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13
나쁘지 않았다. 소설을 빌려 문학 작법 강의를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느낌도 들었고.
시간이 흘러 이제는 우리가 실수했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이 도시에 생겨나고 있다. 이들을 구덩이 속에 가둬두는 게 지나친 처사라고, 전쟁의 허용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라고. 그냥 죽여버리든지, 노예로 삼든지, 아니면 돌려보내야 한다고들 하는데, 아, 나는 이 구덩이들이 좋다. 모든 건 결국 변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니까. 1년 전의 아테네인들을 떠올려 본다. 달빛을 받아 파도처럼 번쩍거리던 갑옷, 밤잠을 다 설치게 만들고 개들을 울부짖게 하던 그들의 함성, 우리 섬을 둘러싸고 미끄러지듯 돌던 수백 척의 배들. 먹이를 탐하는 거대한 상어 떼 같았지. 이 구덩이들은 우리에게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러준다.(17p)
노인은 소년의 외양으로 보건대 해를 넘기지 못할 거라고 했다. 조만간 죽을 거라고. 아주 많이 아파 보인다고. 그래도 확신할 수는 없다고, 미래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저 다음에 일어나는 일만 있을 뿐. 그래서 양이든 고양이든 개든 그렇게 배를 가르는 거라고. 달리 무엇이 더 있겠느냐고. 그 행위는 무언가였고, 인간은 누구든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거라고.(49p)
개선문에서 본 조각들이 떠오르지만 그것보다 훨씬 아름답다. 강물에 닿는 빛은 내가 이 세상에서 본 어떤 것과도 다른데도 어쩐지 알 것 같은 빛깔이다. 겔론은 최고의 연극이 바로 그런 것라고 말한다. 충분히 진실하다면, 처음에는 아무리 이상해 보여도 결국 다 알아보게 된다나. 트로이아 전쟁이 비록 호메로스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우리 모두 알지만 계속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89-90p)
아닌데, 정말 아니야. 있잖아, 난 네 얘기 듣는 게 좋아. 월식이며 수의 조화며 그런 모든 말들 듣는 게 다 좋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는, 나한테 있는 지독하게 불쾌한 면인데, 네가 말하는 내내 내 귓가에 이렇게 속삭이는 거야. 저 여자, 자기가 너보다 낫다고 생각해. 쟤 눈엔 넌 백수에다 기형인 발이나 끌고 다니는 재수 없는 놈이야. 그냥 적당히 해변 좀 걸어주는 거야. 절뚝거리는 너 때문에 달팽이처럼 느리게 하는 산책. 네가 주인한테 돈 냈으니까 옆에서 어정거리는 것뿐이야. 노예든 아니든 속으로는 자기가 잘났고 너는 하찮은 놈이라는 걸 잘 알지. 그런 말들이 머릿속에서 들려오면 소리를 지르고 싶어지는데 그러지 않아. 내가 느끼는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전가할 말을 내뱉게 돼. 난 빌어먹을 쓰레기야.(191p)
천둥이 우르르 울린다.
"저게 징조야. 제우스도 우리가 함께이길 바라는 거야."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저건 그냥 구름에 수증기가 차오르는 현상이에요. 공기가 서로 만나면 충돌이 일어나거든요. 경주 도중에 전차가 서로 부딪치는 순간을 떠올려 보세요. 당연히 소리도 나겠죠? 아버지가 저 현상에 대한 글을 쓴 적도 있어요."
"그래도 징조일 수도 있잖아. 안 그래? 둘 다이면 안 되는거야?"(194p)
그가 들려준 이야기에[ 뭐라고 말해야 할지,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알카르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리나르는 좀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내 목숨을 살려주고 자기들 목숨은 잃었다. 나였어도 똑같이 했을까? 절대로 아니다. 내가 뛰어든 건 겔론 때문이었다. 파케스라면 구해주려 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무조건 도망쳤을 거다. 나 같은 놈이 뭐라고 자기 목숨을 걸면서 구해주려 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적어도 알카르는 도와주러 오면서 정말로 위험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시라쿠사인이니 본인은 보호받을 거라고 여겼을까. 아니다, 정말로 그런 확신을 가지고 나를 구했다는 생각은 어쩐지 들지가 않는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돌진하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이긴커녕 더 불안해진다.(300-301p)
희망을 걸어볼 길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뿐이라고.
(...)
엄마와 알렉토는 젊은 시절 무척 가까운 사이였지만 이젠 둘 다 젊지도 않다. 어쩌면 나이가 들었다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의 인생도 얼마 안 남았으니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느낄지도. 하지만 이건 희망 사항일 뿐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 깊은 곳에선 말이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주름이 생겨도 그 믿음은 안 바뀐다.(324p)
문득 저 쥐들은 그냥 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저들은 이 세상의 모든 망가진 존재다. 무너져 가는 모든 존재, 우리 안에서 무너져 내리길 바라는 모든 것들이다. 저들은 히카라를 불태우던 아테네인이고, 그 아테네인을 채석장에 던져 넣던 시라쿠사인이다.
(...)
눈에 보이지 않는 병이다. 저 쥐들은 무심한 하늘 아래 존재하는 최악의 모든 것이다. 그러나 아울로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그에 비하면 몹시 연약할지라도, 바로 우리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말한다. 그게 우리가 한번 해보려는 것이다. 이것저것을 만들어내고, 노래를 부르고, 음식을 요리하는 우리다. 그게 우리의 입맞춤이고, 한겨울 불가에 둘러앉아 나누는 이야기다. 그게 품위라는 것이다. 우리가 내어줄 수 있는 전부다. 나는 속으로 계속 그렇게 되뇐다. 폐까 타들어 가고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남은 힘이 거의 없지만 계속해서 아울로스를 분다. 나만의 노래를 연주한다.(345-346p)
요란한 하늘 아래 미미한 우리가 움직이고 있다. 욕망으로 몸을 떨며, 우리가 뭔가를 해내고 있다는 확신에 겨운 채. 밑으로는 서늘한 땅이 자리하고 위로는 영원이 눈을 끔뻑이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대사를 속삭인다. 이것이 내게는 무엇보다 다정하고 섬세한 일로 여겨진다.(384p)
ㅡ 퍼디아 레넌, <영광 없는 영웅들> 中, 다산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