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8/28

 

 

분신, 쌍둥이, 사칭꾼에 관한 이야기에서 도플갱어는 흔히 원치 않는 거울처럼 주인공의 허영스럽고 허망한 부분을 비춘다. 나를 빼닮은 내 도플갱어의 모습에 속으로 종종 눈살을 찌푸렸다는 사실은 감추지 않겠다. 그럼에도 이 책을 쓰겠다고 고집을 피운 건 그녀를ㅡ재앙에 가까운 결정이나 사람들이 그녀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방식을ㅡ지켜보면 볼수록 거기서는 내 못난 모습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의 못난 모습까지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화젯거리가 되고 싶어하는 강렬한 욕망. 우리가 실수한 사람들을 차단하고 처단하는 방식. 언어의 왜소화, 책임 전가, 그리고 그 이상. 결과적으로 그녀를 통해 나는 스스로를 좀더 선명하게 봤고 우리 모두가 속해 있는 위험한 체제와 역학을 더 또렷이 인식하게 되었다.(20p)

 

 

예컨대 양분화된 사회가 서로를 적으로 여기면서, 이쪽에서 말하고 믿는 게 뭐든 상대편은 정반대를 말하고 믿어야 하는 의무를 지닌 듯, 정치 전반이 점점 거울세계처럼 변해가는 방식이다. 자세히 파고들수록 이런 현상을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신념이나 원칙에 근거하지 않고 그저 어느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경쟁자의 음에 자신의 양을 끼워맞췄다. 건강과 나약. 깨어 있는 자와 겁쟁이. 정의와 타락. 사유가 살아 숨 쉬던 곳에 이분법이 들어선 것이다.(21p)

 

 

이런 식으로 도플갱어와의 대치는 끝내 실존적 화두를 던진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인가, 아니면 타인이 생각하는 나인가? 만약 여러 사람이 다른 이를 나로 여긴다면 대체 나는 누구인가? 물론 개별성을 훔쳐가는 도둑은 도플갱어만이 아니다. 치밀하게 설계된 자아는 어느 순간에든 어떤 방식으로든 무너질 수 있다. 교통사고로 치명상을 입어서, 정신적으로 무너져서, 혹은 오늘날에는 계정을 해킹당하거나 딥페이크에 호되게 당해서. 도플갱어가 소설과 영화에서 누리는 고혹적인 입지가 여기서 잘 드러난다. 서로 관련 없는 두 사람이 똑 닮아 있다는 개념은 정체성의 핵심을 구성하는 위태로움을 명중한다. 제아무리 공들여 사생활을 보듬고 공적 페르소나를 가꾼들, 우리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외부 영향에 노출되어 있다는 그 침울한 진실을.(47p)

 

사람들은 오랫동안 우리 이름을 섞어 부르며 나와 울프를 헷갈려했지만 이 정도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한 해프닝이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가 열리고 달력 페이지가 하나둘 넘어갈수록 이런 '슥 읽고 넘기기'식의 미디어 독해법은 더 악효과를 내, 어느덧 사람들은 우리를 혼동 정도가 아니라 혼합해, 무분별하게 쓸 수 있는 하나의 나오미로 퉁치고 있었다.

(...)

자동완성?!?

피가 얼굴로 쏠리는 게 다 느껴졌다. 그 순간, 막다른 골목길 암벽 위에서 산 9개월, 원격으로 강의하고 실내에서 마스크 착용을 한 13개월, 그리고 내 절친들을 마지막으로 만난 때로부터 영겁의 세월이 지난 그 순간, 모든 게 선명해졌다. 혼동이 잦아지더니 급기야 트위터 알고리즘이 이 사태를 알아서 조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플랫폼은 실수를 친절하게 교정하며 이용하자의 귀한 시간을 아껴주고 있었다. 이게 머신러닝의 원리다. 모방의 신, 알고리즘은 패턴을 토대로 학습한다. 설령 농담일지라도 내 이름이 울프의 이름과 계속 뒤섞인다면 알고리즘은 내 이름을 대신 추천하기 시작해, 결과적으로 더 큰 혼동을 낳는다. 그 말은 곧 나오미 사태를 시정하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ㅡ혹은 울프가 애정을 쏟는 주제들에 내 견해를 내놓더라도ㅡ결국 우리를 동일 인물로 알아달라고 부탁하는 모양새밖에 안 됐다.(67-69p)

 

 

선량하게 비칠 수도 있겠지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런 작문 연습을 통해 학생 다수는 어린 시절을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 작성하는 게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정체성을 바라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욕구와 기대를 채우기 위해 각색하는 데 익숙해진다. 이 과정을 "트라우마에 포장지를 입혀서 소비재로 만드는 연습"이라고 묘사한 어느 학생의 의견에 강의실에 앉아 있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의 트라우마가 가공된 작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학생들이 쓰라린 경험을 시판 가능한 방식으로 구체적으로 포장해 경직되고 경쟁력 있고 실제로 인기를 끌 만한 무언가로 바꾸도록 이 과정이 종용했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실제 모습과 성공하려면 갖춰야 한다고 그들이 믿는 모습, 이 둘 사이에 분할이 일어나고 있었다.

셀프 브랜딩은 자기 내면에 도플갱어를 만드는, 또 다른 종류의 더블링이다.

(...)

영혼을 언급하는 학생들을 보며, 나는 이들이 전지전능한 누군가의 눈에 잘 보이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단장하는 첫 집단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했다. 우리 생각과 의중을 훤히 꿰뚫어보는 신이 시중에 나와 있는 감시 도구 중 으뜸가는 발명품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겠는가? 신의 통찰력을 가정하는 종교는 신자로 하여금 현세에 청결하고 순수한 삶을 영위해 내세에 복을 누릴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기발하다. 우리가 적고 말하고 행동하는 바까지만 우리를 알 수 있는 오늘날의 감시 국가와 달리 유일신들은 우리 속내도 단숨에 간파한다고 알려져 있다.(94-95p)

 

 

수업 토론에서는 개인 브랜딩의 논리가 자아라는 것의 등장에 개입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봤다. 별생각 없이 올린 사진, 영상, 글귀가 여러 해 뒤 학교에 지원할 때, 구직할 때, 집을 계약할 때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한편 그와 똑같은 게시물이ㅡ예쁜 옷을 입어보거나 방에서 혼자 춤추는 게시물이ㅡ막대한 부와 명성으로 이어진다면? 걸려 있는 상과 벌이 이렇게나 큰 상황에서 청년들은 무엇을 하고, 무엇에는 감히 도전할 생각조차 않을까?

