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국외소설

ㅡ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 中, 열린책들

mediokrity 2016. 5. 2. 20:26

2016/4/27

 

 

읽는 즐거움을 주는 책이다. 지금 봐도 이럴진대 출간 당시 찬사 일색이었다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작품을 구성하는 내용과 형식 모두 흥미로웠으나 역시 형식적인 측면이 더 놀랍다. 다루는 내용에서는 별다를 것 없는 플로베르에 대한 평전이라면, 형식에서 내용을 압도하는 성취를 보여준다. 플로베르의 평전이라는 외양을 띠고 시종일관 플로베르의 문장을 인용하여 플로베르에 대해 흥미로운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으나, 플로베르에 대한 정보 제공이 이 책을 쓴 목적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플로베르라는 특정 개인의 입을 빌려 보편적인 독자들에게 자기 생각을 들려준다. 이 생각은 문학 비평에 대한 작가 자신의 흥미로운 견해로 나타나기도 하고,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각도(시대적 맥락, 주체)에 따라 달라지는 해석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유머와 아이러니는 덤이다. 한 작가의 책을 여러 권 읽어 좋은 점이라면 그들이 천착하는 주제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고, 미묘할지라도 달라지게 마련인 그 주제를 표현하는 형식의 변화와 생각의 변화 과정 모두를 볼 수 있다는 점일 텐데 이것이 비단 책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혹자는 비슷한 소재로 톤만 달리해서 책을 쓴다고 비아냥거릴 수 있겠지만, 정말이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비근한 예로 영화를 들어보자. 한국의 평론가들이 사랑해마지않는 홍상수의 영화는 어떤가. 흔히 홍상수의 영화는 욕망의 4원소(남자, 여자, , 침대)를 통해 섹스, 지식인의 허위 허식, 권력관계의 모순성을 드러낸다고 한다. 게다가 배우만 달리하여 지겹도록 똑같은 영화를 찍어 낸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백번 양보해서 내용이 동일하다해도 예술에는 형식이라는 것이 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나 강원도의 힘까지 거슬러 갈 것도 없이 최근작 두 편만 살펴봐도 그 변화라는 것을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다. 자유의 언덕(순차적으로 에피소드가 나열되는 방식이 아니라 편지가 흩어짐으로써 순서를 알 수 없도록 파편적으로 나누어 제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비슷한 만남의 순간이 두 번 반복되는데 미묘하게 다르게 진행)는 내용도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표현하는 형식의 측면에서도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걸 어떻게 똑같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얘기가 좀 샜는데 결론은 이 책은 포스트모던이라는 철 지난 용어를 어색하지 않게 붙일 수 있는 남다른 형식미를 뽐내고 있으며, 잘 써도 보통 잘 쓴 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나는 인생에 대한 완벽한 예감을 갖고 있었다. 인생은 환기창을 빠져나가는 구역질나는 요리 냄새 같았다. 그 냄새 때문에 구토를 하게 되리라는 것은 먹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40p)

 

 

? 나란 음식은 여러분이 맛을 들이기 위해서는 여러 번 먹어야 하는 끈적끈적하고 역겨운 냄새가 나는 마카로니 치즈와 같다. 여러분은 마침내 나를 좋아하게는 되겠지만, 그것은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몇 번쯤 겪고 난 후일 것이다.(42p)

 

 

많은 것들이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무엇에도 화내지 않는 그날, 나는 버팀목을 뽑아낸 인형처럼 고꾸라지고 말 것이다.(45p)

 

 

플로베르는 키가 크고, 뚱뚱하며, 미친 사람이었다. 그리고 플로베르와 관련된 색깔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보바리 부인을 위하여 자료를 준비하고 있을 때 플로베르는 색유리창을 통하여 시골 마을을 관찰하는 데 오후를 몽땅 허비한 적이 있다. 그가 본 것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었을까?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 정보는 어떠한가? 1853, 트루빌에서 플로베르는 바다 위로 떨어지는 태양을 보다가, 붉은 포도 잼으로 만든 커다란 원반 같다고 소리친 적이 있다. 아주 생생한 표현이다. 그러나 1853년 노르망디에 있던 그 붉은 포도 잼은 지금과 같은 색깔이었을까(우리가 대조해 볼 수 있도록 잼 단지가 하나라도 남아 있을까? 그리고 그동안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색깔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그런 것들이 걱정되는 것들이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해 식료품 회사에 편지를 써서 물어보려고 마음먹었다. 다른 통신자들과는 달리 그들은 바로 답장을 보냈다. 그 내용 역시 고무적이었다. 붉은 포도잼은 가장 순수한 잼이어서, 1853년산 루앙의 것은 정제되지 않은 설탕을 사용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것처럼 맑지 않아도, 색깔은 거의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최소한 색깔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 석양을 상상할 수가 있다. 그런데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다른 곳에 질문한 답장에 따르면, 실제로 잼 단지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해도 건조가 잘되고, 공기가 잘 통하는 어두운 방에 완전히 봉인되어 보관되어 있지 않았다면 갈색으로 변했을 것이 거의 분명 하다는 것이다)?(115p)

