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9/30

 

매체에 실리는 글을 어떻게 쓰는지 알아보자는 생각으로 말이다. 몇 편 읽고 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들과 비슷한 글을 쓰기 힘든 이유는 많아 보였다. 거기에는 기술적 역량이라는 차원 외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문제가 있었다. 사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어쩌면 하고 싶은 말 역시 어디 쌓여 있는 게 아니라 지어내야 하는 것이고, 그건 픽션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골치 아픈 일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경험의 문제가 있었다. 언론인이었던 히친스는 논외로 하고, 오웰이나 그레이엄 그린의 글에는 왜 이런 것을 소설에 활용하지 않고 에세이로 썼을까 싶은 인상적인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럴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내게는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낙담한 얘기는 이 정도로 마치자. 지금은 왜 그들이 그런 소재를 아깝게 에세이에 넣었는지 짐작된다. 에세이에 넣었을 때만 보존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뿐 아니라 희곡이나 시, 어느 것도 마찬가지지만 그 형식에 적절한 것이 되기 위해 경험은 일정한 수정이 불가피해진다. 그러나 그렇게 깎여나갈 부분이 중요한 거라면 어떻게 하는가? 그들은 이를 소설이 아닌 에세이에 넣어 디테일을 보존한다. 에세이는 어떻게 그런 보존이 가능한가? 그 디테일의 보존이 에세이의 목적이며 이를 방해할 어떤 규칙도 없기 때문이다. 즉 에세이는 문학으로 취급되고 있는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경험의 문학화를 제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만일 운 좋게도 작가가 어떤 경험을 디테일 손상 없이 소설에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고 하자.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등장인물의 경험으로 묘사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본래의 경험과는 다른 맥락을 갖게 된다.

에세이 출판은 이런 것이다. 작가는 디테일을 보존한다. 독자는 그 디테일을 구입한다. 독자는 자기가 읽게 될 것이 예술(형식이 지배하는 비인간적 공간)이 아니며, 그에 들어갈 수 없어 여기 있게 된 삶의 잉여라는 점을 좋아하는 것이다.(29-30p)

 

 

 

ㅡ 김영준, <편집자의 책읽기> 中,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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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30

 

 

하반기에 읽은 책 중 아직까지는 이게 제일 기억에 남을 듯. 꽤나 인상적인 책이다.

 

 

 

서로 다른 학문, 학파, 방법론을 하나의 기치 아래 한데 모으는 것은 어려워 보이지만, 적어도 지식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설명할 때는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몇 가지 지점을 찾을 수 있다. 그중 하나가 고독이라는 개념에 대한 일관된 반론이다. 지식을 생산한다는 것은 고독한 작업이 아니라 집합체적, 즉 사회적 기획이라는 이야기이다. 과학자들의 기록이나 과학자들에 대한 서술에서 고독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면 그것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지식의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은폐가 필요한 사안이라는 뜻일 뿐이다. 보조자들은 숨겨지고(샤핀, 지붐), 대화는 지워지며(라투르), 기억은 재창조되고, 신화적인 이야기가 유포된다(섀퍼). 이러한 지식의 집합체적 생산은 (포퍼가 반증 검증의 맥락에서 이미 강조했듯이) 정당화의 맥락뿐만 아니라 발견의 맥락에서도 드러나는 특징이다. 고독에 대한 이러한 문제 제기의 이면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들의 인지적 작용에 존재하는 특수성이다. 고독[에 대한 신화]은 지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접근을 막고, (분석가나 민족지학자 같은) 타자의 현전을 금지하며, 설령 접근을 허용하더라도 그곳엔 조용히 명상하는 개인이나 관념을 종이에 옮기는 '사상가'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요소는 이 맥락의 어디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 종이, 펜, 책, 동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관념들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체해야 할 앎의 주체에 대한 금욕적이거나 고독한 그림이다. 과학이 실제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금지된 영역에 들어가서 과학적 사실의 생산에 관여하는 절차, 기술, 대화를 따라가야만 한다. 우리는 앎을 행하는 자들의 눈과 손, 맥락을 따라가야 한다.(14-16p)

 

 