학샐들에게는 나의 '다른 나오미'처럼 혼란을 일으키는 실존 분신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외재화한 분신ㅡ디지털 분신, 즉 "진짜" 자아로부터 분할돼 성공하기 위해 타인을 만족시켜야 할 의무를 지닌 이상화된 정체성ㅡ에 대한 예리한 의식을 갖고 성장했다. 동시에 이들은 자아에서 원치 않고 위험한 면면을 타인에게 투영해야만 한다. 도플갱어 제작 공식으로 빠르게 굳혀지고 있는 분할, 수행, 투영의 3단계는 우리 자신이라 치부하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지만 어쨌든 타인의 눈에 우리 자신으로 비치는 존재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잘하면 디지털 도플갱어는 명예와 찬사, 재물처럼 문화가 심어놓은 열망을 빠짐없이 이뤄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진 한 장, 토씨 하나에 날아갈 수 있는 아찔한 꽃길이다.(96-97p)

 

 

둘 다 사실처럼 보인다. 어린 인플루언서들은 요술방망이라도 쥔 것처럼 게시물을 뚝딱 만들어내야 한다는 중압감과 댓글창이라는 통로로 자기 삶에 들어온 사람들이 남긴 흉측한 악담 때문에 진짜 괴로움에 시달리는 동시에 이 정서적 고충을 수입원으로 바꿀 방법까지 모색해야 한다. 관심경제의 고속도로에 치여 변사체로 발견되는 게 장래희망이 아니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학습했으니까.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이것 또한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매대에 물건으로 오르는데 성공하면 사람들은 당신이 핏기 없는 무생물인 줄로만 알고 온갖 오물을 투척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더 선정적인 방식의 자기 노출을 방패막으로 내세워야 한다. 침실에서 발작을 일으키며 고꾸라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송출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이리로 오지 마세요. 패거리가 된 팬들에게 인플루언서들은 간청하는 듯하다. 저 아파하고 있다니까요. 여기 이렇게 피 흘리고 있는 거 안 보이시나요? 이리 떼가 피비린내에 환장한다는 걸, 그리고 수행적인 트라우마처럼 더 달콤한 향을 풍기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107-108p)

 

 

이것은 브랜드화한 인류가 마주하는 가장 심원한 문제와 직결된다. 브랜드는 우리의 다채로운 모습을 담아낼 그릇이 못 된다. 브랜드는 지정값, 고착 상태, 1인 1자아를 바란다. 인간 석상을 바란다. 브랜딩이 주도하는 더블링은 사유와 변화에의 적응이라는 건강한 더블링(또는 트리플링, 또는 쿼드리플링)의 대척점에 서 있다. 이런 긴장은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건 문제를 터뜨렸겠지만 숙고와 토론, 유연성을 요구하는 집단적 위기로 점철된 오늘날에는 문명사적 화약이 될 것만 같다.

나는 촌각을 다투며 기후위기에 응해야 할 시기에 브랜딩 위기를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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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선 지구별 행성은 국제적 단결과 협조라는 해결책을 필요로 한다. 이론적으로야 가능하겠지만 실천을 생각하면 눈앞이 아득해진다. 그보다는 자아, 당신이라는 브랜드의 장인이 되는 편ㅡ때 빼고, 광 내고, 조명과 각도를 맞추고, 경쟁자와 침입자를 밟고 올라서서 오물을 투척하는 편ㅡ이 훨씬 더 쉽다. 우리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하는 많고 많은 대상 중 자아의 화폭은 충분히 가깝고 좁아, 원하는 대로 붓을 휘둘러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실은 이조차 먹음직스러운 그림의 떡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됐지만 말이다.(111-112p)

 

 

울프가 내뱉은 말들은 원천적으로 환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는 많은 사람에게 이 말들은 진실로 느껴졌다. 진실로 느껴진 이유는 우리가 실제로 감시 기술의 과도기에 있고 정부와 기업 관계자들이 대중을 감시하고자 상호 협력과 제휴 아래 무지막지한 힘을 휘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세대는 이런 추이의 장기적인 파급에 대한 인식의 걸음마조차 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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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혹은 그녀가 이끄는 무리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대실책이다. "휴대폰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면 어쩌려고 저러시나"라는 농담에서 빈정거림의 물기를 짜내면 마음이 바싹 타들어가는 다음의 진실만이 남는다. 그들은 이미 휴대폰에 대해서 알고 있다. 단지 휴대폰을 어떻게 손써야 할지 모를 뿐이다.(144p)

 

 

독일에서는 퀘르덴켄(비스듬하거나 비뚤어지거나 비범한 사고방식)을 표방하는 정치운동이 등장했다. 힘들여 가꾼 몸이 무너질까 걱정하며 불순물이라면 결사반대부터 하고 보는 뉴에이지 헬스광들은 코로나 시대 '위생 독재'에 저항하겠다면서 반백신 투쟁에 앞장서는 몇몇 신나치 단체와 퀘르덴켄 운동을 계기로 손을 맞잡았다. 유럽 정치 연구자 윌리엄 캘리슨과 퀸 슬로보디언은 퀘르덴켄이라는 용어에서 얻은 개념적 영감을 독일 너머에까지 적용시켜 이 같은 신흥 정치 동맹을 '대각선주의'로 묘사한다. 그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격변하는 기술과 커뮤니케이션을 일부 원인으로 하여 생겨난 대각선주의자들은(대개 극우파 사조에 치우치면서도) 좌파와 우파라는 통념적 딱지를 거부한다. 그리고 의회 정치에 양가감정을 보이거나 냉소하며, 개인의 자유를 논하는 담론에 홀리즘이나 심지어 영성에 대한 믿음을 고집스레 녹여낸다. 극단적인 경우 대각선주의 운동들은 모든 권력을 음모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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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진보주의자가 맡는 역할은 사회 정의라는 꿈을 저버리고 극우파 세계관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자신은 지금도 떳떳한 좌파 인사 또는 지극한 자유주의자임을 강조해야 한다. 이상을 배반한 사람은 본인이 아니라 한때 그가 적을 두었던 운동권이므로 이제 정치적 보금자리를 잃은 용감무쌍한 소수는 새로운 거처를 찾아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한탄해야 한다. 이처럼 진보 진영이 몰아낸 사람들은 스스로를 망명자가 아닌 충신으로 포장한다. 그들의 호소를 듣자면 과거의 동지와 동료들이야말로 사칭꾼과 짝퉁이다.(169-170p)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거울세계에 사는 수백만 명이 환상에, 허구에, 영극에 속았다고 넘겨짚기 쉽다. 까다로운 점, 아니 언캐니한 점이라면, 그들도 우리를 볼 때 똑같은 평가를 내린다는 것이다. 우리가 ‘광대세계’ 살고 있다고, ‘집단사고’의 ‘매트릭스’에 갇혀 있다고, 일종의 집단 히스테리인 ‘집단 형성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핵심은, 각자 반사 거울의 어느 편에 속하든 우리는 현실 해석상의 차이를 가지고 설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가 현실에 있고 누가 시뮬레이션상에 있는지를 두고 설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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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에서 말인지 잠꼬대인지 모를 소리를 해대면 나는 우쭐하고 우월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휴대전화 농담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문제가 도사린다. 제아무리 현실과 유리된 내용이라 해도 울프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어떤 진실을 포착한다. 근대 도시들은 무기력과 아노미에 물들어 있고 이 상태는 팬데믹을 거치면서 더 심해졌다. 우리 다수에게는 덜 활기차고, 덜 집중하고, 더 외로워하는 구석이 분명 있단 말이다. 이건 백신 탓이 아니다. 이건 네크로-테크노 단계에 도달한 자본주의의 부산물, 스트레스와 스피드와 스크린 탓이다. 한쪽에서는 이것을 예삿일로 취급하고 다른 쪽에서는 ‘비인간적’이라면서 들고일어나면 당연히 후자에 귀가 솔깃해지는 법이다.(184-187p)

