 짚자면 이는 정확히 앞서 살펴본 채용에 관한 성차별 데이터와 그러한 차별의 동역학이 보여 주는 바다.(119-121p)
사람들은 자기 어필을 열심히 하고 나흘에 한 번씩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경쟁적이고 야심 있는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런 여성은 '섹시'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경쟁적이고 야심 있고 잘 뽐내는 남성은 가치를 인정받고 섹시하다고까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말이다.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진행한 스피드 데이트 실험은 이 점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남성은 자기보다 더 야심차거나 똑똑한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런 상대의 연락처를 묻지 않는다. 또 일터에서 협상을 하는 여성은 남성보다 체계적으로 좋지 않은 평가를 받게 된다.
여성들은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친애하는 셰릴 샌드버그 여사님, 여자들은 미치지 않아서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반드시 경쟁심이나 야심이 덜한 것이 아니다. 여성은 야망을 드러내면, 자기 자신을 뽐내면, 경쟁에서 이기면 남들에게 안 좋은 시선을 받고 부정적인 결과를 겪게 되리라는 점을 정확히 알고 있을 뿐이다. 여러 영역에서 나타날 부정적 결과들을 말이다.(141-142p)
'진보'는 농업의 등장과 정주화, 더 나아가 농업의 기술적 집약화와 쟁기 발명으로 여성을 급격히 퇴보시켰다. 여성은 가정에 유폐되었고 자율성과 경제적 독립을 잃었다. 생산의 성별 전문화는 수렵과 채집에서보다 농업에서 훨씬 두드러지며, 이러한 경향은 쟁기와 같은 기술이 남성 노동 생산량을 특권화하거나 증가시키면서 더 강해진다. 이에 따라 남성은 밭에서의 노동을, 여성은 가사와 자녀 돌봄을 할당받는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농업 도입을 인류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로 꼽는다. 농업은 경제적 부정의, 정치적 계층화와 전제 정치, 전염병 그리고 여성과 남성 사이 불평등의 악화를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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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의 집약화 이전에 잉여를 생산하고 비축하지 못한 무능력은 그 사회의 평등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음식 생산에서 여성의 지배적 역할은 이들에게 사회적 지위는 물론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해 주었다. 하지만 축적과 함께 불평등이 나타났다. 더욱이 농업의 집약화와 노동 생산성 증가는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게 했고 노동력에 대한 수요를 키웠는데, 노동력은 여성만 만들 수 있다. 이 때문에 여성은 노동력을 생산하는 역할로 길들여지고 강등되었으며 심지어 이런 역할에 전문화되기도 했다. 남성은 재산을 생산하고 소유하며, 여성은 자녀를 재생산한다. 농업의 발명이 인류의 비극적인 실수라면 여성에게는 훨씬 심각한 잘못이었다.
또 이 현상은 수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매우 긴 시간에 걸쳐 우리의 습관이 형성되었고, 이를 통해 문화가 만들어졌다. 우리는 오늘날까지 그 결과를 경험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농업에 기초하지 않은 산업 사회에서조차 말이다.(168-169p)
ㅡ 폴린 그로장, <가부장 자본주의> 中,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