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존 스튜어트, <쇠렌 키르케고르 입문> 中, 카리스아카데미
2025/4/29
단요 작가가 언급하기도 했고, 마침 호나스 트루에바의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를 봤던 참이라 영화 속에서 등장인물이 언급했던 키르케고르가 궁금하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는 키르케고르의 많은 저작 중 '반복'이라는 책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데 이 책은 키르케고르의 생애와 초기 저작인 '아이러니의 개념’을 중점적으로 풀어가기 때문에 궁금했던 '반복'에 대해서는 한 두 줄 정도만 언급하고 지나가서 크게 알아가는 게 없었다. 이 책은 그보다는 키르케고르가 긍정적인 무언가를 제시하여 끝맺지 않고 부정이라는 모순되고도 긴장된 상황에서 멈추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에서 어떻게 영감을 받았고 평생에 걸친 자신의 저작 활동에 어떻게 풀어냈는지를 살펴보는 책이다. 관건은 어떤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여 눈에서 치워버리고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겠지만 현실에서는 그럴 수가 없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한 것이며, 그런 생각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고 본인 스스로가 해야 한다는 것. 어렵지 않고 재밌었다.
부정의 개념은 단순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 전개를 위한 토대를 형성합니다. 그래서 헤겔은 소크라테스가 모순에서 비롯되는 긍정적 발전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에서 멈춘 것에 대해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키르케고르가 소크라테스에게 매료된 지점입니다. 그 그리스 철학자는 계속해서 긍정적인 것을 발전시키려고 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모순된 부정적인 것에 머물렀습니다. 키르케고르는 무엇보다도 마르텐센의 열성적인 학생들이 "더 멀리 가고 싶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소크라테스 보다 더 멀리 가고 싶다."라는 욕망에 대해 비판합니다. 이러한 비판은 헤겔의 이 지점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헤겔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부정을 통해 철학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는 잘못된 신념을 제거하여 철학이 기초부터 작동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 자신은 부정의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그는 변증법의 긍정적 차원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를 뛰어넘어 긍정적 요소를 공급하고 철학적 입장이나 이론을 구성하기 시작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에게 소크라테스의 핵심은 부정이었고, 그 너머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부조리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헤겔과 키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가 부정의 입장을 대표하는 것은 동의하지만, 이에 대한 규범적 평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75p)
키르케고르는 이 작품을 끝내지 못했고 중간에 중단되었을지라도, 이 기획은 명확히 요하네스가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명령을 따르기 위해 시도하다가 어떻게 절망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보여줄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노트에서 키르케고르는 그가 이루지 못한 작품에 대한 계획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하네스는 우리가 들었던 바를 행한다. 즉, 그는 실제로 모든 것을 의심한다. 그는 이것을 행하기 위해 모든 고통을 감수한다. ···그가 갈 수 있고 또 돌아가고 싶어 했던 그 방향으로 여기까지 왔을 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절망하고 있다. 그의 삶은 낭비되었다. 그는 이런 고찰을 하다가 모든 젊음의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삶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져다 주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철학의 과실이었다.
마르텐센은 무책임하게 학생들이 모든 것을 의심하도록 부추겼습니다. 모든 것은 종교, 가족 관계, 공동체 등과 같은 것들도 의심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에조차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소외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은 일종의 학문적 훈련으로 의도된 반면, 젊은 학생들이 기이것을 삶의 방식으로 심각하게 가져가서 자신의 신념을 약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이 지점에 도달하고 나면, 다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비판적 반성을 시작하고 나면, 더 이상 이전의 신념을 갖고 무비판적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지식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해 두려워하면서 이 지식을 의심스러워하는 관점입니다. 소크라테스의 경우처럼, 이 지식은 개인을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분리시킵니다. 키르케고르가 이 이야기에서 내리는 결론은 요하네스가 철학적 의심에 의해 무너졌고 결국 절망으로 끝났다는 것입니다.(101-102p)
이제 키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에 대한 다른 측면을 그가 남긴 귀중한 유산으로 언급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이후의 대립적인 고대 철학 학파를 많이 탄생시켰습니다. 