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1/4

 

 

역시나 예상대로 잘 썼네. 글쓰는 스타일이 거의 초반에 쓴 여기서부터 이미 정립된 것 같네. 비교적 최근에 쓴 '친구'나, '어떻게 지내요'가 떠오른다.

 

 

어머니는 몇 달마다 한 번씩 딸들에게 이제 다 끝이라고, 우리는 '집'에 돌아갈 거라고 선언했다. (한번은 정말로 우리를 데리고 독일로 돌아갔다. 내가 두 살 때의 일이었다. 우리는 독일에서 여섯 달 동안 살았다. 그때 일에 대해서는 어머니는 늘 모호하게 말했다. 나중에 우리가 왜 독일에서 계속 살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너희가 아버지를 보고 싶어해서." 하지만 그 말은 사실이 아닐 듯싶다. 그보다는 어머니가 고향은 이제 자신이 살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원래부터 가족과 잘 지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 무렵에는 루돌프도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했을 테고.)

(...)

하지만 가난이라는 짐에 더 무겁게 눌려 있던 쪽은 어머니였다. 가난이란 곧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는 뜻이자, 한시도 쉬지 않고 겉모습에 신경써야 한다는 뜻이었다. 돈이 없다고 해서 꼭 추레하게 살 필요는 없었다. 그 사실은 우리집에 와보면 알 수 있었다. 온 집안이 얼마나 깨끗하고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지.

(...)

하지만 가난하게 살다보면 지치게 마련이었다.(25p)

 

 

중국인 특유의 알쏭달쏭한 표정. 중국인 특유의 인내심. 중국인 특유의 내향성. 그랬다, 나는 이런저런 상투적 표현으로 아버지라는 사람을 파악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절반은 파나마인이 아니던가? 중남미 사람들은 어떤 평가를 받던가? 다혈질이고, 변덕스럽고, 감정이 풍부하며, 남성성을 과시하고, 명랑하고, 낭만적이고, 성미가 급하다고들 한다. 아니, 그중 어떤 것도 아버지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늘 돌아가고 싶어했어. 늘 중국을 그리워했지."

하지만 중국을 떠났을 때 아버지는 겨우 열 살이었는데.

"그래, 중요한 건 바로 그거야. 태어나서 처음 몇 해를 보낸 곳이 어딘지, 처음으로 말을 배운 곳이 어딘지. 네가 누군지는 그걸로 결정돼."(32-33p)

 

 

내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을 코카콜라였다고 한다. 그리고 십팔 개월 아기였을 때 찍은 스냅사진 속의 나는 입도 대지 않은 코카콜라 병을 품에 안고 공원에서 뛰어놀고 있다. 아무래도 근처에 앉은 소풍객들 자리에서 냉큼 들고 온 콜라 같다. 전에는 내 안에 그때의 기억ㅡ차가운 유리병이 배에 닿는 감촉, 휘청거리는 동시에 힘차게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 감쪽같이 집어왔다는 쾌감과 흥분에 한껏 부푼 가슴ㅡ이 남아 있다고 믿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죄다 나이를 먹고 나서 떠올린 상상 같다. 나중에, 그 사진을 여러 차례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서.(55p)

 

 

버지니아 울프는 이렇게 적었다. "어떤 것도 어린 시절의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한다. 그 시절의 기억은 박하잎 한 장에, 아니면 테두리가 파란 컵 하나에 되살아난다."(56p)

 

 

어머니가 이웃들 모두와 공유하고 있는 생각이 한 가지 있었다. 자신들은 그 임대아파트 단지 같은 곳에 살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었다. 벤치에 나와 앉은 사람들은 주로 어떻게 해야 그 단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인생의 모든 것이 실수였다. 우리는 모두 마법에 걸려 있었다. 가난이라는 마법에.

(...)

