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그 외

ㅡ 김영하, <보다> 中, 문학동네

mediokrity 2016. 1. 26. 22:56

2016/1

 

여름 대목이 다가오면 대형서점의 여행서 매대는 전쟁터가 된다. 매대의 여행서들은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여름휴가를 집에서 보내는 것은 죄악이라고. 어떤 위험과 부담을 감수하고라도 여름휴가를 멋진 여행지들에서 보내라고. 인도양의 산호초, 뉴욕의 5번가, 프로방스의 작은 마을, 미얀마의 석불이 당신을 기다린다고.

언젠가부터 여행은 신성불가침의 종교 비슷한 것이 되어서 누구도 대놓고 저는 여행을 싫어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혹시 신입사원 모집 공고마다 나오는 해외여행에 결격사유가 없을 것이라는 문구의 영향일까?). 여행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쩐지 나약하고 게으른 겁쟁이처럼 보인다. 폰 쇤부르크처럼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더라면 우리 귀족들은 원래 여행을 안 좋아해라고 우아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건 우리 같은 평민들이 쓸 수 있는 레토릭이 아니다. (...) 새삼 당연한 얘기지만, 여행을 하고 안 하고는 단지 선택의 문제일 뿐이었고 지금도 그렇다.(57~58p)

 

성장은 끝나지 않는다. 모든 비극과 희극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배를 타고 고향을 떠나는 것, 술을 만들어 먹는 것만으로 온전한 성인이 될 수 있었다면 아마 문학과 연극, 영화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82p)

 

책값은 패스트패션의 가장 저렴한 옷값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싸다. 지난 십 년간 우리나라의 물가는 36퍼센트가 올랐는데 책값은 불과 18.5퍼센트밖에 오르지 않았다. 실제 가치로 본다면 책값은 십 년 사이에 더 떨어진 것이다. 종잇값도 오르고 인건비도 오르는 판에 책은 왜 더 싸지는 것일까. 스위스 명품 시계 회사 사장의 인터뷰에 힌트가 있다. 당신네 회사 시계는 왜 그렇게 비싸냐고 묻는 기자에게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필요가 없으니까요.”

의아해하는 기자에게 이렇게 부연했다.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은 값이 떨어집니다. 많은 회사들이 뛰어들어 서로 경쟁하며 값싸게 생산할 방법을 결국 찾아내거든요. 저희가 만드는 시계는 사람들에게 필수품이 아닙니다. 그러니 값이 떨어지지 않습니다.”(160p)

 

 

 

김영하, <보다> ,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