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강보원, <에세이의 준비> 中, 민음사
2024/11/1
이 책을 통해 궁금해 진 책은 존 케이지의 '사일런스',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 일레인 스캐리의 '고통 받는 몸'. 그 중 존 케이지 책이 제일 궁금함.
예전에 현대소설강독 수업을 들었을 때가 기억난다. 에세이는 아니고 소설가에 대한 얘기였지만, 소설가에게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강렬한 원체험 같은 것이 있는데, 그 자전적인 요소를 너무 성급하게 소설로 써버리면 이제 다음 소설을 써 나가기가 난망하다는 것이었다. 교수님은 그것을 '씨암탉 잡기'에 비유했다. 크게 대접해 보겠다고 집에 하나 있는 씨암탉을 잡고 나면 더 이상 대접할 게 남아 있질 않는 것이다.(15p)
쓸 것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써야 한다. 그런데 왜 쓰고 있는 거지?
이 '왜'라는 질문이 늘 골칫거리다. 누군가는 돈 때문이라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즐거움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단 나는 돈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는 아직 그 단계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고 싶긴 하다······) 글쓰기가 전혀 돈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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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즐거움 때문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고통과 불안, 초조함, 답답함, 민망함과 절망, 기타 등등을 섞은 이 감정이 마냥 즐거움인 것 같지만은 않다.
최근에는 더욱 글쓰기의 즐거움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돈이나 문학적 명성, 권위 등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며, 글쓰기라는 활동이 주는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즐거움이라는 것을 별로 믿지 않는다. 물론 나도 글쓰기를 비롯한 이런저런 일들에서 때때로 즐거움을 느끼며 그럴 때 매우 기쁘고 만족스럽다. 내가 의심하는 것은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즐거움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즐거움 때문에 한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내적인 충만함, 즉 외부의 간섭 없이 주체적으로 시작되며 동시에 그것 자체만으로 만족스러운 어떤 활동이라는 환상이 필요하기 때문일 때가 많다.
'스스로의 즐거움이 가장 큰 동력이어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어떤 활동을 하는 사람을 북돋아 주는 말이라기보다 순수한 즐거움을 동력으로 삼지 못하는 주체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말일 가능성이 높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는 익숙한 호통과도 닮아 있다. 그런데 왜 하지 말라는 것일까? 사람들은 때때로 하기 싫은 것을 하고 싶어 한다. 더 단순히는 하기 싫어서 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때때로 우리는 괴로움을 원하며 그것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다.
동시에 그런 말은 행위에 내재한 어떤 근본적인 이유 없음을 은폐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유라는 건 뭔가를 하지 않으려고 할 때 필요한 것이다. 뭔가를 하는 데에는 큰 이유가 필요하지 않고 사실 이유가 거의 혹은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글을 쓰는 사람한테 왜 이런저런 종류의 글을 쓰냐고 물어보면 이런저런 이유들을 열심히 떠올려 보고 짜맞춰 보지만 잘 맞아떨어지지가 않고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글을 쓰지 않는 사람에게는 항상 완벽한 이유들이 있다. 그 이유들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언제나 맞아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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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어떤 경로로 글쓰기의 의무가 찾아오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느 순간 글을 쓰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글쓰기라는 의무를 부여하며, 그 이후로는 의무에 충실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선택이 남아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무의 특성은 그것이 나에 의해 부과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단 부과되고 난 후에는 나의 타자가 되어 나의 바깥에서 나를 강제한다는 점에 있다. 그것이 나의 바깥에 있기에, 나는 내가 왜 그러한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의무는 여타의 이유 없이도 글쓰기라는 행위를 지속할 수 있게 해 준다. 푸코는 글쓰기의 즐거움이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질문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는 다만 글쓰기란 그것이 존재하는지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글쓰기의 동기가 자신의 즐거움이나 괴로움, 기쁨, 슬픔 등의 감정과 무관한 층위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27-31p)
재능이란 질리기의 능력이다. 질린다는 건 아주 중요한데, 왜냐면 사람은 질리지 않으면 절대 다른 것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뭔가를 패배 때문에 그만둔다는 건 낭설이다. 나는 패배 때문에 그만두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질리지만 않으면 아무리 많이 져도 그것을 계속한다. 때문에 빨리 질리는 것만이 다른 것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천재들은 뭔가를 해 보기도 전에 벌써 질려 한다. 벌써 재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재미있는 부분으로 곧장 진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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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노력은 무엇인가? 극장에 가는 걸 싫어한다는 정지돈에게 금정연은 묻는다. “싫어하는 것치고 극장에 너무 자주 가는 거 아니에요?” 그러자 정지돈은 이렇게 대답한다. “정연 씨,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사는 사람은 없어요.” 이게 노력이다. 하기 싫어도 하는 것.(41-42p)
나는 모든 글쓰기가 그 자체로 소중하며 가치 있다는 식의 말이 그다지 사실에 가깝지 않고 별로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글쓰기는 그 반대의 사실에 접근해 가는 과정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존 케이지는 연주자들에게 자유를 부여한 자신의 작업이 종종 형편없이 연주되는 것을 듣는다고 이야기한다. 자유롭게 하면 되는 것인데 거기에 어떻게 좋고 나쁨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아무렇게나 한다는 것은 결국 신중하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만약 연주가 잘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연주자들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익숙한 취향이나 기억에 의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49p)
