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그 외

ㅡ 안담, <친구의 표정> 中, 위즈덤하우스

mediokrity 2024. 9. 12. 11:23

2024/9/12

 

 

몽테뉴의 에세를 들여다봐야겠다.

 

 

 

몽테뉴에게 자연스럽다는 건, 솔직하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바로 나'를 알아보는 일, 그토록 까다로운 작업을 몽테뉴는 어떻게 해낸 걸까?

내가 운영하는 글방의 합평 시간에도 '솔직하다'는 좋은 에세이를 칭찬하는 표현으로써 빈번하게 등장한다. 여러 용례를 관찰한 바 '솔직하다'에는 다양한 함의가 있다. 사회적으로 지탄받거나 삼가야 한다고 여겨지는 행동, 신념, 욕망 따위를 드러냈다는 의미일 때도 있고, 일반적으로는 좋아할 만한 대상을 싫다고 했거나 일반적으로 싫어할 만한 대상을 좋다고 했다는 의미일 때도 있다. 그도 아니면 그냥 섹스 얘기를 자주 하신다는 말의 완곡한 표현일 수도 있다.

'솔직하다'는 표현이 가장 흥미로울 때는 작가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적었음이 느껴진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경우다. 이 말은 정말 묘한데, 왜냐하면 타인으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분명 좋은 글에는 독자가 작가의 '있는 그대로'를 만나는 대목, 너무나 생생하고 구체적인 나머지 이야기가 작가의 현실을 넘어 독자의 현실이 되어버리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대목이 작가로서는 가장 '있는 그대로' 쓰지 않기 위해 저항한 흔적이라는 고약한 주장도 해봄 직하다. 우리는 경험을 스스로 인식하는 단계에서조차 진부한 틀을 적용한다. 제아무리 독특한 고난이 찾아온다 한들, 그 경험을 '산전, 수전, 공중전을 다 겪었다'는 수사를 통해 감각하는 게 정확하다고 믿는 상투적 자아를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편안하고 익숙한 방향으로 굳어 있는 경험을 진실에 가까울 때까지 구부리는 게 작가의 주된 업무라면, 에세이를 쓰려는 사람에게 '솔직하게 쓰라'는 조언이 알려주는 것은 거의 없다.

대신 '솔직하다'의 용례들은 에세이 읽기에 관한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알려준다. 에세이를 읽는 독자는 이렇게 전제한다. 에세이란 작가가 실제로 경험한 일을 적는 글이다. 에세이의 서술자는 작가의 일상적 자아와 일치한다.

이런 전제는 에세이스트들을 아주 곤란하게 한다.

에세이의 서술자인 '나'는 과연 지금 책상에 앉아 있는 '나'와 일치하는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것이 버지니아 울프의 대답이다.

 

자아란 문학에서 본질적이면서도 가장 위험한 적수이다. 결코 자기 자신이 되지 않되 항상 자기 자신이라야 한다는 것이 문제이다.(182-184p)

 

 

어떤 머리는 딸의 이름으로 아버지를 죽이자고 말하고, 어떤 머리는 우리들 딸의 과업이란 게 아버지는 죽이는 것밖에는 없느냐고 말한다. 어떤 머리는 남자의 펜과 이성을 갈취하여 자매들에게 쥐여주고, 어떤 머리는 마녀의 피와 광기를 보전했다가 귀신과 짐승에게 잉크로 준다. 어떤 머리는 분명하고 건조하게 웅변하길 좋아하는가 하면 어떤 머리는 사유를 뒤집고 접고 꺾어 소문으로도 못 쓸 말을 중얼거린다. 한 여자는 어느 저녁 농담의 기능이란 공동체 내부의 문법을 공고히 하고 착취를 은폐하는 것일 뿐이라고,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우스워지지 말고 있는 힘껏 진지해지자고 말한다. 여자는 같은 날 새벽에 일어나 우리 같은 존재들은 농담을, 유머를 잃는 순간 끝장나는 거라고,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다 바쳐 우스워지자고 오직 우리만이 우리를 웃음거리로 만들자고 말한다. 하나도 안 야했어, 그런 말에 안도하는 가슴이 있고, 야해 너도 야해, 그런 말에 비로소 불을 켜보는 등도 있다.

(...)

그러므로 나는 대개 지쳐 있다. 웬만하면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아무것도 쓰지 않기를 원한다. 되도록 입을 다물고 싶다. 참다 못해 말을 하게 된다면 그 중 어느 것도 기록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더 좋은 말이 나타날 테니까.

(...)

이론과 사상의 층위를 떠나도 분열은 여전하다. 나와 지극한 편애를 주고받는 여러 우정 공동체의 모습 또한 제각각이다. 운동화 끈을 탄탄하게 묶고 늘 어딘가로 사뿐히 뛰어가는, 유리병을 소독해서 토마토 절임을 만들고 그걸 내게도 한 병씩 선물하는 애들이 있다. 반대로 씻어러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누워 있는 애들도 있다.

(...)

복싱 선수가 줄넘기 하듯 글 쓰기는 애도 있고 환자가 토하듯 글 쓰는 애도 있다. 그들은 한 명이고 또 만 명이다.(192-195p)

 

 

그러므로 윤리적 삶을 산다는 것은 몸이 가벼워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타인과 상호의존관계를 맺는데서 오는 온갖 지리멸렬함, 가령 비굴함이나 빚을 졌다는 느낌, 홀로 서는 데에 실패했다는 이 모든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한 결백의 상태에 놓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윤리적 삶을 산다는 것은 도리어 그 지리멸렬의 소용돌이로 기꺼이 뛰어드는 일, 타인과 나를 잇는 끈을 더 촘촘하게 인지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용기를 내어, 혼자서 말끔한 비건이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 아무것도 혼자서는 못 하는 사람이기를 자처하고 싶다. 어떤 깨끗함과 홀가분하다는 느낌을 '잘' 살고 있음의 징표로 간주하는 일을 멈추어야만 보이기 시작하는 관계들, 마치 빠르게 저은 낫또를 한 스푼 떠올릴 때 생겨나는 끈적하고 무수한 실타래와 같은, 존재들 사이에서 찰랑이는 섬세하고 연약하며 복잡한 냄새가 나는 관계들을 더 많이 감각하고 싶다. 그 일은 충분히 마르지 않은 몸을 가지고도 충분히 잘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진다.(232-233p)

 

 

 

ㅡ 안담, <친구의 표정> 中, 위즈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