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국외소설

ㅡ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中, 엘리

mediokrity 2024. 7. 30. 01:36

2024/7/29

 

볼라뇨 읽고 싶다. 읽기 싫다.

 

 

곧 논문에 시큰둥해졌고, 일시적인 유혹이 아니라 분명하고도 호기로운 욕망으로 소설가가 되기 위해 고귀한 학문의 길에서 멀어졌다. 너도나도 나에게 경고했다. 문학으로 영영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어. 상처받고 좌절하고 사회 주변부로 밀려나고 영영 실패자가 되면 어쩌려고! 맞아,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말했다. "사람들"이 지치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러다 자살하고 말 거야! 맞아, 그럴 수도 있어. 내가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어차피 삶은 '그럴 수-있다'속의 연결선에 지나지 않아. 나는 그 단어를 만드는 가느다란 선 위를 걷고 있지. 내 무게 때문에 선이 끊어진다면 할 수 없지 어쩌겠어. 뭐가 살아남고 뭐가 죽었는지는 그때 가서 보는 수밖에(25p)

 

 

여자들이 샤워를 마친 뒤 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무척 중요해 보이는 수많은 일을 하는 긴 시간이 흘러갔다.(36p)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ㅡ내 생각에 넌 작가가 분명해. 작가가 되려고 배우는 중이든가. 놀랄 거 없어. 난 너 같은 부류의 인간을 첫눈에 알아볼 줄 알거든. 사물을 볼 때 마치 그 뒤에 깊은 비밀이 있는 것처럼 보는 부류지. 여자의 성기를 보면서 마치 신비를 풀 열쇠가 들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응시하잖아. 뭐든 탐미적으로 바라보지. 그래봐야 성기는 성기일 뿐인데, 눈을 파묻고서 서정이든 신비든 질질 흘릴 게 뭐가 있다고. 순간을 살피고 또 글을 쓰고 동시에 할 수는 없어.

ㅡ왜 없어요. 그럴 수 있어요. 작가로 산다는 게 그런 거잖아요. 삶의 매 순간을 글쓰기의 순간으로 만들기, 모든 것을 작가의 눈으로 바라보기, 그리고·····

ㅡ그게 바로 네 오류야. 너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 저지르는 오류. 문학이 삶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삶의 빈자리를 채우든지 혹은 대신할 수 있다고 믿는 거 말이야. 틀렸어. 나도 작가들을 많이 만나봤는데, 같이 잔 남자들 중에 작가들이 제일 형편없었어. 왜 그런지 알아? 섹스를 하면서 이미 머릿속으로 그 체험을 글로 묘사할 궁리를 하거든. 애무를 해도 매번 상상력이 만드는 혹은 만들게 될 것 때문에 엉망이 되고, 허리를 돌릴 때마다 머릿속에 맴도는 문장 때문에 약해지지. 섹스 도중에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해봐. "그 여자가 속삭였다"어쩌고, 그자들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결국 여자랑 자면서도 머릿속으로 글을 쓰는 거야.

(...)

중요한 건 삶이야. 작품은 그다음이고. 두 가지는 절대 하나가 되지 않아.(37-38p)

 

 

내가 충고 하나 할게. 위대한 책에 대해서 그 책이 무엇에 대해 말하는지 절대 말하려 하지 마. 아니면, 할거면, 가능한 대답은 단 하나야. 아무것도 아니다. 위대한 책은 아무것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아. 하지만 그 안에 다 들어 있지. 어떤 책이 위대하다고 느껴지거든 절대 그 책이 무슨 말을 하는지 말하려 하지마. 그건 의견이란 것이 네 앞에 내미는 함정이야. 사람들은 책이라면 꼭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디에간, 뭔가에 대해 말하는 건 보잘것없거나 시시하거나 진부한 책들뿐이야. 위대한 책은 주제도 없고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아. 단지 무언가를 말하려고 혹은 발견하려고 애쓰지. 그 단지가 이미 전부야. 그 무언가가 이미 전부이고.(54p)

 

 