 

 

솔직함은 혼란스럽다. 나는 당신에게 나의 이름을 말했다. 제프리 브레이스웨이트. 그것이 도움이 되는가? 조금은 그럴 것이다. 적어도 <B><G> 또는 <그 남자><치즈 애호가>보다는 낫다. 나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이름에서 무엇을 추론할 수 있었겠는가? 중류층 전문직 남성, 어쩌면 사무 변호사, 소나무와 히스 숲이 있는 고장의 주민. 희고 검은 점이 뒤섞인 트위드 복장. 군대 경력을아마도 눈속임으로나타내는 콧수염. 똑똑한 아내를 둔 사람. 아마도 주말에 보트 타기를 약간 즐기는 사람. 위스키보다는 진을 즐겨 마시는 남자. 그리고?

나는 전문직 계급의 제 1세대에 속하는 의사이다. 아니 의사였다. 당신이 알다시피 콧수염은 기르지 않았지만 내 나이 또래 남자라면 피할 수 없는 군대 경험을 갖고 있다. 나는 에섹스에 살고 있다. 이곳은 아주 특색이 없는 곳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홈 카운티> 중에서는 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 위스키는 마시지만, 진은 마시지 않는다. 트위드 복장도 하지 않고, 보트도 타지 않는다. 가깝게는 맞추었지만 그렇다고 충분히 근접한 것은 아니다. 내 아내에 대해서라면, 그녀는 똑똑하지 못하다. 똑똑하다는 말은 누구라도 그녀와 결부시키고 싶지 않은 단어일 것이다. 내가 전에 말했듯이 사람들은 치즈가 너무 빨리 숙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부드러운 치즈에 방부제를 넣는다. 그렇지만 치즈는 숙성되기 마련이다. 그것이 치즈의 본래 성질이다. 부드러운 치즈는 흐물흐물해지고 단단한 치즈는 딱딱해진다. 그러나 결국에는 둘 다 곰팡이가 핀다.(128p)

 

 

한 인간의 삶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렇다고 한 인간의 삶에서 성공적으로 숨겨진 것 또한 전부는 아니다. 한 인간의 삶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거나 성공적으로 숨겨진, 이제는 믿을 수 없는, 거짓들이 전부는 아니다. 실현되지 못한 것 또한 삶이다.(151p)

 

 

그 대신 그는 무엇을 배웠는가? (...) 살지 않은 삶이란 것은 이미 살아온 삶의 어느 특정한 괴로운 문제점을 딱 해결할 수 있도록 항상 바뀐다는 사실을 배웠다.(152p)

 

 

내가 당신의 남편이었더라면, 우리는 모두 행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행복한 다음에는 서로를 미워했을 것이다. 그것이 정상이다.(153p)

 

 

그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어요. 크루아세에 있을 때는, 뜨거운 모래와 나일 강의 환영을 꿈꾸었고, 나일 강가에 있을 때는 습기 많은 안개와 크루아세의 환영을 꿈꾸었어요. 물론 그는 여행을 진정으로 좋아하지는 않았어요. 그는 여행이라는 관념과 여행의 기억만을 좋아했을 뿐, 여행 그 자체는 좋아하지 않았어요.(178p)

 

 

엘렌. 나의 아내. 죽은 지 백 년 되는 어느 외국 작가에 대해서 이해한 것보다도 더 이해하지 못한 사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것인가. 정상인가? 책은 그녀가 이러저러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삶은 그녀가 한 행동만 말한다. 책은 일어난 일을 설명해 주는 곳이고, 삶은 설명이 없는 곳이다. 삶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에 대해 나는 놀라지 않는다. 책은 삶을 의미 있게 한다. 유일한 문제는 책이 의미를 부여하는 삶은 당신 자신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이라는 점이다.(209p)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 ,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