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엠마뉴엘 시에티, <쇼트> 中,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25/6/23
쇼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 책으로 쇼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추천하지 않는다. 제법 어렵다. 다른 개론서로 대충이나마 쇼트의 개념을 잡고 이 책을 훑어 보는 게 나을 듯. 아니 솔직히 요즘은 영화 이론에 대한 좋은 책 많은데 굳이 이 책까지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네.
어쨌든 쇼트의 묘사는 우리가 그 내용과 맺게 되는 이중적 관계를 드러낸다. 한편으로 우리는 본 것을 묘사한다. 즉 배경, 인물들, 인물들의 상대적인 위치와 움직임, 인물들의 의상, 인물들을 비추는 조명 방식, 이미지 속에서의 선명함과 흐림의 정도, 시야 심도 등등.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본 것을 이해하기 위해 트래킹 쇼트와 파노라마와 줌에 대해, 즉 카메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묘사하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평평한 표면 위에, 그러나 시점의 측면에서 보면 깊이감 있는 공간 위에 나누어 배치된 복잡한 시각적 정보들에 대해 우리의 뇌가 내린 해석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쇼트를 보면서 우리는 영화로 찍힌 것을 볼 뿐만 아니라, 파졸리니의 말처럼 우리는 카메라를 '느낀다'. 더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가시적인 것을 조직하고, 그것과 마주하고, 그것을 (음악가처럼) 연주하고, 그리고 카메라 안에, 전적으로 카메라에 의해 나타나는 그런 순간을 우리는 '느낀다'. 한 쇼트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우리가 묘사하려고 애쓰는 것, 즉 우리가 지각해야 하는 것은 직접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 즉 연출된 것일 뿐 아니라, 보이는 것과 보여주려는 순간(앞서나가고, 되돌아가고, 주장하고, 따라다니고, 머뭇거리고, 만나거나 헤어지고, 정확하게 표현하거나 흐지부지하는 그런 순간) 사이의 긴장의 표현이다.(40-41p)
그런데 '영화적'인 것이란 이러하다. 선들의 갈등, 쇼트들 간의 갈등, 부피들의 갈등, 덩어리들(다양한 빛의 조도로 채워진 부피)의 갈등, 공간의 갈등 등이다. 이러한 갈등들은 추진력의 증폭을 기다렸다가 서로 반대되는 부분들이 짝이 되어 표출된다. 큰 쇼트와 작은 쇼트. 다양한 선들의 시퀀스들. 깊이감이 있게 다루어지는 시퀀스와 편면으로 다루어지는 시퀀스들.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 등등. (···) 조명 이론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조명을 장애물과 충돌한 빛의 흐름으로 느끼는 것은 한 대상을 강타하는 소방 호수의 분사와 같거나 혹은 그림자와 부딪치는 바람과 같다. 이것은 숙고된 빛의 사용으로 연결되어야 한다.(113p)
몽타주가 영화의 형식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영화는 편집 작업대 위에서 태어난다고 주장했던 1920년대의 소위 '몽타주 영화론'의 투사들인 쿨레쇼프와 에이젠슈테인을 전적으로 따르기는 어려운 일이다.
모든 예술은 몽타주 수법을 필요로 한다는 주장은 그 정당성을 이미 인정받은 바 있다. 즉 부분들을 선별하고 종합하고 새로운 맥락을 얻어낸다는 주장 말이다. 그러나 영상이란 촬영 도중에 태어나는 것이며 쇼트의 내부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촬영 과정에서 쇼트에서의 시간의 흐름에 신경을 쓰고 이 시간의 흐름을 포착하고 정확하게 재구성하기 위하여 애를 쓴다. 이에 반해 몽타주는 이미 시간적으로 확정된 쇼트들을 서로 조화시키고 이 쇼트들로부터 영화라는 생생한 유기물을 구축해낸다. 그리고 이 유기체의 혈관 속에는 생명력을 보장해주는 시간이 여러 가지 리듬이라는 형태로 고동치고 있는 것이다. (···) 쇼트의 연결은 영화의 구조를 창조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영화의 리듬을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한 영화의 리듬은 그보다는 쇼트의 내부에서 흐르는 시간의 특성에서 나온 기능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영화의 리듬은 편집된 부분들의 길이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사이에 흐르는 시간의 강도에 의해 정해진다. 시간은 영화 속에서 몽타주의 힘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편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몽타주 작업은 리듬을 정해주지 못한다(혹은 몽타주는 한낱 스타일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쇼트 속에 확정된 시간의 흐름이다. 감독은 편집 작업대 위에 놓여 있는 자료 필름 속에서 바로 이 쇼트 속의 시간의 흐름을 반드시 포착해내야만 한다.
바로 이 쇼트 속에 고정된 시간이 그때그때 적절한 몽타주의 원칙을 감독에게 제시해준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상이한 시간의 흐름을 갖는 쇼트들을 서로 연결되기 힘들게 되며 소위 몽타주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실제의 시간과 조작된 시간은 마치 서로 직경이 다른 수도 파이프가 연결될 수 없듯이 영화 속에서도 서로 연결되기 힘든 것이다.
쇼트 안에서 지속되는 시간은 그 견고성이 점점 강화되든지 혹은 약화되든지 간에, 시간의 압박감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몽타주라는 것은 영화의 여러 부분들 각각이 내포하고 있는 시간적 압박감에 따라 하나의 엮어내는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113-115p)
ㅡ 엠마뉴엘 시에티, <쇼트> 中,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