사실 예전에 나는 꼰대와 호구라는 주제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당시 내게는 사람들이 가장 되기 싫어하는 두 개가 꼰대와 호구인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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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 바뀌어서 요즘에는 자신을 꼰대라고 부르는 것이 어느 정도는 스스럼없는 분위기도 생겨난 것 같다. 물론 자신을 ‘젊은 꼰대’라고 부르는 경우는 대부분 좋지 않다. 어떤 사람이 사십 대인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영 포티’에는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기에는 말하자면 체리피킹을 하려는 얄미운 셈속 같은 것이 느껴진다. 어쨌든 내가 꼰대와 호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꼭 남들과 다른 방향을 무조건적으로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다. 거기에는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꼰대의 좋은 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감각이 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다.
·····장점이 두 개면 충분히 많은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정말 만족을 모른다. 정말이지, 이래서 세상이·····
하지만 장점이 두 개뿐이라도 꼰대적인 것은 글쓰기에 필수저인 어떤 측면을 가지고 있다. 사실 많은 작가들이, 아니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꼰대였다.(106-107p)
그것이 우리가 또한 호구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일단 여기에는 늘 그렇듯 실용적인 장점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호구가 되기 너무 싫어하는 나머지, 호구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피해마저도 감수하려 한다.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기꺼이 감수하는 피해의 양은 가끔 보면 기가 질릴 정도이다. 내 생각에는 그냥 호구가 되는 것이 낫다·····
그리고 그건 전혀 나쁜 일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호구의 사례를 참조해 보자.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내놓으라고 한 사람, 그러니까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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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말을 하면 지금은 시대가 훨씬 삭막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럴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말하자면 예전에는 한쪽 뺨을 맞았을 때 다른 쪽 뺨을 내놓으면 상대가 거기서 더 때리지 않을 정도의 도리라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 존재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그러니까 어떤 좋은 것이 예전에는 가능했지만 이제는 가능하지 않으므로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변명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존재해 왔던 사람의 유형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다른쪽 뺨을 내놓으라고 했을 때도 이미 그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그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향해 말을 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때도 사람들은 그렇게 착하지 않았다. 착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으면 애당초 예수님이 그렇게 죽지 않았겠지····· 그렇지 않나?
구체적으로 호구의 덕목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는 우선 수용하는 사람(자신의 뜻을 현실로 관철할 힘이 없음)이다. 그리고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귀가 얇고 잘 속아 넘어감)이며, 용서하는 사람(복수를 할 역량이 결여되어 있음)이다····· 물론 조금 그렇다. 딱 보기에 별로 좋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원치 않게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좋은 일 아닐까?(111-112p)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에는(한국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단지 내가 외국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뭘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심지어 뭘 하는 방법을 알아보려고 유튜브를 찾아봐도 태반이 하지 말라는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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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는 출판을 전제로 쓴 일기가 언제나 보기 흉한 나르시시즘으로 빠질 수밖에 없으니 하지 말라는 요지의 글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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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 있고 거기엔 아무 문제도 없다. 출판을 의식하며 쓴 일기에는 실제로 위와 같은 단점이 어느 정도는 있을 것이다. 물론 꼭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하더라도 타자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문제 제기도 가능하겠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 이전의 문제이다. 말하자면 글을 쓰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싫어하는 것에 아주 거창한 이유를 붙이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 같다. 마치 내가 무엇을 싫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윤리적이거나 미학적인 근거가 있어야 하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내가 무엇을 싫어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윤리적이거나 미학적인 근거가 있다고 말하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이러저러해서 난 별로던데'라고 쓰는 경우는 별로 없다. 언제나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심각하고 중대하며 근본적인 문제가 숨겨져 있다. 하지만 정말 늘 그런 것일까? 일레인 스캐리는 한 글에서 예술가들이 괴로움을 표현하는 일에 대한 경계를 표현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것이 보다 일반적으로 글을 쓰는 이들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캐리는 이렇게 썼다.