나는 그를 혼자 두고 파리의 밤을, 그 속에서의 흥분을, 맥주의 물결을, 순수한 기쁨과 순수한 웃음을, 독한 약물을, 영원 혹은 순간을 산다는 환상을 들쑤시기 위해 거리로 나갔다. 하지만 나의 불길은 곧 축제의 우울에 사로잡혀 꺼져버렸다. 원래 나는 축제의 분위기를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 여럿이 함께하는 기쁨, 무리로 모여 하는 축하, 순간적으로 솟구치는 열기는 거의 언제나 나를 의지할 곳 없는 우울 속으로 밀어 넣었다. 취기나 기쁨 속에 발을 들여놓으면 이내 그 가련한 이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기쁨을 오래 누리지 못했고, 세상이 떠안기는 슬픔을 피하지 못했다. 축제 이전의 슬픔, 축제가 끝난 뒤의 슬픔, 돌이킬 수 없는 끝이 기다리는 축제 동안의 슬픔(미소가 지워지는 순간의 얼굴 못지않게 흉측하다),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각자가 마치 유령처럼 힘껏 맞서 싸우는 슬픔의 몫, 나는 때로 이런 숙명을 받아들였다. 또 때로는 완전히 무시한 채 태평스러운 열광 상태로 춤과 불의 고리 속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많은 경우 내 마음은 썰물이 빠져나간 상태였다.(58-59p)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처럼 더 이상 덧붙일 게 없어 보이는 책들이 이미 수천 년 동안 나왔는데 우리는 뭣 때문에 계속 책을 쓰려 할까? 우리가 글을 쓰는 것은 작가의 삶을 산다는 낭만주의 때문이 아니고ㅡ그런 낭만주의는 이미 희화화되었지ㅡ, 돈을 위해서도 아니고ㅡ그건 자살 행위야ㅡ, 명예를 위해서도 아니고ㅡ유명인이 되는 것을 선호하는 이 시대에 명예는 낡은 가치인걸ㅡ, 미래를 위해서도 아니고ㅡ미래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ㅡ,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도 아니고ㅡ변화가 필요한 건 세상이 아니지ㅡ, 삶을 바꾸기 위해서도 아니고ㅡ삶은 바뀌지 않아ㅡ, 참여를 위햐서도 아니고ㅡ그런건 영웅적인 작가들에게 남겨두자ㅡ, 예술을 위한 예술을 기리는 것도 아니지ㅡ예술도 어차피 상업적으로 거래되는데 환상일 뿐이지. 그렇다면 왜 쓸까? 알 수 없다. 어쩌면 알 수 없다, 가 바로 우리의 대답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글을 쓰고,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글을 쓴다. 희망 없이 그래도 체념하지 않으면서, 집념과 탈진과 기쁨을 맛보며 세상을 더 낫게 만들겠다는 한 가지 목표로 쓴다.(62p)

 

 

이어 우리는 프랑스 문단에서 우리 같은 아프리카 작가들(혹은 아프리카 출신 작가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때로는 편안하지만 굴욕적일 때가 많은 모호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는 우리의 선배들을, 분명하고 손쉬운 표적인 이전 세대의 아프리카 작가들을 조금은 부당하지만 멋대로 유린했다. 지금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말할 능력 혹은 권리(결국 같은 말이다)가 박탈된 상황을 그들 탓으로 돌렸다. 그들이 남들의 시선에 갇혀버렸기 때문이라고 욕했다. 말벌의 겹눈 같고 그물 같고 늪 같은 시선들이 그들에게 진실되라고ㅡ다시말해 달라야 한다고ㅡ동시에 비슷하라고ㅡ다시 말해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고(다시 말해, 그들이 들어가 진화 중인 서구의 환경 속에서 상품화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다. 우리의 비판은 훌륭했고, 다시 말해 가차 없었다. 우리는 그 편한 길 도중에 멈춰 설 수 없었다. 우리는 손쉬운 이국정서를 풍기는 흑인 노예 수용소에 갇혀버린 선배들을 비난했고, 자신의 삶을 허구로 그려낸, 그러나 초라한 실존을 초월하는데 실패한 선배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아프리카인이 되라고, 하지만 너무 많이 되지는 말라고 요구받았고, 말이 안 되는 그 두 가지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들이 작가임을 잊었다. 그것은 중대한 과오였다. 우리는 결국 그들의 피에서 퍼져 나오는 냄새 속에 있으니, 그 과오만으로도 우리가 심리를 진행하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그들이 시적 가장자리에 일시적으로 머무리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고 단언했고, 흔히 평범한 작가들이 살짝 부르주아적인 고답파적 세계 안에 갇히듯이 이미 생명을 다한 참여라는 포부 속에서 희화화되고 길을 잃었다고 공격했다. 또한 세상을 해석하거나 재창조하지 않고 그대로 옮겨놓는 데 만족한 생기 잃은 리얼리즘을 비난했고, 예술가가 누리는 자유의 권리 아래 감추어진 이기심을 향해 혐오의 욕설을 내뱉었다. 우리는 진부함으로 문학을 욕되게 하는 소설을 써낸 선배 작가들의 머리를 우수수 베어버렸고, 자신들이 자리 잡은 문학적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함께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로 포기해버렸다고 사형선고를 내렸다. 글 속에 혁신적인 미학을 위한 조건들을 만들어내지 못한 무능력을, 문학을 통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함에도 시도하지 않은 게으름을 흉보았고, 문학상과 아첨과 사교계 만찬과 축제와 수표와 유통에 종속된 나머지 단정한 문학을 분장시키거나 주름지게 만드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서로에게 너무 나쁜 독자 혹은 너무 가까운 친구라서 글을 읽어주지도 용기 내어 문제점을 지적해주지도 못했다고, 너무 소심해서 소설이든 시든 그 어떤 것으로도 감히 절교하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

