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국외소설

ㅡ 나쓰메 소세키, <행인> 中, 현암사

mediokrity 2024. 8. 13. 20:40

2024/8/10

 

오랜만에 소세키의 책 한 권을 읽었다. 초반에 예상했던 것ㅡ화자와 형수의 관계ㅡ과는 중후반부를 다르게 가길래 조금 의아했다고 할까. 한 번 더 읽는다면 철저히 화자의 형 입장에서 읽어봐도 좋겠다. 아무래도 100년 전 즈음의 작품이다보니 인물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이 지금에 비해 답답한 것 같다가도 한편으론 인간의 심리는 과거나 지금이나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후반부 형 친구의 편지를 보고 '마음', 화자의 친구가 위장병으로 병원에 입원한 것에서는 '명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을 보고는 '문', 화자 캐릭터는 '산시로', 심리를 알 것 같기도 잘 모르겠기도 한 여성 캐릭터를 보면서는 '한 눈 팔기', ' 그 후' 등 지금까지 읽었던 소세키 작품의 여러 면을 한 작품에서 모아서 들여다보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소설 속 배경이 되는 장소는 아니지만 일본 삿포로 여행 중 읽었던 책이라 더 기억에 남을 것 같기도 하다. 

별 일이 없으면 다음에 읽을 소설은 진짜 여러 번, 여러 이유로 읽다가 포기했던 소세키의 미완성 유작 '명암'.

 

 

 

 

“괜찮아 보이던데.”

나는 이런 말 외에 대답할 말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대답한 후에는 아주 무책임한 듯한 기분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무책임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결혼에 관계된 많은 사람들의 경험일 거라는 생각도 했다.(36p)

 

 

미사와는 꽤나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그의 고집에 동조하자면 그의 건강이 여행을 견딜 수 있게 될 때까지 나는 이 도시의 푹푹 찌는 더위를 견뎌야 한다.

(...)

나는 그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그의 고집뿐 아니라 그의 이기적인 성향까지 충분히 간파했다. 동시에 하루라도 빨리 환자를 내버려두고 떠나려는 자신의 이기적인 성향 역시 눈에 비쳤다.(50p)

 

 

나는 그날 기분 좋게 미사와와 헤어져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서는 기분 좋게 헤어지기 전의 불쾌함도 생각났다. 나는 그에게 퇴원하라고 권했고 그는 내게 언제까지 오사카에 있을 거냐고 물었다. 우리 사이에서 표면에 드러난 말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미사와도 나도 거기에서 이상하게 씁쓸한 의미를 느꼈다.

'그 여자'에 대한 내 흥미는 사그라졌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미사와와 '그 여자'가 친해지도록 놔두고 싶지 않았다. 미사와도 그 아름다운 간호사를 어떻게 할 생각도 없으면서 나만 점점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태연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우리가 깨닫지 못한 암투가 있었다. 거기에 인간의 타고난 이기심과 질투가 있었다. 거기에 조화로도 충돌로도 발전할 수 없는, 중심을 결여한 흥미가 있었다. 요컨대 거기에는 성(性)의 다툼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양쪽 다 그것을 노골적으로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걸으면서 내 비겁함을 부끄러워했다. 동시에 미사와의 비겁함을 미워했다. 하지만 비열한 인간인 이상 앞으로 몇 년을 교제한다고 해도 도저히 그 비겁함을 없앨 수는 없으리라는 자각이 있었다. 나는 그때 굉장히 불안해졌다. 또 슬퍼졌다.(76p)

 

 

형은 학자였다. 또 식견이 높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시인다운 순수한 기질을 갖고 태어난 미남이었다. 하지만 장남인 만큼 어딘가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 보통의 장남보다도 훨씬 오냐오냐 키웠다고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나뿐 아니라 어머니나 형수에게도 기분이 좋을 때는 엄청나게 잘하지만 일단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하면 며칠이고 언짢은 얼굴로 일부러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남 앞에 나서면 또 사람이 확 바뀐 것처럼 웬만한 일에도 좀처럼 신사의 태도를 무너뜨리지 않는 원만하고 좋은 반려자였다. 그러므로 그의 친구들은 모두 그를 온화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그런 평판을 들을 때마다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104p)

 

 

나는 경험이 많은 연장자로부터 일찍이 여자의 눈물에 다이아몬드는 거의 없고 대부분 모조품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과연 그런 거구나, 하고 감탄하며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말뿐인 지식에 지나지 않았다. 풋내기인 나는 형수의 눈물을 눈앞에서 보고 어쩐지 견딜 수 없이 애처로운 느낌이 들었다. 다른 경우라면 손을 잡고 같이 울어주고 싶었다.(165p)

 

 

형님은 바둑을 두는 것은 물론이고 뭘 하든 다 싫었다고 하네. 동시에 뭔가를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고 하네. 그 모순이 이미 형님에게는 고통이었다네. 형님은 바둑을 두기 시작하면 필시 바둑 같은 걸 두고 있을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이게 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네. 하지만 또 두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된 거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바둑판 앞에 앉았던 거라네. 그런데 바둑판 앞에 앉자마자 초조해졌네. 나중에는 바둑판 위에 어지럽게 놓인 검은 돌과 흰 돌이 자신의 뇌를 괴롭히기 위해 일부러 붙었다 떨어졌다, 끊어졌다 하는 괴물처럼 생각되었다고 하네. 형님은 하마터면 바둑판을 엉망진창으로 마구 휘저어 그 요물을 쫓을 뻔했다고 했네.

(...)

형님은 책을 읽어도, 사색을 해도, 밥을 먹어도, 산보를 해도 스물네 시간 뭘 해도 거기에 안주할 수 없었다고 하네. 뭘 해도 이런 걸 하고 있을 수 없다는 기분에 쫓기게 된다고 하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의 목적이 되지 못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네"하고 형님은 말했네.

"목적이 아니어도 수단이라도 되면 되지 않은가?"하고 내가 말했네.

"그건 괜찮지. 어떤 목적이 있어야 수단이 정해지는 거니까"하고 형님이 대답했네.

형님이 괴로워하는 것은 그가 뭘해도 그게 목적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수단조차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네. 그냥 불안한 거지. 그러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거네. 형님은 차분히 누워 있을 수 없으니까 일어난다고 하네. 일어나면 그냥 일어나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까 걷는다고 하네. 걸으면 그냥 걷고 있을 수 없으니까 달린다고 하네. 이미 달리기 시작한 이상 어디까지 가도 멈출 수 없다고 하네. 멈출 수 없는 것뿐이라면 그래도 괜찮겠지만 시시각각 속력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네. 그 극단을 생각하면 두렵다고 하네. 식은 땀이 난 만큼 두렵다고 하네. 무서워서 견딜 수 없다고 하네.

 

 

 

ㅡ 나쓰메 소세키, <행인> 中, 현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