예술가들이 성공적으로 괴로움을 표현한 탓에 예술가 집단이 가장 진정으로 고통받는 사람들로 여겨지고, 그래서 도움이 절박하게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서 의도치 않게 관심을 빼앗을 위험이 있음을 창작자는 인지해야 한다.(125-127p)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세상에는 사소한 일들도 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들ㅡ그중에서도 특히 비평가라고 불리는 이들ㅡ에게 사소한 것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내가 겪었던 일이기도 한데, 예전에는 누군가가 무슨 글이나 생각을 옹호하면 곧바로 그 사람을 아우슈비츠의 옹호자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거대한 비평적 미끄럼틀 같은 것이 있었다. 잘 세워진 도미노처럼 작은 블록 하나를 건드리면 그것이 다른 블록들을 무너뜨리면서 곧장 대학살의 현장으로까지 향하는 것이다. 이 도미노는 완벽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어서 결코 도중에 멈추는 법이 없다. 은유를 좋아한다고요? 은유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아시나요?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 그러한 작동 방식을 옹호하던 사람들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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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무엇이 정말 나쁜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구제할 수 없이 불의에 속할 것이 매우 확실한 몇몇 사례나 억압의 장치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면적이고 근본적으로 악을 단언할 만한 것이 얼마나 많을까? 미셸 푸코는 이 주제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해 온 사람 중 한 명이다.
나는 어떤 것은 '해방'의 층위에 속하고 또 어떤 것은 '억압'의 층위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강제수용소처럼 확신을 가지고 그것이 해방의 도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주어진 체계가 얼마나 공포를 부추기든 간에, 어떠한 저항도 사전에 막아 버리는 고문과 처형을 제외한다면, 언제나 저항과 불복종, 대항 세력화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ㅡ이는 일반적으로 간과되는데ㅡ고려해야만 합니다.(128-129p)
우리는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플로베르에게 이 자가당착은 다름 아닌 예술과 글쓰기가 시작되는 곳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결코 피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가 종종 사용하고는 하는 '내로남불'이라는 비난은 대부분 적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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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비난의 문제는 우리가 마치 자가당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준다는 데에 있다.
결국 모두가 똑같으니 누군가를 절대 비판해서는 안 된다거나, 혹은 손바닥 뒤집듯 그때그때 마음 편하게 말을 바꿔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나는 우리가 자가당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 달라지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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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맞다. 문제는 누가 태도를 바꾸고, 이전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혹은 자신이 하는 말과 들어맞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그런 일은 결국 누구에게나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무엇이 싫다고 하기 전에 내가 언젠가 그것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비판은 어딘가 다르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그것은 어쨌든 사태에 대해 조금 더 다각도로 생각하는 한 방법일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언제나 그 조금의 차이가 매우 중요하게 느껴진다.(133-135p)
어떤 작가가 작품집을 내고 나면 뭔가 다음 작품집에서는 다른 것을 보여 주기를 바라는 심리가 있다. 자신이 '이미 본 것'에는 더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심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의 경우 또한 고려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볼 때 그것이 달라지기를 바라면서 보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실제로는 보았던 것을 또 보고 싶어서 보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예컨대 부코스키의 새로운 책을 읽을 때 나는 그 사람이 뭔가 다른 걸 보여 주리라 생각하기보다는 저번 책에서 보여 줬던 걸 또 보여 주기를 바란다. 종종 도가의 일화를 인용하기 좋아하는 존 케이지는 이렇게 쓴다. "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무언가를 하다가 2분 후 지루해지면 4분을 더 시험해 보아라. 그래도 지루하다면 8분, 16분, 32분 등등으로 시간을 늘려라. 마침내 그것이 절대 지루하지 않으며 아주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는 꼭 감상의 영역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가 자신의 고유성을 주장하는 방식, 즉 우리가 스타일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반복과 관계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역시 한 벌의 옷만 입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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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체구가 아주 작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자들이 입는 옷을 입지 못한다. 평생 동안 그 난관, 그 문제와 싸웠다. 너무 작은 여자라는 사실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도록 옷이 절대 눈에 띄지 않게 할 것. 늘 똑같이 입어서 사람들이 나의 키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도록 할 것. 늘 똑같이 입어서 사람들이 나의 키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도록 할 것. 똑같이 입는 이유가 아니라 그냥 똑같이 입는다는 사실이 눈에 띄도록 할 것. 이제 나는 가방도 들지 않는다. 늘 같은 옷을 입고 다닌 뒤로 삶이 달라졌다.