영광스러운 선배들이여, 아, 아, 정년 그것이 꼭 그들만의 죄이겠는가? 우리는 갑자기 너그러워져서 그들 대신 역겨운 공범들을 재판정으로 소환해냈다. 우선 아프리카 독자들이다. 우리는 간결한 판결로 그들을 살해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독자들이다. 책을 읽지도 않고, 게으르고, 우스꽝스럽고, 미성년자들처럼 고집불통이고, 그 누구로도 대표될 수 없는 존재들이면서 늘 누군가 자신들을 대표해주길 갈망한다. 이어 서구의 독자들(그냥 말해버리자면, 백인 독자들). 마치 자선을 베풀 듯이 우리 선배들의 책을 읽은 사람들이 꽤 있지만, 어차피 그 책들을 통해 기분을 전환하고 아프리카인들을 통해 넓은 세상을 보려 했을 뿐이다. 그들이 원한 것은 익히 알려진 대로 원색적인 아프리카인, 글 속에도 리듬이 있는 아프리카인, 달빛 아래서처럼 이야기를 들려줄 줄 아는 아프리카인, 뭐든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 아프리카인, 감동적인 이야기로 여전히 폐부를 찌를 줄 아는 아프리카인, 그토록 많은 프랑스 작가들이 들어가 헤매며 거들먹거리는 자기중심적주의에 빠지지 않은 아프리카인이다, 아, 작품이 사랑받는, 형형색색의 개성이 그리고 커다란 치아와 희망으로 가득 찬 함박웃음이 사랑받는 아프리카인들이여. 이어 비평(학계, 언론계, 문화계)의 무관심이 단두대에 올랐고, 비평의 가늘고 섬세한 목 위로 우리의 육중한 칼날이 떨어졌다. 문제 제기가 어떻고 주제가 어떻게 악착같이 따지는,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비평. 작품들이 가축 떼처럼 줄지어 지나가게 만드는 터널, 개괄적이고 좁아터진 비평. 그 터널 속에서 작품들은 무거운 개념들, 전문용어의 기름기, 주제들의 싱거움 때문에 숨 막혀 죽기도 한다.

(...)

우리가 뭐냐고? 뻔하지 않은가. 막 문학에 발을 들여놓은, 자기들에게는 모든 게 허락 되었다고 믿는 젊은 바보들. 지금이야 새롭다지만 곧 옛사람이 되어, 달려드는 미래의 새끼 늑대들에게 난자당할 자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

우리가 비판한 것은 사실상 우리 자신이었고, 우리가 표현한 것은 무능한 우리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출구 없는 동굴안에서 쥐들처럼 그 동굴 속에 갇힌 채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62-67p)

 

 

책의 가치는 다 똑같고 책을 구분하는 유일한 기준은 주관성이며 나쁜 책은 없고 오직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은 책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인 채 그저 책을 집계하기만 하는 이들을 비판했다. 언어와 창조의 요구사항을 작업에서 추방해버린 작가들, 독자라고 불리는 전능하고 전제적인 추상적 관념에 이르는 노력은 없이 오로지 현실을 복제하는 데 그치는 이들도 공격했다. 또한 책 속에서 재미있고 손쉬운 쾌락만을 찾는 대중으로서의 독자, 단순화된 문장들, 산자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아홉 단어를 넘기 힘들고 늘 직설법 현재형으로 쓰이는, 접속법을 모두 몰아낸 단순화된 문장들로 찍어낸 단순한 감정들이 엮인 쾌락만을 찾는 이들을 비난했다. 그리고 시장의 하인 역할을 하는 출판 편집자들, 문학의 고유한 특성을 장려하기보다 그저 들쑤시고 도식적인 상품들을 파느라 정신이 없는 이들을 공격했다. 비평이라는 이미 케케묵은 것을 포스탱 산자의 재능이 되살려냈다. 물론 당사자 역시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

