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안희제, <증명과 변명> 中, 다다서재
2025/2/7
근 한 달 만이네? 뭘 하기가 너무 귀찮다.
중요한 것은 '무성애'라는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 자체보다도, 성적인 것을 중심에 두지 않는 수많은 실천과 관계의 양상들로서의 '무성애적인 것'이다. 이렇게 명사가 아닌 "형용사로서의 무성애"를 통해, 무성애자라는 '정체성'과 무관하게 섹스중심사회 속 수많은 실천들을 무성애적인 것으로 '오염'시키는 사유를 계속할 때 섹스를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강제하는 규범을 더욱 효과적으로 해체할 수 있다. 만약 우진에게 섹스가 아닌 수많은 다른 상호작용이 친밀성의 경로로 제공되었다면, 그러니까 그가 살아가는 곳이 섹스중심사회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여자-사랑-연애-섹스가 하나의 덩어리가 아닐 수 있다면, 연애 경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는 여성과의 진정한 친밀성을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무성애적인 것은 새로운 친밀성의 발견 혹은 발명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경로가 될 수 있다.(69-70p)
우리는 "늪에 빠졌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빈곤의 늪, 우울의 늪, 중독의 늪···. '늪'은 강력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한번 빠지면 빠져나오기 힘들고, 움직일수록 더 깊이 빠지는 늪의 특성은 우리가 겪는 어려움을 몸으로 와닿게 표현한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문제는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 구조에서 발생한다. 늪에 빠진다는 표현이 우연한 사고, 혹은 늪으로 걸어 들어간 개인의 잘못을 함축한다면, 이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방치된 결과인 사회적 문제에는 적합하지 않다.
"덫에 걸렸다"라는 표현이 여기서는 더 적합하다. 사냥꾼은 잡고자 하는 동물의 습성, 동선, 입맛 등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이에 따라 덫을 섬세하게 디자인한 뒤 사냥감이 걸려들때까지 기다린다. 덫은 사냥감이 자기 자신을 죽이도록 '설득한다.' 굶주린 사냥감이 허기를 채우고 싶다는 생존의 욕구를 자살이라는 행위로 연결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덫은 우연적이지도, 강압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설득적이다.
도시에서의 중독과 범죄, 건강 문제를 다루는 인류학자 탈리 지브는 형사 보호관찰 제도를 '덫'이라고 설명하면서, 덫의 양가성을 드러낸다. 거리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소모적이고, 절망적이며, 종종 위험한 물질적 조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형사 보호관찰 제도는 실제로 생명을 구하지만, 이러한 '구원'은 개인이 자신의 상황을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현실의 구조적 불평등을 부인해야만 얻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하나의 범죄를 둘러싼 역사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조건들은 모조리 개인의 범죄성으로 물신화된다. 단기적으로 생명을 구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형사 보호관찰 제도가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구원받은 이를 위험에 처하게 했던 바로 그 사회를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늪에 빠진 게 아니라 덫에 걸렸다. 우리를 죽이는 것이 동시에 우리를 살리고 있다.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덫의 작동 방식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256-257p)
문득 떠오른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힌다. 어떤 방식에서든, 우리가 미래라는 것을 너무 많이 말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어쩌면 미래라는 말이 생겼을 때 이미 시작된 현상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미래'는 왜 필요했을까? 시간이라는 관념이 하나의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형태로 이해되기 시작하고, 앞으로 '다가올' 혹은 우리가 '나아갈' 시간이 '미래'라는 이름을 얻었을 때, 거기에는 이미 어떤 종류의 의미가 붙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의 말들 속에서 미래가 언제나 밝거나 어두운 것이며, 어둡다는 판단조차 미래가 밝아야 한다고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떤 종류의 '발전'과 그 결과로 따라오는 '행복'에 대한 믿음이 미래에 투영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각각 한 명의 남성과 여성이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살아가는 데서 느끼는 행복, 그리고 이러한 결합을 통해 계속될 아름다운 미래. 무언가가 올 것이라고, 무언가가 와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미래라는 관념을 통해 약속과 기대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미래'는 어디까지나 '지금'존재하는 것이다.
미래는 현재로부터 출발한다. 미래를 위해 현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현재를 만들기 위해 어떤 미래가 계속해서 이야기되는 것이다. 미래에 엉겨 붙어 있는 의미들을 잠시 걷어내자. 행복한 미래든 불행한 미래든, 밝은 미래든 어두운 미래든. 그리고 현재를 보자.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자. 잡히는 듯하면 달아나버리는 행복의 약속 대신, 다가올 좋은 삶에 대한 애착이 주는 좋은 느낌을 통해 나를 죽이는 것을 계속 사랑하게 만드는 잔인한 낙관 대신, 나의 후손들이 살아갈 좋은 세상을 명분으로 현재를 희생시키는 미래 대신,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자.(266-267p)
한 마디만 더 붙이고 인사하겠습니다.
'남과 비교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제일 싫어합니다. 비교는 본능이며, 필요한 감각입니다.
남과 비교를 많이 하시고, 질투와 좌절로 끝내지 마세요.
남들과 비교하시면서, 단일한 기준으로 비교가 어려운 나만의 것을 만들어보세요.
그런다고 당장 행복해지는 건 아닙니다. 다만 1년 정도는 더 살아볼 마음이 생깁니다.
제 말이 맞을 겁니다.(288-289p)
ㅡ 안희제, <증명과 변명> 中, 다다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