"간호사가 그를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이게 내가 원하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방향적' 대화를 '완전한' 대화로 만들기 위해 호킹의 보조자는 일반적인 대면 상호작용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반응을 미리 예측하고, 그의 문장을 완성시키며, 때로는 그에게 목소리를 준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호킹의 경우 더 극대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들은 사용자가 문장들을 더 빨리 구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옵션을 제공하는 컴퓨터처럼 작동한다. 어느 정도는 그들이 사용자의 패턴을 학습했다고 말할 수 있다. 컴퓨터처럼 그들도 실수를 한다. 호킹의 좌절감이 이를 분명히 드러낸다. 즉, 가끔 그는 다른 말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차이가 존재한다. 호킹의 문장들을 예측하고 완성하는 것 이상으로 그의 보조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을 통해 만들어낸 역량을 호킹의 것으로 간주하고 그에게 귀속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역량의 상당 부분은 그들 자신의 노동의 산물이다. 이러한 점에서 호킹의 역할은 정신분석 환경에서 정신분석가의 역할에 비유될 수 있다. 훈련 중인 학생 상담사로 가장한 실험자가 등장하는 해럴드 가핑클의 논의를 이와 연결시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실험에서 실험자는 환자의 질문 내용을 고려하지 않고, 미리 정해진 순서대로 예와 아니오로만 응답한다. 환자들은 자신들이 상담사의 거의 모든 작업을 직접 수행하지만(호킹 주변 사람들처럼), 그럼에도 치료의 모든 공로를 상담사에게 돌린다.(59-60p)

 

 

그러나 이것이 호킹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예외적인 상황인 것은 아니다. 다른 교수들도 유사한 방식으로 작업하리라는 점은 충분히 상상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순수한 정신은 고립과는 거리가 멀며, 이론 작업이 물질적이고 집합적인 실천이라는 점을 가시화한다. 이는 연구실에서 학생과 지도 교수 사이의 위계화된 조직을 드러내고, 주제가 할당되는 방식(이전 학생이 수행한 작업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방식)과 학생이 한 작업에 대해 지도 교수가 (실제 그들의 기여와는 무관하게) 공로를 인정받는 저작권의 메커니즘 또한 드러낸다. 실제로 지도 교수는 일종의 정신적 아버지나 안내자로 행위하는데, 이는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감각을 통해 개발되고, 여러 해에 걸친 경험에 기반한 직관과 연결된다. 지도 교수는 문제를 선택하고, 무엇이 흥미로운지를 결정하지만 '세부 사항들'은 학생들에게 맡긴다. 학생들은 계산을 수행하고, 때로는 논문 전체를 작성한다. 종종 '저자'는 편집자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호킹의 장애는 추가적인 위임 과정을 초래함으로써, 평소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던 것들을 드러낼 뿐 아니라, 그의 역량이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집합화되고 물질화되어 있다는 사실까지도 드러낸다. 실제로 그의 경우를 통해 일반적으로 민족지학자에게 보이지 않던 모든 신체적 움직임과 인지적 작동들이 가시화된다. 그것들은 과학자의 개인적 차원과 관련되거나 일반적으로 하나의 단일한 신체에 통합되어(예를 들어, 비장애인 물리학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다. 그런데 호킹의 경우 그러한 작동들은 결과적으로 다른 신체(테크니션, 보조자, 기계 등)에 외재화되고 통합된다. 따라서 그의 능력이 다른 사람들과 기계들에 위임되고 증식되며 재분산되는 작업을 '보는' 것이 가능해지는데, 이는 그의(혹은 다른 어떤 물리학자의) 정신이 기능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누가 누구이며 누가 누구와 이야기하며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는지와 같이, 연구실을 이루는 관계와 실천에 기반하여 우리가 호킹의 연구실을 재구성하는 작업은 호킹 신체의 비가시적인 일부분을 가시화할 수 있게 한다.

(...)

그는, 이를테면 그의 신체와 정신을 이루는 한 집합체의 단순한 결과물이거나 혹은 그 등가물인가? 컴퓨터는 호킹이 정보를 읽고 동원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며, 그의 학생들은 정당화하고, 계산하고, 증명하고 글 쓰는 작업을 가능하게 하지만, 대화를 전환시키는 것은 호킹의 예와 아니오(그리고 컴퓨터를 통한 몇 개의 문장들)이다. 그것들은 학생들이 계속 나아가게 해주고, 그들이 어디에서 틀렸는지 혹은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알게 해주며, 수정할 수 있게 한다. 나에게 이 과정은 행위자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드러내는 과정으로 보였다. 그것은 작동 중인 집합체였다.

(...)

학생들은 호킹이 하는 일을 해석하는 방식을 훈련받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그에 맞춰야만 한다. 그들은 그의 문장들을 완성하고, 문제를 다시 번역하거나 공식화하며, 다른 교수들에게 설명을 듣고, 계산을 하는 등의 일을 수행한다. 하지만 다시 보면, 이는 팀의 '수장' 자리에 있는 모든 관리자나 실험실 책임자 혹은 어떤 노련한 과학자에게서도 나타나는 특징이 아닌가?(157-159p)

 

 