에바 투레는 기업가이자 자기계발 코치이면서 시대의 모든 정신적 대의를 지키려는 투사, 말하자면 은하계의 모범이었다. 에바 역시ㅡ안타깝게도 문학적 요실금은 우리 시대에 가장 널리 퍼진 질병 중 하나다ㅡ글을 쓰지 않고는 버티지 못했고, 결국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랑은 카카오 콩이다」가 나왔다. 내가 보기엔 문학이라는 관념 자체를 철저히 부정하는 책이다. 수면제나 다름없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책. 그런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70-72p)

 

 

나는 글 그러듯이 더 자주 전화하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후에도 변함없이 아주 이따금 전화하게 될 것이다. 어머니는 농반진반으로 내가 가족의 의미를 잘 모른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 뼈저린 농담은 소리 없는 비난이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럼으로써 모든 것을 말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내가 오래 연락 없이 지내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지극히 단순한 일이었다. 나는 수많은 자녀들이 삶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해내야 하는 의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부모의 은혜를 저버리기.(77-78p)

 

 

우리는 출발 날짜 전에 한 번 더 만나기로 했고, 제대로 한잔하면서 우리가 좋아하는 소설가들과 시인들의 글을 읽어보자고 약속했다. 친구가 된 두 작가, 이제 각자 어둠 속으로 떠나려 하는 두 작가라면 최소한 그런 식으로 이별해야지. 우리는 그렇게 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그런 문학적 작별의 술자리는 없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오랫동안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만나기로 한 약속이 지켜지리라고 믿는 척한 것은 오로지 그 순간에 느낀 헤어짐의 무게를 덜기 위해서였다. 물론 서로 전화는 할 테지만, 만나지는 못한다. 그리고 다시 만날 때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으리라. 아마도 그저 인간들이 되어 있을 것이다.(113p)

 

 

넌 네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 늘 아리송하고 복잡하게 말하지. 그런 게 지적이고 성숙하고 생각 있는 거라고 믿지? 가장 심각한 주제는 물론이고 더없이 평범한 주제 앞에서도 넌 늘 생각이 흔들려. 스스로 그러고 싶어하지. 한 문장 안에서 넌 의견을 말하고 또 그걸 의심해. 아마도, 의 삶! 정말 그런 걸 원해? 아무도 네가 뭘 생각하는지 모르게? 너에게 세상은 두 심연 가운데 서서 어느 쪽으로도 가지 못하는 그런 곳이지. 그날 밤에 네가 안 들어 왔을 때, 그래 널 원망했어. 실망스러웠지. 난 널 원했고 너 역시 그렇다고 말했으니까.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니까 내가 짜증나는 건 세상 속에서 혹은 세상 앞에서 네가 취하는 일반적인 태도 때문이었어, 너에겐 뭐가 중요해? 넌 어떤 욕망을 따라가? 네가 늘 지키고 싶은 건 뭐야? 심지어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에 대해 토론할 때도 넌 무심해 보였어. 네 관심은 우리를 보는 거, 불길에 사로잡혀 흥분한 우리를 지켜보는 것뿐이었다고. 네 불길은 어디 있지? 내가 보기에 넌 유령이 벽들을 통과하듯이 그렇게 사물과 사람을 지나쳐버려. 상대가 너에게 애착을 보이면 너도 한동안은 애착을 갖는 것 같지만 하루 자고 나면 가버려. 깨어나 보면 우리 곁에 네 자리는 차갑게 식어 있고, 왜 떠났는지 어디로 떠났는지도 알 수 없어. 네가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만 알 수 있지. 사람들은 시험 상대가 아니야. 실험실의 동물이 아니라고. 난 빌어먹을 실험용 쥐새끼가 아니야, 디에간. 사람들은 언제든 써먹을 수 있는 문학적 재료가 아니고 네가 냉소를 지으며 머릿속으로 뜨개질해서 만들어내는 문장이 아니야. 무심브와에겐 네게 없는 게 있어, 알아? 둘이 공통점이 많긴 하지만, 무심브와는 너와 달라. 사람들을 볼 줄 알지. 사람들과 함꼐 이 땅 위에 있고, 몸을 섞어야 할 때는 섞고, 술을 마셔야 할 때는 마시고, 위안을 줄 수 있을 땐 위안을 줘. 너무 개입하게 되지 않을까 틀리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지. 무심브와는 인간이야. 훌륭한 작가 그 이상이라고. 온기가 느껴지잖아.(129-130p)