 

 

인명 피해 책임의 상당 부분은, 위험 요소가 없진 않으나 매우 안전하며 혹독한 코로나 증상을 낮추는 데 뛰어난 효과를 보이는 백신에 대해서 새빨간 거짓말을 퍼뜨린 이들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끔씩 나타나는 백신 유해 반응을 경시하거나 대놓고 묵살하기로 한 여러 언론 매체의 보도 방침이 사람들로 하여금 질 낮은 정보원을 찾아가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시청자가 복잡한 진실을 못 받아들일 것을 우려하는 기자와 편집자들이 중요한 주제를 건너뛴다고 해서 음모론은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음모론을 부추길 뿐이다.(200p)

 

 

배넌의 팟캐스트를 몇 개월 청취하고 나니 이 질문에 확실히 답할 수 있다. 극우 정치상에 반대하는 사람의 다수는 배넌을 귓등으로도 들으려 하지 않지만 그는 우리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우리가 방치한 주제들, 우리가 열지 않은 토론들, 우리가 모욕하고 내친 사람들. 이 모든 것을 긁어모아 문제의식을 짜깁기하고 있다. 이 뒤틀린 정치 의제가 차기 선거에서 승리의 물결을 일으킬 거라 자신한다. 거울의 이쪽에 사는 사람들은 배넌의 어젠다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202p)

 

 

배넌의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깨달은 게 하나 더 있다. 그는 꽤나 신중하게도 가장 널리 공감을 살 수 있는 주제들에 머무른다. 바이든을 싫어하고, 백신을 거부하고, 빅테크를 떄려잡고, 이주민들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고, 선거 결과에 대한 의심을 부추긴다. 낙태와 총기소지권 등 배넌 본인이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질 순 있지만 새로운 동지들이 이질감을 느낄 법한 좀더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의제들은 겉핥기로만 다룬다. 내팽개치는 것은 아니지만 예상만큼 방송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는다.

이 역시 좌파 운동권의 일상적인 풍경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우리는 차이가 발생하면 갈가리 찢어질 작정으로 꼬투리를 물고 늘어져 치고받고 싸운다. 작은 견해차도 대의적으로 넘어가지를 않는다. 그러니 진보 진영 내에서 터진 충돌은 적시에 해결되지 않으면 타깃 당사자들은 따돌림당하거나 위험에 처할 정도다. 하지만 이쪽 사람들이 정도가 지나치게 구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사소한 언어적 위반도 중범죄로 처단하려들고, 걸핏하면 이마가 지끈거릴 정도로 전문 용어가 덕지덕지 낀 문체를 구사해 대학가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사거나 우스꽝스럽다며 혀차는 소리를 듣는다.

게다가 인종과 젠더로 사람들을 선별해서 '특권층'이라는 라벨을 붙이면 노동계급 백인 남녀가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착취되는 다양한 방식에 맞설 자리를 잃는 데다 좌파 운동권이 연합해 세력을 확장할 여러 기회도 놓치고 만다. 이것은 굉장히 비전략적이다. 우리가 누구를 탐탁지 않아 하든 간에 거울세계는 그들을 반기고 용기를 칭찬하며 공감을 드러낼 순간을 기다리고 있으니까.(210-211p)

 

 

그는 "책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후과학자 수천 명이 내놓은 사려 깊은 연구는 물론이고 매키벤 본인의 작업을 비롯해 수많은 책이 내놓는 경고를 무시하는 정책 입아자들을 20여 년간 지켜보면서 그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말은 도움이 되지만, "세상은 직접 행하는 사람들이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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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 이외의 당신이로다!" 진짜 로스에게 일갈하는 가짜 로스는 여러 도플갱어 서사의 요체가 되는 질문을 던진다. 누가 진짜이고 무엇이 진짜인가? 정체성을 주장하는 이 누구나 진짜인가? 혹은 정체성을 가장 잘 활용하는 자가 진짜인가?(250p)

 

 

이미 진행 중인 과정이다. 이처럼 서슬 퍼런 시대에 살아 있고, 거기에 참여를 강제받는 데다, 지도자라는 이들은 언행 불일치를 일삼고 있으니 오만 데서 병폐가 나타나는 결과는 어쩔 수 없다.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이런 현실을 납득시켜줄 서사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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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다른 서사가 불길처럼 번졌다. 난 괜찮을 거야, 난 준비됐어, 통조림 식단이랑 태양전지판도 준비했고 특권을 따져봐도 비교우위를 누리고 있고ㅡ그러니까 고통은 딴 사람들 몫이야. 이 서사에는 흠이 있다. 타인의 고통을 줄줄이 목도하게 되며 그 고통을 정당화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죽음을 불가피한 자연선택으로, 심지어 은총으로 보게 하는 설명과 논리가 과실을 맺는다.

파시스트/뉴에이지 동맹이 그랬듯이 이것도 일종의 역사적 도돌이표를 따른다. 참상의 수혜자들이 피해자를 나 몰라라 할 때면 어김없이 참상에의 자발적인(심지어 기꺼운) 참여나 적극적인 방관을 정당화하는 설명과 논리가 나타났다. 거기에는 주로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다른 사람들이 평안한 삶을 영위하도록 희생당하고, 노예화되고, 구류되고, 식민화되고, 죽음의 궁지에 몰린 사람들은 동급의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다르고, 교양 없고, 미천하고, 까무잡잡하고, 짐승 같고, 병들고, 우범자이고, 나태하고, 미개하다. 벌써 몇 년째 우파에서 다시 일어나고 있는 이 논리는 브라질, 인도, 헝가리, 필리핀, 러시아, 터키 등의 원시 파시즘적 독재주의 지도자들의 존재가 선명히 예증한다. 하지만 유세 길에서 우리는 이런 논리가 길고 괴악한 역사의 신경회로를 따라 독재주의 보수 진영에서 친환경과 뉴에이지 좌파 진영 일부로 대각선을 그리며 확산되는 광경을 봤다.(274-275p)

 

 

정의 실현의 꿈과 좋은 삶에 대한 집단적 비전이 물 건너가자 각자도생의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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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지도 직업을 제뜻대로 설정하지도 못하지만 자기 몸만큼은 통제 가능하다. 입안에 뭐가 들어갈지, 근육을 어떻게 키울 건지. 바로 이런 맥락에서 과거 이피 난동꾼이자 시카고 세븐의 피고인이었던 제리 루빈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자타공인 여피이자 운동 전도사로 변모했다.