"멀쩡한 집들은 다 나가버리는구나. 우린 영영 못 나가겠지. 마지막까지 남는 게 우리집일걸." 마지막이라는 말의 진짜 뜻은 '마지막 백인 가족'이었다.(65-66p)

 

 

어머니는 권위에 약한 사람이었다. 내가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전공을 바꾸기로 마음먹었을 때 어머니는 걱정스러워했다. "그래도 별일 안 생기는 거 확실하니?" "여기다 주차해도 진짜 괜찮을까??" 어머니는 그렇게 물으며 근심 어린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곤 했다. 어머니 안의 어떤 부분은 부모님이 체포되는 광경을 계단 위에서 지켜보던 어린아이로 영영 남아 있었다. 그래서 전화벨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했다. 예상치 못한 손님이 현관문을 두드리면 어미는 눈이 동그래져서 우리를 보며 조용히 하라는 경고로 입술 앞에 손가락을 세웠다.(106-107p)

 

 

결국 아버지가 스스로 가족에게서 거리를 두고, 어머니가 집안일과 아이들을 마음대로 하게끔 내버려두는 것으로 충분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는 적잖은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제 날마다 아버지를 떠올릴 필요가 없었으니까.(109p)

 

 

어느 모로 보나 인간에 대한 적개심의 반작용인 동물에 대한 사랑이 어머니에게서도 나타났다.

(...)

마치 사람보다 개를 더 좋아하는 기질이 곧 우월함의 증거라는 듯이.(110p)

 

 

나에게 남은 거라곤 결혼에 대한 공포뿐이었고, 이는 단지 우리 부모님만의 공은 아니었다. 나는 어린 시절에 행복한 부부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텔레비전 화면 바깥에서는 없었다. (언젠가 내가 우리집 돌아가는 꼴을 불평했을 때, 어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네가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봐서 그래.") 임대아파트 단지의 바람 잘 날 없는 집들. 아내와 남편은 서로 목을 조를 기세로 싸워댔고, 아이들은 그 기세에 눌려 살았다. 부부끼리는 서로 속일 수 있었을지 몰라도, 아이들에게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엄마와 아빠가 서로 죽이고 싶어한다는 것을. 나는 지금도 커플이 곁에 앉으면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

잘 차린 식탁 앞에 둘러앉은 화목한 대가족. 말끔하게 치워진 넓은 집. 개 한 마리. 마당. 다시 말하지만 오래전에는 나도 그런 꿈을 꿨을 테지만, 이내 다른 꿈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방 한 칸. 의자, 책상, 침대. 뜰이 내다보이는 창문. 음악. 책. 혼자서도 품위 있게 사는 법을 가르쳐줄 고양이 한 마리. 남자가 들렀다가 돌아갈 수는 있어도 눌러살지는 않는 방. 나는 아직 십대였을 때부터 그런 방을 꿈꿨다. 흔들거리는 기다란 복도의 끄트머리에서 나를 기다리는 그 방이 나에게는 보였다.(207-209p)

 

우리는 이런 말을 흔히 듣곤 한다. "프랑스어는 카페와 길거리에서 배웠어요." "난 침대에서 영어를 배웠어요." 하지만 나는 그 사람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유일한 언어 습득법은 공부뿐이다. 열심히, 체계적으로 하는 공부.(237p)

 

 

 

ㅡ 시그리드 누네즈, <신의 숨결에 날리는 깃털> 中, 복복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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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29

 