 

 

자기 부모를 향한 증오심에 끝까지 충실한 작가는 많지 않아. 시가 D.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작가들은 책 속에서 부모와의 문제를 정산하고, 혹은 부모와의 힘든 관계에 질문을 제기하지. 그러고 나면 늘 약간의 사랑이, 약간의 애정이 나타나 순수한 폭력 충동을 가라앉혀주곤 하고. 다 엉터리야! 삶이 뜻밖의 선물을 줬다고 해서 부모를 향한 어리석은 감상주의 속에 모든 걸 쏟아붓다니! 그런 추잡한 엉터리가 어디 있어! 난 계속 아버지를 증오할 거야. 절대 약해지지 않아. 아버지는 약해지지 않았어. 마지막까지 나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거든. 아버지가 보기에 난 사랑받을 자격이 없었어. 그게 가르침이었고, 나도 제대로 알아들었지. 만일 더는 아버지를 증오하지 않게 된다면 내 안에 아버지에 대해 뭐가 남겠어? 내 증오는 아버지가 남긴 심오한 유산이야. 난 증오심을 유산으로 상속받았고, 꼭 그 유산을 받을 자격이 있어야 해. 걱정 말아요, 우세누 쿠마흐. 앞으로도 오랫동안, 아버지, 내 증오를 기대해요.(151p)

 

 

나는 늘 인간들의 마지막 순간에 매혹을 느낀다. 한 인간의 삶을 총결산할 수 있는 건 그때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후회, 진지한 고백, 자기 자신을 향한 진실한 시선, 모두 그때가 되어야 가능해진다. 삶은 우리가 떠나려는 순간에야 비로소 우리 것이 된다.(199p)

 

 

엘리만이 어딜 가든 아산의 그림자와 추억이 따라다녔다. 엘리만은 아산의 추억이자 그림자였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엘리만이 영원히 아산을 떠올리게 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엘리만은 결코 자기 아버지를 떨쳐낼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결코 떨쳐내지 못한다. 영원히 그 이야기에 묶여 있다. 원하지 않는 아기를 한밤중에 내다 버리듯이 그렇게 버릴 수 없다. 우리는 그 이야기와 싸운다. 계속 싸운다. 싸움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싸우고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쉼 없이 가리키고 이름 붙이는 것뿐이다. 그 이야기가 우리를 끌고 가려고 가면을 쓰고 다가오면 그 가면을 벗겨내야 한다. 내 말이 끔찍하게 들리느냐?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하려무나. 자식이 부모를 죽여도 혹은 잊어도 영원히 부모의 그림자가 따라다닌다는 말이 끔찍해 보일 수도 있겠지. 그럴 거다. 하지만 시가, 너는 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넌 알 수밖에 없지. 네가 생각과 욕망 속에서 아무리 날 죽였어도, 앞으로 네가 쓰게 될 책 속에서 나를 아무리 죽여도ㅡ넌 내 예감을 밎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난 보았다. 넌 책을 쓰고 그 책 속에서 말들로 나를 죽이게 된다ㅡ난 여전히 있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뿐이다. 난 네 몸에 박힌 가시다. 날 뽑아내면 넌 죽는다. 나는 죽은 뒤에도 계속 있다.(201-202p)

 

 

사람들이 자꾸 잊어버리지만, 아이들에게도 우수가 있다. 장점일 수도 단점일 수도 있지. 아무튼 아이들은 그 우수를 좀 더 강하게 겪는다. 어릴 때는 그 어떤 것도 반만 겪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전력을 다해 아직 여린 영혼의 모든 문으로 들어오고 아이의 나이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밀어붙인다. 그러다 들어올 때 못지 않게 거칠게 나가버린다. 가르침은 그런 뒤에야 오지. 그렇게 아이는 이해하고 도망치고 문을 닫아걸고 아닌 척하고 계책을 사용하고 좀 더 일찍 상처에서 회복되는 법을 배운다. 아니면 죽는 법을 배우지. 시간은 분명 가르침을 주지만, 시간을 배우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203p)

