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단요, <담장 너머 버베나> 中, 위즈덤하우스
2024/12/1
조금 간지럽긴 하더라. 작가가 소설 말고 다른 형태의 글도 좀 써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궁금하고 신기하다는 이유만으로 남의 사정을 알아내려는 태도가 당연해진다면 세상은 멈춰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남의 창문을 넘겨다보느라 바빠서. 혹은 남에게 창문을 들여다보일까 두려워서(82p)
사람들은 죽은 이가 한때 살아 있었음을 안다. 그 사람이 모범생이었다거나 직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거나 자식이 둘 있었다거나 하는 것도 안다. 절반가량은 그런 것조차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는 기억한다. 그러나 그런 사실들이 정확히 어떤 인상을 남겼는지는 떠올리지 못하고, 각각의 사실이 어떤 세부 사항으로 채워져 있는지도 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죽은 이를 잊는다는 것은 함께했던 시간을 툭 잘라내는 것과는 다르다. 그건 오히려 시간을 아주 빠르게 감아서 핵심만을 남기는 일에 가깝다. 부패한 시체가 뼈다귀로 변하듯이, 현존은 망각을 거쳐 이야기의 씨앗으로 변한다. 삶의 역동에 비하면 훨씬 간략하고 명쾌한 이야기로. 영웅의 업적은 교과서 한 단락으로 움츠러들고 위대한 제왕의 삶조차 두 페이지 분량으로 쭈그러들고 만다. 어떤 작가는 그걸 다시 수십만 자로 펼쳐내며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정말로 살아 숨 쉬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과거의 존재들이 살아 돌아오는 일은 없다. 여전히 이야기뿐이다.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언제고 사람을 매혹시킬 힘이 있을지라도 이웃을 건네는 아침 인사와 같은 행복을 전해주지는 못한다. 삶이 우리네 코앞에서 짖고 낑낑대는 (그리고 이따금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개라면, 이야기는 개가 있는 그림이다. 아주 멀리서 바라본 개, 오래전에 보았지만 지금은 소식을 몰라서 상상으로 그린 개, 추측과 기록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개,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상상된 개. 그림을 들여다보며 감탄할 수야 있지만 껴안을 방법이 없으므로, 우리의 삶에는 영영 맞붙지 못할 개(83-85p)
예전에 쓴 청소년 소설인 <다이브>에는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향해 "왜 슬퍼해? 기억해서 좋을 것도 없고 이미 지나간 일인데 잊어버리는 게 이득 아닌가?"라고 말하다가 주변인이게 핀잔을 듣는 소년이 나옵니다. 그건 제 목소리입니다.
성장기라는 단어 앞에서는, 어른들이 제게 '인간관게는 대차대조표가 아니며, 감정은 없애기로 마음먹는다고 해서 곧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를 알려주려 애쓰던 시간들이 떠오릅니다. 한편 이론가들을 통해 답을 얻으려 노력하던 것, 오랜 시간을 할애해 실천적인 노력을 기울이던 것도 기억납니다.(165-166p)
ㅡ 단요, <담장 너머 버베나> 中, 위즈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