키르케고르는 바로 여기에서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렇게도 많고 다양한 관점들이, 어떻게 이 한 사람의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다양하고 많은 이론을 갖고 있었더라면, 이런 다양한 이론이 이후의 다양한 철학적 학파의 관심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이와 반대로 주장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남긴 이런 이질적 유산이야말로 그가 순수한 부정성을 대표한다는 주장에 더 많은 근거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가 약간의 건설적인 명제를 갖고 긍정적 이론을 만들어 냈다면, 이것이 일부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일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역겨운 것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이가 가진 긍정적인 본질은 언제나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숫자만큼이나 제한적인 영향을 끼칠 뿐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가 긍정적인 이론을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이 바라던 것을 자신의 생각대로 자유롭게 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기존의 철학 학파들이 어떤 관점을 갖고 있었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소크라테스를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이죠. 소크라테스는 다양한 긍정적 이론을 갖고 있는 많은 철학 학파를 탄생시켰고 또 한편으로는 키르케고르가 헤겔과 의견을 동일시하며 "무한한 부정성"이라 부른 입장을 대표합니다.(105p)
하지만 이미 이전에 살폈듯이, 소크라테스가 성공적으로 보편적인 것을 결정하지 못했거나 긍정적인 것을 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헤겔은 소크라테스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의 생각에는, 철저하게 부정적이었다는 것이 명확히 소크라테스가 가진 핵심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목표는 무언가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키르케고르의 입장이 얼마나 반직관적인지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우리의 직접적인 본능은 그것을 해결하려 노력합니다. 개념의 문제가 있다면, 우리의 목표는 그것에 대해 정의내리는 것입니다. 문제가 풀리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거나 불확실한 상황이 되면 우리는 불편해집니다. 당연히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이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합니다.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는, 무언가를 해결하거나 구성하는 것이 반드시 개인에게 유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끔찍한 폐해가 될 수 있습니다. 해답을 제공함으로써 니힐리즘의 고통을 완화시키거나 의심을 치유한다면, 진리를 찾아야 하는 주관적인 책임을 개인에게서 박탈하는 것이 됩니다. 진리로 제시되고 구성된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것은 더 악화됩니다. 소피스트들이 소크라테스 시대에 행했던 것이고, 키르케고르가 살던 시대에는 성직자와 학자들이 행했던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키르케고르의 소크라테스는 부정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허무주의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맞습니다. 이것이 주체로 하여금 주관적으로 진지를 찾을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합니다. 키르케고르가 생각한 소크라테스와 낭만주의자의 핵심적인 차이는, 소크라테스는 낭만주의자들처럼 진리를 찾는 것을 중단하거나, 냉소적으로 진리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133-134p)
헤겔은 소크라테스를 오해하여 이후에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긍정적 역할로 소크라테스를 제시했던 것이죠. 그러나 문제의 진실은 소크라테스가 앞을 내다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뒤를 보았다는 데 있습니다. 이미 존재해 오던 개인과 제도에 비판적으로 대응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바로 멈춘 자리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그리스 문화와 사상에 대해서만 부정적으로 언급했지, 이후 시대에 구성되어야 할 긍정적인 것을 제시하거나 진리를 찾지 않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선의 개념을 찾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그 개념을 묻고 있었고, 아테네의 가치와 관점이 고찰된 답변이 주어졌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그는 그 모든 것들을 약화하였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이에 대해 헤겔의 의견에 동의하였으나, 키르케고르가 특별히 중점적으로 비판했던 부분은, 이런 선(the Good)은 영원히 찾아야 하고 그럼에도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키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를 정의하는 특징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런 아이러니가 순수하게 부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러니가 특별한 명제, 이론, 정의 등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그것들을 해체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아무것도 구성하지 않으며, 어떤 긍정적인 요소도 또한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어떤 긍정적인 결론을 내린 채 만족스럽게 남거나 혹은 멈추는 것을 못하게 함으로써, 결코 끝나지 않는 진리를 찾도록 촉진시킵니다.(138-139p)
소크라테스는 역사적으로 더 이상 실행가능하지 않은 특정한 믿음을 시험했고 또한 약화하였습니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비판하기 위해 아이러니를 사용했습니다. 그들의 비판은 무차별적이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사회를 파괴하는 동시에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개인을 미화하는 데 있었습니다. 어느 사회에든 비판할 가치가 있는 것들, 즉 부패, 족벌주의, 위선 등이 항상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회가, 항상 부패하고 족벌주의적이며 위선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낭만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항상 비판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고, 결국 합리적이고 건전한 것들도 비판하게 됩니다. 모든 차이는 낭만주의자들의 총체적인 비판에서 사라집니다. 이러한 무차별적인 비판은 결코 소크라테스가 관여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재판과정에서, 신탁을 따르는 것과 같은 아테네의 법과 전통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낭만주의자들은 더 깊은 진리를 찾기 위해 특정한 낡은 가치와 제도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자아 자체를 찬양하고 미화하기 위해서만 다른 모든 것들을 비판할 뿐입니다.
