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 中, 한겨레출판
2025/6/26
내가 프랑스어로 말한 지는 30년도 더 되었고, 글을 쓴 지는 20년도 더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이 언어를 알지 못한다. 나는 프랑스어로 말할 때 실수를 하고, 사전들의 도움을 빈번히 받아야만 프랑스어로 글을 쓸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프랑스어 또한 적의 언어라고 부른다. 내가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이 가장 심각한 이유다. 이 언어가 나의 모국어를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52-53p)
나의 어린 딸은 아이 아빠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고 나는 두 개의 가방을 들고 있다. 둘 중 한 가방에는 젖병과 기저귀, 아기에게 갈아입힐 옷이 있고 다른 가방에는 사전들이 들어 있다.(69p)
무엇보다,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할 일은 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쓰는 것을 계속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누구의 흥미를 끌지 못할 때조차. 그것이 영원토록 그 누구의 흥미도 끌지 못할 것이라는 기분이 들 때조차. 원고가 서랍 안에 쌓이고, 우리가 다른 것들을 쓰다 그 쌓인 원고들을 잊어버리게 될 때조차.(97p)
이제 와 생각해보면 당시 나를 즐겁게 했던 것은 종이에 적힌 활자 그 자체만은 이미 아니었던 것 같다. 작가가 적은 문장들이 나에게 환기시키는 감각, 나는 그것에 일찌감치 매료되었다. 문장은 작가의 것이었지만 감각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으니까. 조용한 도서실의 한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노라면 활자들은 일렁이는 물결처럼 내 안을 흔들어놓았고 때로는 파도처럼 밀려와 나의 조그만 세계를 여지없이 부수었다. 책을 덮고 다시 교실로 돌아가기 위해 복도로 나오면 세계는 이전과 완벽히 달라져 있었는데, 그것은 현기증 나는 경험이었지만 나는 그런 감각을 어렴풋이 사랑했다.(116-117p)
1935년 10월 30일 헝가리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그녀의 조국이 처음에는 독일, 나중에는 소련에 의해 차례로 침략받는 것을 목격하며 성장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여러 언어들이 교차하는 국경 마을에 살았던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녀의 글쓰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1956년에 일어나는데, 헝가리에서는 그해 자유를 갈구하던 시민들의 혁명이 소련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는 일이 벌어진다. 그 결과 스물한 살의 젊은 엄마였던 아고타 크리스토프를 포함해 20만 명에 달하는 헝가리인들이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세상의 모든 난민들이 그렇겠지만 그녀의 이주 역시 자발적인 선택은 아니었고 정치적으로 연루된 남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감행한 월경의 결과였다. 이 같은 사실은 크리스토프의 글쓰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점이다.(122-123p)
ㅡ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 中,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