모험, 쌍둥이, 거울상, 경계, 안과 밖, 겉과 속, 양면성, 동물, 그림자 등등 하루키나 늘상 활용하던 테마를 사용해서 쓴 또 하나의 소설. 하루키 소설에서 여성화자가 처음 등장한 걸로 일본 현지에서 화제가 됐다고 하는데 캐릭터가 꼭 여자였어야만 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커리어 초반에 비해 후반으로 갈수록 장편의 분량이 늘어나는ㅡ전작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도 700p가 넘으니까ㅡ 와중에 이번에는 절반 정도의 분량이라 이야기가 조금 성기지 않나 느꼈는데, 곰곰 생각해보니 우화 같이 느껴지는 작품의 성격에는 적당한 분량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일관되도록 참 좋아하는 여성의 가슴에 대한 묘사를 이번에도 역시나 빠뜨리지 않았고 클래식 음악이나 문학 관련 분야의 네임드도 적절히 거론한다. 참 일관적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예전 인터넷이 활발하지 않아 정보 찾기가 쉽지 않을 때 지적 스노비즘을 굉장히 자극했던지라 하루키가 먹혔던 면도 있었는데 격세지감이다. 지금 그의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왜냐ㅡ라는 건 근본적인 문제야. 그 얘길 하자고 들면 복잡해져. 그보다 차라리 그 발언이 불러오는 효과를 얘기하는 게 어떨까? 내가 늘 놀라는 건, 그런 말을 들은 여자들이 보이는 반응이야. 면전에서 그런 심한 말을 들은 여자들이 보이는 반응이야. 면전에서 그런 심한 말을 들으면 대개 진심으로 분개하거나, 아니면 웃어넘기는 게 보통일 거라고 그쪽은 생각할지 몰라. 물론 그런 사람도 없진 않아. 그래도 그 수는 놀랄 만큼 적어. 대부분의 여성은····· 그냥 상처받지. 깊게, 오래. 그리고 어떤 경우엔 기묘한 말을 내뱉기도 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말을."

(...)

"즐기는 건 아니야. 단지 나로서는 정말 신기하단 말이지. 아무리 봐도 아름답다고 할 수밖에 없는 여자들이, 혹은 외모가 명백히 출중한 여자들이 대놓고 못생겼단 지적을 당하고서 필요 이상으로 당황하거나 상처받는 게."

(...)

"그래. 하긴 그런지도 몰라. 나는 병들었는지. 그렇지만 변명은 아닌데, 병든 인간의 눈으로 보면 더 병든 건 오히려 세상이거든. 보라고, 루키즘이란 것이 강하게 부정당하는 시대잖아. 너도나도 미인 대회를 소리 높여 비판해. 대중 앞에서 '못생긴 여자'같은 말을 입에 올렸다간 뭇매 맞기 십상일걸. 하지만 한편으로 텔레비전을 켜봐. 잡지를 펼쳐봐. 화장품 미용 성형과 에스테틱 살롱 광고가 넘쳐나거든. 그거, 아무리 생각해도 이중 잣대 아닌가? 무의미한 개그라고 할까?"(22-23p)

 

 

한 소녀가 자기 얼굴을 찾으러 가는 이야기다. 소녀는 어느 날 자기 얼굴을 잃어버린다. 곤히 잠든 사이 누가 훔쳐가버렸다. 그래서 어떻게든 되찾아야 한다.

하지만 자기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

결국 소녀는 혼자 '얼굴 찾기'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우선 주변에 있던 임시 얼굴을 원래 얼굴이 있던 자리에 붙이고 나선다.

(...)

그렇다. 임시방편으로 일단 붙이고 다니던 얼굴이 그때는 이미 진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여행하며 체험한 갖가지 일이, 가는 곳마다 마음을 스쳤던 색색깔의 생각이, 희망이며 슬픔이며 동경이며 실망의 조각조각이 그녀 자신의 진정한 얼굴을 풍요롭고 생생하게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그녀 본래의 얼굴 외에 무엇도 아니었다. 청년이 한참이나 똑바로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그 사실을 역력히 이해했다.(30-32p)

 

 