 

 

지금이라고 뭐가 달라? 지금은 뭐 문학에 대해 말하고 미학적 가치에 대해 말해? 그냥 사람들에 대해, 피부색이 얼마나 짙은가에 대해, 목소리가 어떻고 몇 살이고 헤어스타일이 어떤지에 대해, 어떤 개를 기르는지, 키우는 고양이의 털이 어떤지, 집을 어떻게 장식했는지, 어떤 색 양복을 입는지 그런 얘기만 하잖아. 글쓰기와 신상 중에, 문체와 문체를 가질 필요 없는 미디어 화면 중에, 문학 창작과 인물에 대한 선정적 이야기 중에 어떤 얘기를 하지?

W.는 이런저런 문학상을 받은 혹은 이런저런 협회에 들어간 최초의 흑인 소설가다. 그의 책을 읽어보라. 보나마나 뛰어날 테니.

X.는 포괄적 글쓰기로 이루어진 책을 출간한 첫 레즈비언 작가이다. 우리 시대의 혁명적인 글이다.

Y.는 목요일에는 무신론자 양성애자고, 금요일에는 회교를 믿는 시스젠더이다. 그가 쓴 이야기는 경이롭고 감동적이며 전적인 실화다!

Z.는 자기 어머니를 능욕한 뒤에 살해한 여자다. 아버지가 면회 오면 면회실 탁자 아래로 손을 뻗어 아버지의 성기를 어루만진다. 세상에 주먹질을 날리는 책을 썼다. 이 모든 것, 격상되고 대우받는 이런 하찮은 것들 탓에 우리는 죽는 거야. 모두. 기자들, 비평가들, 독자들, 편집자들, 작가들, 사회ㅡ모두.

지금이라면 엘리만이 어떻게 할까? 모두 죽일 거야. 그런 뒤에 자기도 죽겠지. 한 번 더 말할게. 이 모든 건 전부 코미디야. 더없이 침울한 코미디.(356-357p)

 

 

하지만 영원히 그대로인 사람은 없다. 그대로인 게 꼭 좋은 걸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자신은 굳은 뼈처럼 늘 단단할 수 있다는 믿음은 환상일 뿐이다. 그런 맹목적인 믿음은 삶의 조롱을 받아도 할 수 없다. 삶은, 예측할 수 없는 그 움직임과 불확실성과 상황들은 우리가 절대 바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주장해온 가치와 원칙을 부수곤 한다.

어린 시절의 초심을 잃지 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헛된 혹은 가장 해로운 야심이다. 난 누구에게도 그런 조언을 할 생각이 없다. 어린 시절의 우리는 어른이 된 자신의 모습을 향해, 설령 그 어른이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어냈다 해도 언제나 실망한 잔인한 눈길을 던진다. 그렇다고 어른이 된다는 게 본질적으로 저주받았다는 혹은 가짜라는 말은 아니다. 단지 세상 그 어떤 것도 천진난만함 속에서 강렬하게 체험된 유년기의 이상 혹은 꿈에 부응할 수 없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언제나 우리의 온화했던 유년기에 대한 배신이고, 하지만 바로 그것이 유년기가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이다. 유년기는 배신당하기 위해 존재하고 바로 그 배신으로부터 그리움이 태어난다. 그런 그리움은 우리에게 언젠가, 아마도 삶의 마지막에, 젊음의 순수함을 되찾을 힘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이다.(425-426p)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그 사람의 비밀을 아는 게 중요한 일일까? 우리는 오히려 그가 우리의 호기심이 닿지 못하도록 꽁꽁 숨겨둔 바로 그것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닐까? 우리를 그와 이어주는 것이 그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되는 그것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

하지만 그런 느낌이 오래가지 않았어. 엘리만이 자기만의 은밀한 삶의 비밀 속으로 들어가고 나면, 마음속에 솟아나는 의혹들이 다시 나를 갉아먹었어. 그리고 곰브로비치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다시 울려 퍼졌지. 다른 게 더 있다····

나는 더 이상 의혹을 감내할 수 없었어. 그 의혹이 나와 엘리만의 관계를 망쳐버리는 것 같았거든. 난 엘리만이 자기 주위에 그어놓은 불의 원을 경탄하면서 동시에 증오했어. 결국 그가 나흘간 우루과이에 다녀온 날 저녁에, 선을 넘어 들어가 불길 앞에 서고 말았지.(440p)