(...)

이 세상의 부정부패를 적어도 혼자서는 혹은 단시간 내에는 어떻게 하지 못하더라도, 몇 주면 레그 프레스 머신에 20파운드 정도는 얹을 수 있을 테니까.(282-283p)

 

 

이 과정은 극에 달할 때 일종의 더블링으로 나타난다. 식단과 건강 관리로 변신하고자 한다면, 지금 그대로의 당신 곁에는 충분한 절제와 수양을 통해서라면, 충분한 허기와 충분한 아령질을 통해서라면 달성 가능할 것 같은 당신이ㅡ언제나ㅡ따라다닌다. 더 낮고 다른 당신은 언제나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에런라이크는 무엇이든 했다 하면 어깨가 부딪칠 거리에 다닥다닥 모여 있으면서 대화라고는 운동기구 사용 순서를 정할 목적으로만 하는 장소, 체육관에 흐르는 괴기한 침묵에 대해 논했다. 체육관의 고요는 이곳을 규정하는 제1의 관계가 단련하는 사람들 사이가 아니라 단련하는 개인과 그가 되고 싶어하는 상, 몸 분신 사이라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283-284p)

 

 

그렇다고 해서 증명 가능한 실존 음모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음모"를 암암리에 포악한 계책을 펼쳐보자는 어떤 집단 구성원끼리의 합의로 정의한다면 정재계에서 활동하는 자본의 대행자들은 음모에 부득이하게 관여한다. 1970년대 초, 민주적으로 선출된 칠레의 사회주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구리 광산을 국영화하자 CIA 지원을 받은 군부 쿠데타가 그를 끌어내렸다. 마찬가지로 이란 총리 모하마드 모사데그도 CIA 공작으로 1953년 실각했고 그가 국영화를 단행하려 했던 석유 회사는 얼마 후 브리티시 페트롤리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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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언급한 예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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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음모는 진짜다. 그리고 뉴욕과 런던의 말끔한 이사회 회의실에서 기획하는 짬짜미 행위나 단속원을 속이는 수법, 글로벌 사우스에서 새로 출범한 사회주의 정부를 몰락시키려는 음모보다 더 조악한 음모도 실제로 존재한다.

(...)

지금 그리고 있는 지도에는 이곳을 '음영 지대'로 표기하도록 하겠다. 음영 지대는 마찰 없이 잘 굴러가는 듯 보이는 글로벌 경제를 떠받치며 영락없이 쑥대밭이 돼버린 하부 구조다. 수십 년 동안 효율성을 쥐어짜내다보니 동급 사슬의 고리 하나하나ㅡ원료를 추출하는 광산과 산업 농장, 미가공 자재를 부속물과 완성품으로 바꾸는 공장과 도살장, 그것을 오대양 육대주로 옮기는 기차와 선박, 딸깍 소리에 바로 준비할 수 있게 물건을 분류하고 저장하고 창고, 딸깍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바달에 나서는 운송 차량, 각 단계에서 나오는 침전물이 쌓이고 고이는 쓰레기 더미와 썩은 상수도, 갑부들끼리 향락을 즐기는 으리으리한 놀이터ㅡ는 서로 다른, 하지만 이골이 날 정도로 친숙한 약탈의 줄거리를 따른다.

이런 이야기 자체보다는 이제 이런 이야기가 더 이상 충격을 자아내지 않는다는 살이 더 충격이다. 「노 로고」가 나온 지 2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뉴욕이나 런던, 토론토에 사는 절은 여성이 패스트 패션을 추구하면 다른 젊은 여성은 방글라데시 디카의 의류 공장에서 화재를 각오하고 일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378-381p)

 

 

공백이 생겼고, 내 도플갱어가 일깨워준 게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공백은 채워지는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음모론 문화를 부추기는 또 다른 요인이 존재하는 듯하다. 지난 30년 동안 기업 합벼이라는 광풍이 분 결과 소비자는 비탈길이나 다름없는 경기장에 서게 되었고, 때로는 살림 밑천을 장만하는 일조차 사기꾼들과의 끝없는 사투처럼 느껴진다. 다들 읽는 사람 하나 없을 서비스 이용약관의 세부 조항에 자잘한 돌부리를 심어나 우리를 걸고 넘어뜨릴 요령을 피우는 듯하다.

(...)

다보스 엘리트가 아이들을 잡아먹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의 미래를 잡아먹고 있으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쁘다. 큐어넌 신봉자들은 아이들이 피자 가게와 센트럴 파크 하부에 있는 비밀 터널을 통해 거래되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건 환상이지만 일부 주요 도시 아래에는 빈자와 병자, 약물의존자, 사회가 버린 이들이 숨어 사는 실제 터널ㅡ말 그대로 음영 지대ㅡ이 있다. 번쩍이는 라스베이거스의 불빛 아래에는 수백, 심지어 수천 명이 구불구불 뻗은 폭우 배수 터널에서 기거한다.

내 도플갱어가 사찰 공포를 백신 앱 하나에 전부 투사하듯이, 음모론자들은 사실을 틀리게 보고하지만 느낌은 제법 맞히는 편이다. 음영 지대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사는 느낌, 누군가의 수치가 누군가의 수익이라는 느낌, 약탈과 축출로 산송장이 되어가는 느낌, 중요한 진실이 장막 뒤에 숨겨져 있다는 느낌.(388-389p)

 

 

펙의 작업이 도플갱어를 명제로 삼은 것은 내 예상 밖이었다. 그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통념ㅡ그런 광란의 살육은 정도가 역사상 전무후무하다고 보는 시각ㅡ이 말짱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홀로코스트를 다른 시기에 다른 대륙에 참화를 부른 식민지적 폭력의 이데올로기를 농축한 결정체로 본다. 같은 이데올로기를 나치는 유럽 내부에 심었을 뿐이다. 미니시리즈 「모든 야수를 몰살하라」는 능히 20세기 최악의 인면수심, 히틀러가 문명화 된 민주 서구사회의 악한 "타자"가 아니라 그 그림자, 즉 도플갱어라는 것을 요점으로 한다. 펙은 몰살 경향이 "유럽 사상의 중핵으로·······충적세에서 홀로코스트에 이르기까지 우리 대륙과 인간성, 생물권의 역사를 포착한다"는 린드크비스트의 주장을 잇는 견해를 펼친다.