오랜만에 온 고향이지만 애틋함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과거 이 집에 살 때 직접 겪고 보고 들었던 일 그 모두가 현재의 자신과는 아무 관계 없는, 머나먼 딴 세상의 아득한 옛일 같기만 하다. 본 기억도 나지 않는 빛바랜 앨범을 별 흥미도 없는데 억지로 들여다봐야 하는 듯한 기분이다. 앨범 속의 나는 나 같으면서도 내가 아니다. 나를 조금 닮은 다른 누군가다. 주위의 온갖 것이ㅡ형태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ㅡ사이즈가 맞지 않는 빌린 드레스처럼 지금의 그녀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122p)

 

 

"저기, 엄마 말이야. 요즘 들어 좀 변한 것 같지 않아?" 가호는 마음먹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

"그게, 네가 그렇게 느끼는 건 그만큼 성장해서가 아닐까."

"내가 성장해?"

"대학을 졸업하고 집을 떠나 독립했고, 보아하니 그림 일도 순조로운 모양이고. 이제 어린애가 아니지. 뭐랄까, 어엿한 성인 여성이 됐어. 그러니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눈으로 엄마를 보게 된 거 아닐까."(132-133p)

 

 

뭐, 그건 그렇고 아마 벤야민은 이렇게 말했을 거야. 진정한 이야기란 눈에 보이는 형태로든 감춰진 형태로든 반드시 어떤 유용성을 포함한다고. 요컨대 실익 없는 이야기는 시시하다, 재미없다, 무가치하다는 뜻 아닐까. 내 생각엔 그래.(164-165p)

 

 

가호는 비를 바라보며 자문한다. 나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틀린 것, 사악한 것이라고 단호히 거부해야 할까? 그도 아니면 전부 다른 세계에서 일어난 일로 묵살하고 망각해버려야 할까? 진실에 몇 가지 측면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올바름에도 몇 가지 측면이 있다. 무엇을 택해도 정답이 되고, 무엇을 택해도 오답이 된다.(212p)

 

 

하지만 그런 즐거운 산책도 그리 오래 이어지진 않는다. 집을 벗어나 어느 특정 지점에 이르면 홀은 발을 딱 멈추고 더는 따라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지점에 홀에게만 보이는 '경계선'이 그어져 있는 모양이었다. 고양이에게는 보이고 가호에게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 그리고 고양이는 결코 그 경계선을 넘는 일이 없었다. 마치 그곳에 고압 전류가 흐르는 펜스가 둘러쳐진 것처럼.

(...)

어쩌면 그와 똑같은 경계선이 인간 세계에도 존재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자신을 위한 경계선이 어디에 어떻게 그어져 있는지 그녀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만일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경계선을 밟고 넘어갔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영역에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두 번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없을지 모른다. 부모님과 다시 만날 수도 없다. 아늑한 자기 침대에서 잠들지도 못한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것조차 전혀 가늠할 수 없다. 그곳은 지금껏 본 적 없는 미지의 세계다······ 그런 것을 상상하면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다.(219-220p)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났을 때 원래 세계로 돌아와 있으면 좋겠다고 가호는 생각한다.

(...)

하지만 바람이 이뤄지는 일은 물론 없었다.

(...)

그러므로 나는 이 세계의 출구를 찾아내야 한다. 그곳을 통과해서 변화되기 전의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224-225p)

 

 

"그럴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 거기에 어떤 의도가 있을지도 모르고, 혹은 그저 오해가 번진 건지도 몰라. 지금으로선 그 이상은 나도 말할 수 없어. 내게 허락된 건 당신에게 정당한 방법으로 힌트를 주는 일뿐이야."

"요컨대 당신은 나를 보호하고 있지만, 내게 필요한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밝히는 일은 못한다?"

"가능한 한 유익한 어드바이스를, 가능한 한 모호한 형태로 클라이언트에게 제공하는 게 우리 수호천사에게 맡겨진 주요 역할이거든. 그게 윗분의ㅡ아주 높이 계신 윗분의ㅡ기본 방침이야. 이해해주면 좋겠어.“

(...)

