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히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날 오후 늦게 그는 의사에게 말했다. "우리는 잃기도 하고 얻기도 해요. 전부 종잡을 수 없는 일이죠. 종잡을 수 없음이 지닌 무한한 힘. 반전 가능성. 그래요, 예측 불가한 반전과 그것이 지닌 위력이죠."(25~26p)


"아니요. 내 얘기 좀 들어봐요. 난 스스로에게 정말 솔직해질 때면 이런 생각을 해요. '그래, 맞아. 난 약간은 재능이 있어. 아니면 재능 있는 사람인 척할 수 있거나.' 하지만 그런 건 둘 다 요행이에요, 제리. 재능이 주어진 것도 요행, 빼앗긴 것도 요행이라고요. 이놈의 인생은 시작부터 끝까지 요행이에요."(42p)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을 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외로움을 느끼기에 충분할 만큼 오래. 달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는 동안 여기 앉아서 내가 없어도 시간은 계속 흐르리라는 생각을 하면 때로 놀랍기도 해. 내가 죽었을 때도 그럴 테지."(63p)


'내가 뭘 걱정하는데? 난 그 사람이 하루하루 더 늙어간다는 게 걱정돼.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예순다섯에서 예순여섯이 되고, 그다음엔 예순일곱이 되고, 그런 식으로 계속돼. 몇 년 후에는 일흔이 되겠지. 넌 칠십 먹은 노인이랑 살게 될 거고. 그런데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란다.' 어머니가 계속 말했어요. '그 다음에 그는 일흔다섯 노인이 될 거야. 절대 멈추지 않아. 계속 돼. 노인들한테 으레 생기는 건강 문제도 나타나기 시작할 텐데, 어쩌면 상황은 그보다 더 안 좋을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그 뒤치다꺼리는 네 책임이겠지. 그 사람을 사랑하니?'(86p)


남자가 가는 길에는 수많은 덫이 갈려 있었는데, 페긴이 그 마지막 덫이었다. 그는 허겁지겁 그 덫에 발을 들였고,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포로처럼 미끼를 물었다. 파국 외에 다른 길은 없다는 사실을 그는 마지막에야 알았다. 있을 법하지 않았냐고? 아니, 예측 가능했다. 한참 후에 버림받았다고? 분명 그녀에겐 그가 느꼈던 것만큼 긴 시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를 매혹했던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고, 때가 되자 그것은 그녀가 "이제 끝내요."라고 말하게 만들었으며, 그는 살고자 하는 욕심도 비운 채 혼자 그 막대 여섯 개만 지니고 그의 굴로 들어갈 운명에 처했다.
페긴은 차를 몰고 떠났다. 붕괴 과정은 채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스스로 자초한 몰락으로 인한, 이제 결코 회복할 길 없다는 사실로 인한 붕괴.(140p)



ㅡ 필립 로스, <전락>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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