(...)
낭만주의자들은 자신에게 닥친 변덕이나 기분에 따라 끊임없이 그들이 과거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함으로써 이것을 새로운 단계로 가져갑니다. 그들에게는 객관적인 외부 현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원하는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을,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키르케고르는 낭만주의자들이 역사 자체, 즉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와 증거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대신에, 그들은 전설, 신화, 그리고 동화에 매료되었습니다.(152-153p)
미학자는 배제된 중간의 법칙(주어진 사물은 X이거나 X가 아니어야 한다는 법칙)을 활용하여 여러 가지 다른 공식을 도출하는데, 그중 일부는 터무니없어 보입니다. "결혼하면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든 하지 않든, 어느 쪽이든 후회할 것이다." 여기서 결혼하느냐, 결혼하지 않느냐의 이분법이 도입됩니다. 헤겔의 논리에 따르면 이러한 모순은 해결되거나 중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의 미학은 그 모순을 확고히 고수할 것을 주장합니다. 헤겔적 중재와 관련하여 그는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왜냐하면 진정한 영원은 둘 중 어느 쪽에도 있지 않고 그 앞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썼습니다. 다시 말해, 진실은 이분법이나 대립이 중재되고 해결될 때(양자택일과 함께)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편에 직면할 때 드러납니다. 이러한 개념적 수수께끼의 해결은 사고의 영역에서는 가능하지만, 삶에서는 달성할 수 없습니다.(182p)
키르케고르가 문제 삼는 것은 개인이 보편보다 우월한 경우가 있을 수 있으며, 국가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윤리적, 법적 규범이 중지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대부분 학자는 키르케고르가 아브라함이 아들을 희생한 행위가 시민적 관점에서는 용납될 수 없지만, 종교적 관점에서는 용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칭찬할 만하다고 말한 것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키르케고르의 메시지는 확고한 종교적 신념이 있거나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일을 하라고 계시받았을 때, 이는 윤리와 민법보다 우선하는 절대적인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그저 순종함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범죄자들이 자신을 변호할 때 신이 자신에게 그런 일을 하라고 명령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를 종종 듣습니다. 많은 테러리스트도 자신 행동이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 대부분은 이를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는 이유로 받아들이기 꺼려합니다. 키르케고르의 아브라함에 대한 분석은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할까요? 키르케고르가 오늘날 살아 있었다면 테러리스트의 행동을 위대한 경건 행위로 옹호했을까요?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키르케고르의 분석에는 그를 현대의 살인자나 테러리스트와 구분 짓는 중요한 요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키르케고르가 신앙의 모순적이고 불합리한 성격을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믿음은 전적으로 내면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직접 전달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아브라함은 침묵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현대의 살인자나 테러리스트는 자신 행동에 대한 종교적 동기를 방어의 논거로 사용하려 합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받았다거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는 생각을 자신 행동을 변호하는 데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키르케고르가 말했듯이 조용히 마음속으로 또는 내면으로 이것을 믿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전달하려 하는 순간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믿음은 객관적이거나 담론적이거나 하는 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키르케고르의 견해와 이유와 논증, 담론적 소통을 바탕으로 자신 행동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며 방어하려는 테러리스트의 견해 사이에 놓인 근본적 차이점입니다.
키르케고르의 아브라함 이야기는 또 다른 중요한 측면에서 테러리스트들의 주장과도 다릅니다. 테러리스트들은 기존의 정치 질서가 부패하거나 불공정하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정치적 의제를 가지고 있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주장은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들은 실제로 더 나은 세상이나 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희색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키르케고르가 묘사하는 아브라함의 모습과는 매우 다릅니다. 아브라함의 목표는 인간의 모든 이해관계나 이익과 무관해야 합니다. 그는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이삭을 희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키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을 트로이 원정을 위해 딸 이피게니아를 희생한 아가멤논과 같이 국가의 대의를 위해 자녀를 희생하도록 요구받은 다른 유명한 사례와 대조함으로써 이 점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키르케고르가 제시하는 아브라함의 행동에는 공리주의적 고려가 없으며, 이 점에서도 이 사건은 현대 테러리스트의 경우와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희생함으로써 군사 원정을 시작하거나 사회를 개선하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행동은 어떤 더 높은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행한 것입니다. 따라서 키르케고르가 불법적이고 부도덕한 행위와 잔학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이론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행동에서 종교적 신앙 측면의 어떠한 정당화나 방어도 찾을 수 없습니다.(198-199p)
ㅡ 존 스튜어트, <쇠렌 키르케고르 입문> 中, 카리스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