"일반적인 원칙론으로 흘러서 미안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새겨뒀으면 하는 게 있어. 그게 뭐냐면,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심각한 혼란은 대부분 원인과 결과 사이의 등가성을 찾아내지 못해서 생긴다는 거야."

(...)

"들어봐, 가호 씨, 아까도 말했다시피 당신은 깊은 의미를 지니는 경계선 하나를 밟고 넘어가버렸고, 이미 이곳은 과거에 당신이 잘 알던 세계가 아니라고. 이곳은 당신 눈에 비치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야. 당신은 당신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의 뒷면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돼. 원인과 결과 사이를 잇는 실을 찾아내야 해. 말할 필요도 없이 쉬운 일은 아니야. 하지만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총명하고 독립적인 여성이니까. 그리고 당신은 자신의 이야기를 생각대로 자아낼 수 있어. 대단히 중요한 재능이지. 이 세계에서 그 재능이 당신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될 거야. 발터 벤야민이 매우 적절히 논했다시피, 좋은 이야기란 반드시 어떤 유용성을 포함하고 있으니까."

(...)

"당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실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실은 존재하는지도 모르지. 안에 있는 것이 실은 밖에 있을지도 모르고, 밖에 있는 것이 실은 안에 있는지도 몰라. 내가 전하려는 말이 뭔지 이해하겠어? 그래, 여긴 속임수 그림 같은 세계라고. 이 세계를 무사히 헤쳐나가려면 당신 자신이 가진 본래의 힘뿐 아니라 거기에 더해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해. 무엇보다도 유용성이 요구되지. 변변찮은 이 몸도 당신에게 어떤 유용성이 되기를 원하는 한 사람이고.(278-280p)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하나하나가 너무도 지나치게 그럴싸하다. 애당초 책을 사서 조금 걸어간 곳에 마친 독서하기 딱 좋은 근사한 카페가 새로 문을 열었다니, 마치 짜맞춘 듯 너무 매끄럽지 않은가. 의혹의 눈길로 보자면 죄다 실물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모조품 같기도 하다. 이게 '현실'이라 불리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현실이란 얼마나 얄팍한 것일까. 영화 촬영장의 세트와 마찬가지로 앞에서 보면 반짝거리는 궁전의 넓은 홀도, 화려한 무도회장도, 멋들어진 거리도, 뒤로 돌아가서 보니 허술한 합판과 울툭불툭 옹이투성이 버팀목뿐이더라는 얘기가 될 것 같다.

반면에 흰개미 여왕이며 개미핥기 부부며 BMW 모터사이클을 타는 수호천사, '칼 가는 집'의 귀가 뾰족한 주인······ 이들은 내게 얼마나 확실한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가. 그들은ㅡ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존재할 리 없는 그것들은ㅡ내 눈에 다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훨씬 리얼한 존재로 비친다. 그들은 내 마음에 그대로 쭉쭉 파고드는 듯하다. 그렇다, 그들은 메타포인 동시에 명백한 실체다. 그 둘(메타포와 실체)은 분명히 분리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코끼리 알'을 떠올렸다. 미소라와 고양이 스칼릿 조핸슨이 숲속으로 찾으러 간 코끼리 알ㅡ그것은 뭔가의 메타포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실은 그건 메타포도 뭣도 아닌, 단순한 '코끼리 알'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코끼리 알'외의 의미는 무엇하나 포함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의 작가인 가호조차 판단할 수 없었다. 짐작건대 '코끼리 알'의 진짜 의미를 알고 있는 건 미소라의 수호천사이기도 한 고양이 스칼릿 조핸슨뿐이리라.(338-339p)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머리를 짜내도 그 외의 결말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완전히 납작해진 미소라는 몇 주일이 걸려 어찌어찌 다시 부풀어올라(그 과정을 노인과 고양이 스칼릿 조핸슨이 곁에서 참을성 있게 지켜본다), 숲을 벗어나 경계선을 넘어서 무사히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한 가정생활로 차츰 복귀한다. 새로 태어난 미소라는 피구도 즐기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자면 일단 납작하게 밟혀 죽어야 했다. 숲의 노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암코양이/수호천사인 스칼릿 조핸슨도 짐작건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343p)