펙과 린드크비스트의 이야기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출방하는 것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스페인 이단 심문, 화형, 유대인과 이슬람교도의 추방이 이뤄지기까지의 유럽에서 시작한다. 이후 대서양을 건너 더 광범위한 규모로 아메리카 원주민 대학살과 이른바 '아프리카 분할'을 거친 뒤 홀로코스트에 이르러서 유럽으로 되돌아온다.

(...)

나치가 영국 식민주의와 북미 인종 위계에 착안해 대학살 체제를 만들었다는 것을 히틀러는 세세히 말하고 적었다.

1941년에는 이렇게 말했다. "강제 수용소는 독일의 발명품이 아니다. 영국인이 고안한 것이고, 이 제도로 다른 나라들이 맥을 못추게 했다." 프로파간다를 목적으로 한 이야기였지만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기도 하다.

(...)

나치는 시민적 권리에 인종별 차등을 두는 미국의 법적 장치에 착안한 1935년 뉘른베르크 법(국가시민법과 독일인 혈통 명예 보호법)으로 독일 유대인의 시민 신분과 참정권을 박탈하고 아리아인과 유대인 간의 성교 및 결혼, 출산을 금지했다고 휘트먼은 주장했다. 나치는 미국의 짐 크로 시대의 합법 분리 체제와 원주민 보호구역 정책을 참고해 유대인 게토를 신설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역시 나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433-435p)

 

 

나치 홀로코스트를 다른 어떤 범죄와 함꼐 언급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수없이 배웠다. 그랬다가는 홀로코스트가 덜 끔찍하고 덜 충격적이며 어쩌면 일상적인 것이 될 테니까. 하지만 일상이 끔찍하다면? 그게 요점이라면 어떻게 할까. 나치즘이 계몽과 근대성으로 향하는 고무적 서사에서의 탈선이 아니라 근거리에 있는 분신, 다른 얼굴이라면?

(...)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결이 다르다고 보는 견해가 여럿 있다. 선진 기술이었다. 더 신속한 죽음이었다. 산업적 규모였다. 다 사실이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마다 다르다는 것도 사실이다. 대학살마다 각기 성격이 다르고 혐오당하는 집단은 각기 특별한 방법으로 혐오당한다. 사망자 수로만 보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인구가 다른 모두를 앞선다. 기술 수준으로 따지자면 아프리카 인구를 납치하고 노예화한 범대서양 무역과, 남북전쟁 전 미국 남부와 카리브제도에 그 무역으로 인력을 충원한 농가들이 당시에는 매우 근대적이었다. 강제노동을 통해 최대치의 자산을 운송하고, 보증하고, 상각하고, 추적하고, 통제하고, 추출하기 위해 고안한 시스템들은 너무나 최첨단이어서 근대 회계와 인적자원 관리에 기틀이 되었음을 여러 학자가 밝혔다.(438-439p)

 

 

편견은 이렇게 작동한다. 편견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경멸하는 집단 구성원의 분신을 무의식적으로 만들고 그 뒤틀린 쌍둥이는 기준을 충족하는 모든 이의 주변을 맴돌며 잡아먹겠노라 항상 위협한다. 이런 분신이 들러붙으면 당신이 누구든, 당신이 정체성을 어떻게 가꿔왔든, 당신의 개인 브랜드가 얼마나 신선하고 독특하든, 그리고 당신이 소속 부류의 정형화된 이미지로부터 스스로를 떼어놓으려고 얼마나 발악하든 혐오자는 언제나 당신을 경멸 당하는 집단의 대행자로 낙인찍는다. 당신은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민족/인종/종교의 분신이며, 당신이 직접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그 분신을 떨쳐낼 수도 없다.(452p)

 

 

완벽해진 브랜드로서의 자아, 디지털 아바타로서의 자아, 데이터 광산으로서의 자아, 이상화된 신체로서의 자아,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 투영물로서의 자아, 자식을 거울로 쓰는 자아, 영원한 피해자로서의 자아. 이 분신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아니 보는 방식이다. 우리 자신을 아니 똑똑히 보는 방식, 서로를 아니 똑똑히 보는 방식, 세계와의, 우리 사이의 연결을 아니 똑똑히 보는 방식. 다른 걸 다 젖히고 이게 현시대의ㅡ그리고 현시대에 나타나는 미러링과 합성된 자아들, 조작된 현실들의ㅡ언캐니한 감각을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이 감각의 원류는 우리가 아니 보려는 사람과 사태들에서 찾을 수 있다. 과거에서, 현재에서, 우리에게 닥쳐오는 미래에서.(516p)

 

 

우리가 이중 보행자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점일 것이다. 우리 각자의 판박이가 어딘가에서 돌아다니고 있으리라는 가정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 생각하는 만큼 유별나거나 독특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라는 거울의 방에서는 이것을 호러 이야기처럼 다루기 마련이다. 영화 「분신」의 제시 아이젠버그 역이 "난 내가 엄청 특별하다고 생각하거든요"라며 낑낑거리지 않았던가. 이것은 서구 문학, 영화, 일신교를 관통하는 반드시 죽여야하고 반드시 찔러야 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대처법이다. 그렇지만 가짜 로스식으로 분신들을 대하는 관점도 존재한다. 야호! 이 잔혹한 세상에 나만 남겨진 게 아니잖아!

(...)

그렇지만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적어도 그렇게 느껴지는 것만큼은 아니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은 쌍둥이들이 누리는 내밀한 삶을 타고나진 않지만 자아의 경계를 방비하는 데 조금만 투혼을 덜 발휘한다면 우리 모두는 연결과 단합과 친분을 누릴 수 있다. 도처에 친척이 있다. 어떤 것은 우리처럼 생겼고, 다수는 우리와 매우 다르게 생겼지만 여전히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 어떤 것은 인간이 아니다. 어떤 것은 산호다. 어떤 것은 고래다. 그리고 우리가 제 발등 찍는 일을 좀 작작 한다면 그들과 충분히 연결될 수 있다.(520-521p)

 

 

우리는 "내 쪽 사람"을 "모든 사람"으로 정의하는 참된 연대의 끈기를 지녀야 한다.

이런 종류의 보편주의는 실현하기가 어렵다. 넓은 의미에서 좌파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서로가 지겹고 짜증나고 실망스럽고 또 그런 실망감을 계기로 좀더 작디작은 집단들로 분산할 만한 정당한 이유가 수두룩하다. 그렇지만 권력과 부, 병기와 정보기술이 극소수의 손에 집중된 때에, 그리고 그 손들이 가장 타락하고 방자한 목적에 저런 자원을 사용할 의향이 있는 때에, 분산은 굴복에 다름 아니다. 과두제 앞에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단결이 품는 잠재력이다. 인종과 젠더, 성지향성, 계급, 국적은 우리의 고유한 욕구와 경험을 주조하고 역사적 부채를 빚는다. 그런 현실들을 곧게 인지해야 함과 동시에 집중된 부와 권력에 도전하는 공통된 관심사를 다지며, 좀더 공정할, 좀더 즐거울 새로운 구조들을 건설해야 한다.