종종 변화에 대한 압박감은 새로운 글을 쓰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뒤라스에게 스타일의 반복은 스타일 그 자체를 달라지게 하지는 않지만, 그것 외의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157-159p)
조금 이상한 말일 수 있지만, 나는 나와 관련된 것이라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위험한 것 같다. 그러한 생각은 자체로 권리라는 개념을 가리키고 있는데, 시몬 베유는 이 개념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에겐 권리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겐 그런 것을 표현할 단어들이 없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정의라는 단어로 만족을 했지요." 시몬 베유는 우리가 그리스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 지점에서는 나도 그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 중요한 건 오히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늘어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혹은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영역을 축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사례에 한정해서라면, 나는 작가가 자신의 텍스트에 대해서 그 정도의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작가가 텍스트를 써서 발표한 이상 어떤 통제 불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영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저작권이란 좋게 봐주더라도 편의상의 조치에 가깝지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일 수 없다. 더군다나 사후까지 자신의 텍스트가 자신이 생각했었던 방식으로만 유통될 수 있어야 한다는 발상은······ 아무래도 누군가의 작가적 세계라는 것이 그 정도로까지 중요한 것일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물론 이것이 어느 정도는 이상적이고 또 위험성도 있는 생각이라는 것은 나도 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통제해야 할까?(175-177p)
그런데 통제를 하지 말라는 말이 꼭 무엇인가를 더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말,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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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은 반대에 가깝다.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경향성이며,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작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지면 가라앉는다.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물에 뜨게 만들어져 있는데도 말이다. 자유라는 말도 비슷한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해야만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들이야말로 거기서 거기이며 대개 비슷하고 진짜로 흥미롭지 않다. 우리는 종종 어딘가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문제는 대개 같은 곳으로 탈출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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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말씀드리지만 내가 폭력적이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일반적으로 평가라는 것은 꼭 자동차와 같죠. 차종을 선택할 수도, 나아갈 방향을 택할 수도 없어요. 제일 먼저 도착하는 걸 빼앗아 잡아타야 해요. 폭스바겐이면 폭스바겐을 타고, 택시면 택시를 타고 가는 거예요. 비행기가 도착하면 비행기를 타야 하죠. 중요한 것은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나에 대한 첫 평가는 말하자면 폭력적이라는 일련의 해프닝을 통해 이루어진 거예요. 그건 오해죠. 하지만 차가 없다면, 먼저 오는 차를 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만약 백남준이 자신의 작업이 오해받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그는 계속 기다려야 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 상태로 영영 움직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즉 오해 가능성이란 이동 가능성이기도 하다ㅡ우리는 오해 가능성으로부터 열린 공간 속에서만 움직인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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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고 싶은 건 오해가 진실과 대립하는 것이라기보다, 진실이 표현되는 특정한 형식 중 하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해는 가장 자주 오는 차이고 진실은 그 차를 잡아탄다ㅡ오해는 진실을 훼손한다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삶이 우리의 통제 바깥에 훨씬 많은 것처럼, 진실은 오해 속에 훨씬 더 많다.(183-185p)
ㅡ 강보원, <에세이의 준비> 中,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