 

 

<하루키의 한결같은 포인트>

 

어머니는 말했다. "혹시 너 브래지어에 적정 사이즈라는 게 있다는 걸 모르는 거 아니니? 널 보면 전부터 가끔 마음에 걸렸는데, 몸 선을 아름답게 유지하는 건 중요한 일이야. 수입이 불안정한 프리랜서라지만 전문점에 가서 알맞은 사이즈로 번듯한 브래지어를 살 정도의 여유는 있을 테지? 흔한 마트에서 파는 대충 만든 싸구려 말고. 남자는 말이야, 여자의 가슴 모양을 반드시 체크하는 법이야. 그러니까 그런 점에 더 세심히 신경써야 해. 누가 뭐래도 넌 아직 젊디젊은 독신 여성이니까. 너만 좋다면 그 정도는 내가 같이 가서 사줄 수도 있는데."(190p)

 

 

아버지는 음악에 관한 것만은ㅡ대개의 일은 어머니의 바람을 묵묵히 따랐는데ㅡ완강하게 고집을 부렸다. 그렇게 구식 스테레오 장치(럭스만의 진공관 앰프, 스피커는 탄노이의 버클리)와 레코드 선반은 여전히 당당하게 거실에 버티고 있었다. 아버지에게는 거실 소파에 앉아 브루노 발터나 지노 프란체스카티, 상송 프랑수아, 피에르 푸르니에가 연주하는 다소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음악에 귀기울이는 일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기쁨 중 하나였다.

가호는 컬렉션 중에서 파블로 카살스가 지휘한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박스 세트 앨범을 골라 그중 한 장을 레코드플레이어에 얹고 바늘을 내려놓았다.(321p)

 

 

자, 윗옷을 헤쳐 가슴을 드러내.

(...)

어머니의 가슴을 보는 건 매우 오랜만이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노화한 흔적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팽팽하고 맑은 피부, 적당한 크기의 가슴, 생명력이 느껴지는 모양 좋은 유두. 예전에 보았을 때보다 오히려 젊어진 느낌조차 든다.

(...)

하지만 어머니의 매끈하고 모양 좋은 가슴과 그것을 겨눈 칼끝을 보는 사이,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심장의 조용한 고동을 느끼는 사이, 가호의 머릿속 의식이 급격히 혼탁해지기 시작했다. 과거에 이 가슴에서, 이 유두에서 나는 양분을 얻었어, 가호는 생각했다. 넌 내 모유로 키웠어.(356-357p)

 

 

 

ㅡ 무라카미 하루키, <가호>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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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28

 

 

올해 읽은 책 중 후진 걸로 수위를 다툴 만한 책이다. 모임 책이 아니었으면 읽다가 던졌을 듯. 전반적으로 자신의 주장일 뿐인 분석에 대해 단언하며 어거지로 밀어붙이는 글쓰기 방식이 거슬리며, 페미니즘을 아주 조금 알게 된 기득권 중년 남성이 '이런 거 처음 듣는 얘기죠?' 라며 신나서 이런저런 썰을 풀어놓는데 놀랍게도 재미가 없고, 짜증만 났다.

 

 

 

 

돌아온 진짜 남편이 화내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사달이 벌어지게 된 것에 근본적인 잘못이 남편에게 없지 않지만 일단 그의 분노를 납득할 수 있다.

(...)

왜 시부모가 길길이 날뛴 것일까? 같이 속아놓고 왜 그들까지 손가락질을 해댄 것일까? 공범이었으면서도 왜 아니라고 회피한 것일까?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타자화의 메커니즘이다. '난 너와 달라'라며 구별 짓는 것으로 시작해서 구별이 차별이 되게 만든다.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여 자기와는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게 하고 그 문제의 모든 것을 하나의 희생양에게로 전가시키는 것이다.

