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그 외

ㅡ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中, 문학과 지성사

mediokrity 2016. 4. 29. 01:37

2016

 

패터슨은 남부인들의 자유에 대한 사랑 역시 노예제의 효과라고 보았다. “명예와 자유에 대한 남부인들의 고도로 발달된 감각에는 기만적이거나 비정상적인 데가 하나도 없다. 타인에게 속박과 굴욕을 가하는 자들일수록, 그들이 남들에게 갖지 못하게 한 것을 자기들은 갖고 있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깨닫고 있을 테니 말이다.” 이것은 에드먼드 모건이 미국의 노예제도, 미국의 자유의 마지막 장에서 피력한 견해이기도 하다. 버지니아 식민지의 초기 역사를 세밀하게 그린 이 책에서 모건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공화주의적 열정이 어떻게 노예제도에 대한 지지와 양립할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그가 보기에 워싱턴과 제퍼슨을 비롯하여, 미국의 독립에 사상적 기초를 제공했던 버지니아인들이 모두 대농장주이자 노예 소유주였다는 사실에는 어떤 역설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노예제도가 도입된 후 버지니아에서 성장한 많은 사람들이, 그 이전 세대와 달리 열렬한 공화주의자가 되었다는 사실에는 단순한 우연 이상의 무엇이 있는데, “적어도 법률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뜻에 거의 전적으로 굴종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제군주에 지배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노예의 존재는 버지니아인들에게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웠을 뿐 아니라, 평등의 감정을 북돋우었다.(62~63p)

 

 

의례적 평등의 실현은 경칭의 인플레이션을 수반하곤 한다. 몇 해 전 뉴욕에 갔을 때 길에서 핫도그를 파는 남자에게 손님들이 sir’라는 경칭을 붙이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한국의 경우, 마트의 계산원이나 중환자를 돌보는 간병인들이 여사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평등의 제스처에는 현실적인 불평등을 은폐하는 효과도 있다. 간병인들을 여사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조건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153p)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다루는 또 하나의 방법은 효도나 돌봄 같은 전통적인 가치를 강조하면서 가족에게 짐을 떠넘기는 것이다. 조금 전에 생활보호 대상자를 애완동물에 비유했지만, 한국에서는 애완동물이 될 자격조차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폐지를 주워 팔면서 혼자 사는 노인이 장성한 자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초생활수급권을 얻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런 사례를 조명할 때 언론은 이 장성한 자녀에게 실제로 부양 능력이 있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만일 부양 능력이 있는데도 노인을 모시지 않는 거라면, 그 자녀는 인륜을 저버렸다는 비난을 받는다. 요컨대 문제는 시스템이 아니라 도덕과 풍습이라는 것이다. ‘시스템의 한계가 논의되는 것은 자녀 역시 막노동을 하거나 몸져 누워 있는 등 극단적인 빈곤 상태에 처해 있을 때뿐이다.(184p)

 

 

부모는 아이가 자기들로부터 나왔고, 한때 자기들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부모는 무엇보다 아이에게 생명을 준 사람이 자기들이고, 그들이 아이를 죽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이 망각으로부터 사회의 가능성이 생겨난다.(217p)

 

 

즉 벌은 계약의 일부이며, 벌을 받는 동안에도 계약은 유지된다. 이것은 축구 경기에서 레드 카드를 받은 선수가 운동장 바깥으로 나간 뒤에도 여전히 규칙의 지배 아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벌이 보복이라고 말한다면, 벌이 지니는 이 계약적인 속성이 깨어진다. 보복이란 본래 보복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보복은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공격을 내포한다. 그 결과, 보복당한 사람은 보복한 사람과 예전의 관계로 완전히 돌아갈 수 없다(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건 그 때문이다. 보복당한 사람이 다시 반격하지 않으면, 그는 상대방보다 낮은위치로 떨어진 채 남아 있게 된다). 반면 현대 사회에서 형벌은 규칙의 위반에 대해서만 책임을 묻고, 위반한 사람의 인격을 문제 삼지 않는다. 형기를 마친 사람은, 레드 카드를 받은 선수가 다음 경기에 출전하는 것처럼, 명예에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고 자연스럽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 사람이 사회계약에 계속 참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모든 계약은 주체들의 인격적 동등성을 전제하는 까닭이다.(232p)

 

 

우리는 죽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야말로 도덕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죽은 사람은 우리가 무엇을 준들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맺었던 관계의 본질은 우리가 더 이상 남들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게 되는 시점에 받게 될 대접을 통해 확인된다.(256p)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 문학과 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