대체로 말이 행동보다 쉽다. 그러나 완강해 보이는 장벽들을 넘어 단합하고자 할 때는 그 역이 참일 수도 있겠다. 행동이 말보다 쉬운 경우다.(528-529p)

 

 

도플갱어 문화를 탐구하면서 저것과이것성의 다양한 사례를 나와 타인에게서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아들 T 같은 이들에게 호기심과 친절을 보이는 의사였다가, 조금 다르게 행동하는 아이들을 죽음의 구덩이로 보내는 사람으로 바뀐 한스 아스퍼거 같은 극단적 사례에서.

(...)

두 트럭 호송대를 예로 들어보자. 시끄러운 호송대와 그로부터 8개월 전, 아이들의 죽음을 기리는 원주민 공동체와 연대할 목적으로 결성한 조용한 호송대 말이다. 둘은 극명한 대비를 보였다. 두 호송대를 선과 악으로 나누어 하나를 진일보로, 다른 하나는 백인들의 백래시로 보는 관점이 있다. 선택하기 편리한 이분법일테고, 내가 호송대 이야기를 풀어낸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지층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몇몇 트럭 운전수는 양쪽 호송대에 모두 참가했다. 2021년 6월, 그들은 슬픔과 연대를 느꼈다. 2022년 2월에는 분노와 독선에 빠졌다. 모든 사람처럼 그들도 저것과 이것이었다. 사회, 정치, 경제 조건상에서 간발의 차가 그들로부터 다른 모습을 끌어낸 것이다.(534-535p)

 

 

대각선주의자를 비롯해 거울세계 거주민들로부터 본받을 점이 있다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발상, 거울의 이편에서는 너무 많은 이가 이미 저버린 건 아닐까 우려되는 그 야망을 저들은 여전히 품고 있다는 것이다. 저들이 하듯이 사실을 지어내서는 안 되지만, 인간이 만든 시스템의 다수ㅡ군주제와 대법원, 국경과 억만장자ㅡ정태적으로 보는 것은 그만둬야 한다. 사람이 만든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의 힘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의 시스템이 삶의 급소를 찌르는 거라면, 그리고 정말로 그렇기에,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545p)

 

 

이번 여정에서 얻은 교훈이 있다면, 정체성은 정체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나의 정체성도. 울프의 정체성도. 우리 두 사람의 경계마저. 다 유동적이며 끊임없이 바뀌고 더블링한다. 젊은 날의 자아와 늙은 날의 자아,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 살아가는 자아와 죽어가는 자아 사이의 더블링을 잘 조절해가며 사는 것은 인감됨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인간됨의, 그리고 좋은 삶을 사는 것의 더 큰 부분은 우리가 자아라는 모래성을 어떻게 만들어갈지에 달려 있지 않다. 우리가 무엇을 함께 만들어갈지에 달려 있다.(555p)

 

 

 

ㅡ 나오미 클라인, <도플갱어> 中,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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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8/21

 

 

 

하필이면 이 책을 골라든 당신도 나와 비슷한 부류일지 모른다. 우리가 얼마나 온갖 걸 거슬려 하느냐하면, 싫은 게 지나치게 많은 자신조차 꼴 보기 싫어할 정도다. 건강한 삶의 자세는 아니다. 나 역시 인생의 밝은 면을 먼저 보고 먹구름 사이에서도 가느다란 빛줄기부터 찾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쉽지 않다. 좋아하는 마음처럼 싫어하는 감정도 이성적인 통제가 어렵다. 노력한다고 별로였던 게 갑자기 좋아지지는 않는다. 약간의 의지만으로 할리우드 하이틴 로맨스 영화의 너드 캐릭터처럼 하루아침에 극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면 세상 살기가 얼마나 편할까? 「프린세스 다이어리」의 앤 해서웨이가 메이크오버 후 학교의 퀸카가 될 수 있었던 건 큼직한 뿔테 안경을 쓰고 평범한 척하던 시절부터 이미 비범하게 예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삶의 태도는 미모처럼 타고난 재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

우리 모두가 알지만 편리하게 모르는 체하는 진실이 있다. 좋은 게 전부 옳지는 않고, 싫다고 해서 반드시 틀린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해서가 아니라 주관적인 편견과 널 뛰는 변덕의 컬래버레이션에 휩쓸려 무언가를 싫어할 때가 많다. 목소리가 크고 날카롭다는 이유만으로 지구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면 내가 북촌의 킴 카다시안이라도 많이 억울할 거다. 우리 집 안방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고 누구나 주기적으로 본인의 가치 판단에 대해 공정한 영점 조준을 할 필요가 있다. 공격적인 감정의 밑바닥을 헤치다 보면 때로는 자신의 뒤틀린 구석을 발견하게 된다. 싫어하는 것들을 통해 나를 솔직하게 알 수도 있다.(11-12p)

 

 

그렇다면 내가 바라는 뒷담화 파트너는 어떤 사람일까?

(...)

일단 사회적 정의에 관한 이성적 판단력과 공동체 구성원의 상식은 갖춰야 한다. 차별이나 범죄에 반대하는 건 언급하기조차 귀찮은 기본이어서, 여기서부터 의견이 갈린다면 대화는커녕 공기를 나눠 마시는 것조차 불편해진다. 1차 관문을 통과했는가? 이제부터는 디테일을 좀 더 파고든다. 대다수가 뻔하게 싫어할 만한 대상을 뻔하게 비판하는 건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미묘할 언짢음에 대해 마주 앉은 두 사람의 경고등이 동시에 켜질 때, 뒷담화는 문득 짜릿해진다. 식당에서 각질이 하얗게 일어나는 맨발로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 공중화장실 변기 뚜껑을 닫아 두고 떠나서 뒷사람에게 괜한 스릴을 안겨 주는 것, '느좋'처럼 어감이 저렴한 줄임말을 남발하는 것, SNS 프로필에 보유 중인 주식 종목을 나열하는 것 등등. 소소하지만 확실한 싫음에 열렬하게 공감하는 데서부터 아름답고 유치한 우정이 시작된다.

 

무엇을 싫어하는지만큼이나 얼마나, 어떻게 싫어하는지도 짚어 볼 내용이다. 물론 카페 대기 줄에서 내 속을 강배전으로 태운 나무늘보 2인조 때문에 꽤 짜증이 나긴 했다. 그래도 가벼운 험담 몇 분이면 해결될 만한 안건이다. 만약 대화 상대가 급발진해서 패륜에 육박하는 수위의 욕설을 하기 시작한다. 오히려 뒷담화의 흥이 깨진다. 이런 사람은 뒷담화 파트너보다는 뒷담화 소재로 더 활용도가 높다.