(...)

자신들의 잘못을 떠넘김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잘못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변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과격하고 더 극단적인 손가락질을 해대는 것이다. 공범이기에 다급한 그 심경을 감추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26-27p)

 

 

아예 결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한 번 결혼하면 두 번 다시 결혼하지 말라는 족쇄다. 이전 남편을 버리고 결혼하지 말라는 선의의 말이 아니라 '남편이 죽어도 넌 혼자 살라'는 강압이었다. '과부는 절대 다시 결혼하지 말라'는 협박을 하게 된 데는 미묘한 정치적 속셈이 깔려 있었다.

국가적 차원에서 '적서차별'과 함께 고안해낸 것이 '과부재혼금지'였다. 남자들에게 적서차별이 있었다면 여성들에겐 재혼금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 두 제도 밑에는 동일한 메커니즘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한정된 관직 숫자 문제다.

(...)

만약 재혼한다면 다시 자식을 낳을 수 있기에 문제가 지속된다. 아니, 정확하게는 다시 아들을 낳게 되니 문제이다. 그러니까 양반 남편이 죽은 뒤 그 부인이 다른 양반 남자의 처가 된다면 또다시 아들을 낳게 될 위험이 있다.

(...)

과부가 시집가도 정실부인이지 첩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그녀는 새로 시집가서 '처'가 되지 '첩'이 되는 것은 아니기에 적서차별로 그 아들들의 관직 진출을 묶어버릴 수도 없어 골치가 아픈 것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과부재혼금지다. 한마디로 남자들이 자기들의 한정된 밥그릇싸움 때문에 여자들의 결혼과 출산을 제한한 음모인 것이다.(59-60p)

 

 

이런 이야기들은 이른바 <열녀전>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었는데, 그 <열녀전>의 등장인물이나 유포자나 기록자는 모두 여자들이었다. 대놓고 남자들이 나서는 것보다 여자를 대리인으로 여자를 통제하는 효과가 훨씬 위력적이다. 개인은 똑똑해도 군중은 멍청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철저히 악용하는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여기저기서 열녀, 열부가 앞 다퉈 목숨을 끊는다. 이들 열녀들을 보다 보면 조금씩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진짜 열녀도 있지만 열녀이고 싶은 사람도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고개를 든다. 스스로 선택해서 열녀가 되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 의해 열녀가 되는 경우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런 열녀가 진짜로 존재했다기보다는 존재하게 했다는 것이다. 열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열녀를 만들어냈던 것이다.(68-69p)

 

 

효자 만들기에 비해 열녀 만들기는 위험 부담이 크다. 효자 만들기 메커니즘의 핵심인 먹어버린 산딸기나 푹 고아서 몸보신한 잉어는 일회적으로 사라져버려 절대로 추적할 수 없지만 열녀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검증하려 들면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 수 있다. 게다가 열녀 만들기 메커니즘의 열녀가 인간이기에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위험도 있다.

(...)

그래서 가장 확실한 방법을 선택한다. 그건 산딸기처럼 잉어처럼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바로 열녀의 죽음 말이다.

물론 대놓고 여인을 죽일 수는 없다. 살인이 큰 죄인 것은 무모하고 각박한 그들도 안다. 그러니 알아서 죽게 하는 것이다. 자살을 방조, 아니 정확하게는 자살을 강요한다. 왜 그렇게도 많은 집안사람들이 과부가 된 여인에게 관심을 갖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73-74p)

 

 

혹시 혼동하실지 몰라 덧붙이자면, 처가 죽으면 새로 처를 맞아들이지, 첩이 승격되어 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첩은 그저 첩일 따름이다.(87p)

 

 

ㅡ 유광수, <가족 기담> 中, 북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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