 

 

그리고 죽음이 자기 일을 시작했어. 어머니의 비명도 시작되었고. 너무도 거칠고 비인간적인 그 비명이 내 머릿속에서 너무 세게 울리는 바람에 난 기절하고 말았지. 깨어보니 어머니의 절규는 끝났지만 여전히 내 귓속에서는 그 절규가 터져나왔어. 그 순간 나는 깨달았지. 이 소리가 영원히 나를 괴롭히겠구나. 이 고통을 조금이라도 달랠 방법은 오로지 내 머릿속에 더 큰 소리를, 더 심한 광기의 소리들을 담는 것뿐이겠구나.(490-491p)

 

 

하지만 침묵한다는 게 보 여주기를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야. 우리 일은 자기 자신을 치유하기, 다른 사람을 돌봐주거나 위로하기, 안심시키기 혹은 가르치기 같은 게 아니고, 성스러운 상처 속에 똑바로 서서 말없이 보여주기야. 나에게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의 의미는 바로 그거였어. 내가 보기에 다른 건 다 실패했어.

엘리만이 원한 게 일종의 마지막 책을 쓰려는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실패야. 이 세상에는 마지막 책들이 얼마든지 있거든. 모든 위대한 글들은 세상이 남길 있는 묘비명들이지. 역사의 마지막 책은 늘 다음번 책이야. 이미 길고 오랜 과거를 지닌, 나오는 순간 늙어버리는 책.

혹은 엘리만이 모방의 창조적 에너지를 보여주려 했을까? 그 역시 실패야. 그의 시도는 화려하고 박식하지만 결국은 헛된 것들을, 처량하게 헛된 것을 만들어낸 기교일 뿐이야.

앞선 시대의 문학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던 걸까? 그저 그래. 결국 길게 참조했을 뿐인데 형편없는 표절 취급을 당했잖아. 아무것도 빌려오지 않아도 이미 부자였다는 걸 알아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하지만, 파이. 이 모든 환멸은 우리에게 한 가지 가르침을 줘. 결국 엘리만은 누구였지? 지난 몇 주의 네 조사가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난 한 가지 가능한 대답을 알 것 같아. 엘리만은 우리가 되지 말아야 했던, 천천히 되어가고 있는 바로 그것이었어. 우리가 들을 줄 몰랐던, 우리에게 우리 아프리카 작가들에게 건네는 경고였다고. 그래,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너희만의 전통을 만들어내. 너희의 문학사를 세워. 너희만의 형태를 발견하고 그 형태들을 너희의 공간에서 느껴봐. 너희의 깊은 상상력을 살찌워. 그리고 너희의 땅, 너희가 스스로를 위해 존재할 수 있고 또 다른 이들을 위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땅을 가져. 결국 엘리만은 누구였을까?

(...)

엘리만은 익명으로 끝났고 사라졌고 지워졌어. 너도 알다시피 식민지화는 피식민자들에게 황폐와 죽음과 혼돈을 심어. 하지만 그보다 더 심한건ㅡ식민지화가 이루는 가장 악마적인 성공은ㅡ바로 자신들을 파괴하는 바로 그것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심는 거야. 엘리만이 그랬어. 소외의 슬픔이지.(495-496p)

 

 

너는 내 말에 동의하지 않으리라는 거 알아. 너는 언제나 문화적 모호성이 우리의 진정한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우리는 그 자리에서 비극을 받아들이고 문화적 사생아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고. 그래, 다른 역사들을 죽이는 역사가 우리의 역사를 범했고 그 강간에서 우리가 태어났으니, 더할 나위 없는 사생아이기는 하지. 단지, 난 네가 모호성이라고 부르는 게 지금 진행 중인 우리의 파괴를 가리는 술책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을 해. 너는 내가 변했다고 생각하겠지. 전에는 어디서 쓰느냐가 작가의 가치를 만들지 않는다고, 작가는 써야 할 말만 있다면 어디서든 보편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으니까. 여전히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또, 우리가 해야 할 말을 찾아내는 건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어디서나 쓸 수 있지만, 진정으로 써야 하는 것을 알고 이해하는 게 어디서나 가능하진 않아.(498-499p)

 

 

 

ㅡ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中, 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