(...)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한참을 차지게 씹더니 할 말이 떨어졌다 싶었는지 문득 로켓배송으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흐름을 끊고 성숙하지 못했던 1분 전까지의 대화를 반성하려 든다면? 막판에 밑장 빼고 양심의 찌꺼기를 챙기려는 건 반칙이다. 1분 먼저 꼬리를 자른다고 대단하게 더 나은 인간이 되지는 않는다.(34-36p)

 

 

취하고 모욕을 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요구를 강요당했을 때는 흔들리는 게 자연스럽다. 바닥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인간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뿐이다. 어떤 예민한 상황에 몰려도 토씨까지 반듯한 대답만 한다면? 둘 중 하나다. 술이 엄청나게 세거나 무슨 말을 얻어맞아도 타격감이 없는 소시오패스거나. 압박 면접에 대한 대처가 능숙할수록 소시오패스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는 꽤 설득력이 있다. 바닥을 보면 상대방의 '진짜'을 알 수 있다는 믿음은 순진한 착각 같다. 인내심과 절제를 걷어 내고 나면 우리의 다채롭게 흥미로운 알맹이가 드러난다고? 글쎄, 바닥까지 내려가면 대부분의 사람은 오히려 뻔하게 별로일 가능성이 높다. 막장 드라마의 엑스트라 악역처럼 참신한 구석이라고는 없이 전형적으로 형편없을 거다. 물론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는 솔직함이 필요하겠지만 그게 온갖 찌꺼기를 바닥까지 긁어 보여 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무엇보다, 나의 최악이 과연 나의 진짜인 걸까? 오히려 최악에 그치지 않기 위해 바닥 위에 꾸준히 쌓아 올리는 시도와 노력이 훨씬 흥미로운 누군가의 진짜는 아닐까?

 

소위 바닥 이론은 교묘하게 모순적이기도 하다. 바닥을 보이기 쉬운 상황에서도 절대 바닥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요구를 이면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바닥을 보이면 탈락이고 요령껏 감추면 합격이다. 이건 누군가를 신중하게 이해하는 대신 편리하게 오해하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어차피 사람이 사람을 속속들이 안다는 건 불가능한 미션이다. 우리는 서로를 모를 수밖에 없다는 게 전제가 되어야 한다. 예의를 지키면서 알아야 하는 만큼만 조심스럽게 알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누군가를 취약한 궁지로 몰면서 약점을 드러내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성의가 없고 무례하다. 나는 상대의 감춰진 면을 이렇게 음흉하게 염탐하려는 전략이 그 자체로 어떤 바닥이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술에 취하면 이상한 버릇이 튀어나오지는 않는지, 지하실에 감춰 둔 시체는 몇 구인지 담백하게 물어보는 게 낫다.(50-52p)

 

 

인정하자. 애정 어린 비판인 척하는 말의 상당수는 그냥 싫어서 하는 비난이다.

(...)

싫어하는 마음일수록 표현할 때는 성의와 예의를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좋은 말은 대충 해도 된다. 칭찬과 응원을 리본까지 둘러서 가져오라고 한다면 욕심이 과한 거다. 싫은 소리는 다르다. 꼭 해야겠다면 조심스럽게 신중해지려는 준비 자세 정도는 취해야 한다. 좋은 말보다 싫은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을 더 자주 겪는다. 싫어하는 걸 좋아하기 위해 애쓸 필요까지는 없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다만, 싫은 감정을 비겁하거나 부당하거나 무례하지 않게 해소하려는 노력과 고민은 필요하다.(75-76p)

 

 

마크 저커버그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알고리즘은 플랫폼 안에서의 사용자 행동 패턴을 반영한다. 네가 쓰레기를 뒤적거렸기 때문에 주문하신 쓰레기를 가져다준 것뿐이다. 나도 반박하고 싶어진다. 내가 여름철에 축축해진 겨드랑이를 몰래 확인했다고 해서 그게 겨드랑이를 셀프로 핥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무의식적인 행동 하나하나에 필요 이상의 의미 부여를 하고 의도를 부풀리면 결괏값이 피곤해진다. 그리고 나도 영화 「소셜 네트워크」를 봤다. 당신이 이런 식이니까 친구가 없는거다. 마지막 말은 너무 심했나? 그렇다면 취소. 게다가 친구는 나도 별로 없다.(186-187p)

 

 

여행에 대한 나의 의견도 비슷하다. 여행 자체보다는 여행이라는 개념을 습관적으로 그리워한다. 여행의 개념?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탈출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이고 일상의 스위치를 며칠씩 내려놓게 하는 핑계다. 그렇지만 막상 떠난 곳에서 기다리는 건 개념보다는 현실이다. 예상을 뛰어넘게 비싼 물가와 현지인의 텃세와 유명세에 비해 실속은 없는 맛집과 풍경 자체보다 몰려든 인파가 더 장관인 관광지 따위에 기운을 도둑맞고 나면 파랑새는 뒷산에 살고 진정한 행복은 안방 침대 위에 있는 게 아닐지 의심하게 된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이 탓도 있다. 어릴 때는 처음 가본 도시에서 보고 듣고 먹고 만지는 대부분이 새롭게 놀라웠다. 공항을 어느 정도 들락날락한 이후부터는 놀라는 것도 쉽지가 않다. 새로운 경험도 이미 아는 경험의 생기 없는 리메이크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게다가 지금의 서울은 10~20년 전의 서울과는 아예 다른 도시다. 다른 곳에 있는 웬만한 것들을 오히려 더 세련되게 업그레이드한 버전으로 보유하고 있다. 서울이 흥미진진해지면서 뉴욕과 도쿄와 런던과 파리와 베를린은 예전보다 재미가 덜한 여행지가 됐다. 그리고 나는 점점 더 까다로운 여행자가 되어 가는 중이다.(217-218p)

 

 

공공장소에서 눈물이 터지는 것보다 내향인에게 더 곤란한 일이 있다면 눈물이 터진 걸 누군가에게 들키는 일이다. 아무도 모르는 세상의 틈에 숨어서 빙봉과의 이별을 조용히 극복하고 싶을 때 팔을 두드리며 묻는 사람들이 있다. "너 울어?" 이럴 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흉하게 울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 굳이 물어보는 이유를 물어보고 싶긴한데, 다행스럽게도 질문을 퉁명스러운 질문으로 맞받아치지 않을 만큼의 사회화는 거쳤다. 한 시간 전 한강에 연인의 뼛가루를 뿌리고 온 척을 해야 할까? 연애 경험도 많지 않은데 죽은 애인만 자꾸 늘어난다. (247p)

 

 

눈물을 무조건 의심하지는 않는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안으로 파고드는 감정이 종종 어긋날 수 있다는 생각은 한다. 즐거우면 웃고 슬프면 우는 게 보편적인 매뉴얼이겠지만 기계가 아닌 인간의 메커니즘에는 오작동의 변수가 많다. 어쩌면 오작동이 아니라 인간이 감정을 출력하는 방식이 원래 그렇게 제멋대로인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몇 겹으로 덮여 있는 누군가의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마음은 좀처럼 짐작하기 어렵다. 기쁠 때도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어떤 슬픔은 웃음 아래에 있다.(253p)

 

 

하지만 나도 AI 특별 전형이나 외계인 추천으로 지구 멸망을 피해 갈 수 있을 만큼 결백하지는 않다. 당한 만큼 저지른 것도 많다. 예전 직장에서 그때 그 프로젝트를 맡았던 당시를 뒤적댄다. 나 자신의 꼼꼼한 업무 관리 능력에 짧게 취해 있던 시절인데 협력 업체의 관점에서 본 실상은 중요한 건 건너뛰고 사소한 것만 따지는 디테일이 살아 있는 갑질이었겠구나 싶다. 연락이 뜸해진 지인도 생각난다. 섭섭하게 굴고 나서 만회할 타이밍을 놓쳤다. 대체 왜 그랬을까? 한편으로 이런 식의 질척대는 자아비판이야말로 음침한 나르시시즘이 아닌지 의심한다. 이미 지나갔고 달리 바로잡을 수 없는 사건에 미련을 갖고 뒤늦은 변명을 꼬박꼬박 업데이트하면서 나는 내가 한 행동보다 나은 인간이라는 걸 나 자신에게 확인받고 싶어 한다. 비슷한 실수의 반복을 막는 제동 장치가 되지 못한다면 이런 종류의 착한 척은 큰 의미가 없다. 적당한 선에서 작작 해야 한다. 결국 누군가는 실제로 한 행동만큼의 존재가 맞다.(265-266p)

 

 

나조차도 나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편리하고 유리하게 자신을 속이고 넘어갈 때가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5톤짜리 짐을 끌어안고 내가 미니멀리스트라고 착각하며 지낸다. 인류애가 충만한 척하는 혐오론자로 살기도 한다. 숲 안에서는 나무에 집중하느라 전체의 풍경을 놓치기가 쉽다. 대상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보지 못하는 장면이 생긴다. 그래서 아마도 나라는 사람의 솔직한 근사치를 볼 수 있는 지점은 숲도 나무도 아닌 곳, 나와 남의 시선이 교차하는 어딘가일 거라고 짐작한다. 나도 나를 모르고 남도 나를 모르지만, 양방향에서 주워 온 퍼즐을 조합하면 비로소 몰랐던 그림이 드러날 수도 있다.(282p)

 

 

 

ㅡ 정준화, <미안하지만 싫습니다> 中, 몽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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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8/17

 

 

생각보다 유머러스하다. 애드와 짐 듀오의 대화들.

 

 

 

“남편분을 아주 좋아하셨던 것처럼 들리진 않네요. 왜 남편분과 결혼하셨나요?"

"여기는 미시시피주 머니예요. 수사관님. 미시시피주 르플로어라고요. 남편은 그다지 볼만하지도 않고 대화가 통하는 인간도 아니었지만 직업이 안정적이었어요. 난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했고, 노래도 전혀 못하고, 옷을 벗기면 몸매도 볼품없어요. 난 그냥 삶을 살아보려고 했던 거예요. 내 삶을요."(252p)

 

 

여자가 빤히 쳐다보자 짐이 말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든지 '애크미 커대버 공급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같은 말은 안 하시나요?"

"시카고 애크미 커대버 공급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죽인 사람을 얼릴 땐 역시 애크미죠.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거래 기록이나 회계를 담당하는 분과 얘기하고 싶은데요."

"찔러 죽은 사람을 토막 낼 땐 역시 애크미죠."

"저는 짐 데이비스 특별수사관이고, 이쪽은 문 수사관이에요." 짐은 미시시피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처형시킨 사람을 처리할 땐 역시 애크미죠."

"알았어요. 그만하세요. 제가 사과할게요." 짐이 말했다.(291-292p)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애드 모건은 수사국 차를 타고 해티즈버그로 돌아가는 길에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과 나눈 대화로 그가 알게 된 내용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이제 자신이 미시시피의 백인들을 혐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아니지, 혐오는 너무 강한 단어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의 직업은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없게 했지만 그는 훌륭한 기독교인으로 자랐다. 그러니 그는 그들을 혐오하진 않았다. 그러나 적극적이고 강렬하게 무관심했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깨달았다. 심지어 미시시피주 머니에서도 모든 백인이 똑같진 않았다. 그는 웃었다. 그러나 백인의 대부분은 똑같았다.(307p)

 

 

"여기입니다. 로레인 모텔. 저쪽 발코니 구석이요. 이게 제가 경찰이 된 이유예요."

"지금은 박물관이 됐네." 짐이 말했다.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에드가 말했다.

"왜 안 되죠?" 헬베티카가 물었다.

"여기는 그냥 모텔이니까요. 그게 이곳의 정체성이죠. 이곳의 모든 것이고요." 에드가 말했다. "사람들은 바로 저 방을 빌려서, 바로 그 침대에서 잠을 자고, 바로 그 문을 통해 발코니로 나와서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달아야 해요. 사람들은 모든 목요일이 똑같진 않다는 사실을 알고 이해해야 해요."(372-373p)

 

 

"이봐, 내가 네 짐작대로 그저 순진한 촌뜨기일지는 몰라도, 내 출신지나 DNA만 보고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멍청한 건 아니라고. 난 조금 다른 레드넥이야. 똥 누기 전과 후의 그런 레드넥이지."

"뭐라고요?"

"난 네가 상상하기도 싫어할 레드넥이라고. 왜냐하면 나는 한계가 없거든. 한계가 없다고. 난 신을 믿는 척하지 않는 레드넥이야. 난 내가 레드넥이라는 걸 아는 레드넥이야."

"당신은 미쳤군."

"그래, 맞아. 보기보다 멍청하진 않군."(393p)

 

 

"이 세상에 일어나는 집단 학살에 관해선 모두가 얘기하지만, 살인이 천천히, 백 년 동안 퍼져나가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해요. 공동묘지가 없으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죠. 미국의 분노는 항상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이었어요. 유효기한이 있죠. 만약 그리핀이 쓴 책이 「흑인이 되다」가 아니라 「린치당하다」였다면 미국인들은 저녁식사나 야구나, 아무튼 각자 보고 있던 곳에서 눈을 떼고 쳐다봤을 거예요. 요즘은 다들 트위터를 보고 있으려나요.(428-429p)

 

 

 

 

ㅡ 퍼시벌 에버렛, <더 트리스>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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