호킹은 천체물리학자가 되기로 선택해 운이 좋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천체물리학자가 되는 것은 (···) 어떤 신체적 능력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생각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손이 필요하고,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 때는 다른 사람의 손이라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눈이 필요하다. 이 손들이 작업하고, 쓰고, 계산하고, 그리는 것을 보는 눈. 호킹이 자신을 둘러싼 인간/기계 집합체가 제공하는 정보를 (눈썹을 치켜올리는 방식으로) 선택하는 방법을 발전시켜왔듯이,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그려지는 다이어그램으로부터 정보를 동원하고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눈은 개인들, 기계들, 이론적 도구들로 이루어진 역량들의 네트워크를 절합하고 활성화시키는 지점이 된다.(172-173p)

 

 

 

ㅡ 엘렌 미알레, <호킹 주식회사> 中, 동녘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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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21

 

 

혐오 발언을 일삼는 사람들은 언제나 표현의 자유를 외칩니다. 혐오 표현을 금지하려고 하면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억압한다며 반박하죠. 이들을 설득할 방법도 필요도 없습니다. 표현의 자유라는 개념은 근대 국민국가 건설 과정의 산물입니다.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에 비해 약한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비판하고 말할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표현의 자유는 국가와 개인 혹은 사회적 강자와 약자의 관계에서,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등장한 개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표현의 자유는 역전된 방식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

이런 말들을 표현의 자유로 옹호하는 것은 그 개념의 원래 맥락을 뒤집는 것입니다. 강자가 약자에게 말할 때는 표현의 자유를 가질 수 없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하고 싶은 말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허가증이 아니니까요.

(...)

저는 근본적으로 '표현의 자유'보다 '표현의 책임'이 더 강조되는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44-45p)

 

 

저는 세월호 언설과 관련해서 항상 의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늘 "잊지 말자"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누구의 관점인가요? 세월호와 무관한 사람들은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잊을 수밖에 없는 처지죠. 반면, 세월호와 관련된 사람들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잊기 위해 온몸을 다해 노력할지도 모릅니다.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 저는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에서 일종의 폭력성마저 느낍니다. 그 비극과 무관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다짐, 그것이 "잊지 않겠다"라는 말입니다.

아마 현대인에게 가족 또는 가정만큼 극단적인 경험의 차이를 보이는 영역도 없을 것입니다. 많은 이에게 가정은 노동과 폭력의 장소입니다.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휴식의 공간이지요. 그런데 거의 모든 공동체에서 가정은 '쉬는 곳'으로 인식됩니다.

각자 서 있는 자리의 다름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나의 처지와 상대방의 처지가 다를 때 우리는 미안함, 서러움, 분노, 절망, 죄의식 등 다양한 인지 작용을 경험하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가정은 친밀하고 평화로운 공간이라는 가족 신화나 부모와 자녀의 갈등이 대화의 주제가 될 때도 뭔가 불안하고 불편합니다. 이 모든 주제가 고아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으니까요.(54-55p)

 

 

일레인 스캐리는 그의 역작 「고통받는 몸」에서 각자도생과 불통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확신하는' 것이며 고통에 관해 듣는 것은 '의심하는'것이다." 내 고통은 내 몸 안에서 너무도 확실히 인지되는데, 타인의 고통은 내 몸 밖에 있기에 언제나 믿기 힘든 문제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한가지 사실이 정리되었습니다. 고통은 나눌 수 없습니다. 육체의 통약 불가능성 때문이지요.(59p)

 

 

여성을 위한 것은 남성에게 불이익을 준다는 제로섬의 사고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죠.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장애인을 위한 제도는 비장애인에게 불이익을 주는가?' '동성 혼인이 합법화되면 이성애자의 결혼은 불법이 되는가?'와 같은 질문도 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보편성이 객관성·과학·중립·공공의 이익으로까지 그 개념이 확대된 경우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인구의 약 15퍼센트인 장애인 관련 책자도 도서관에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장애인, 노인과 같은 소수자가 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여성만을 위한 것도 남성만을 위한 것도 아닌, 인류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

또한 페미니즘은 협상의 언어로서, 가부장제에 대한 대항 담론이 아닙니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에 반대, 대항하는 사유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성도, 남성도 모두 가부장제적 사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가부장제·이성애 중심·인종차별주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누구도 이런 상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극복(re-covery)되는 것이 아닙니다. 극복할 수가 없죠. 우리에게는 현실을 재발견하고 재해석(dis-covery)할 수 있는 상상력과 용기가 필요합니다.(79-80p)

 

 

한편, 증언자로서 역할을 해야 하는 이들은 '사람들이 내 경험을 듣고 믿을까?'라는 두려움과 의심에 시달립니다. 결국 자기 경험을 조절하거나 대개는 축소해서 말할 수밖에 없지요. 폭력 피해 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담자나 경찰,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믿지 못할 것 같아서 상대방의 수용력이나 가치관, 태도에 따라 자신의 피해 경험을 수정하거나 조절합니다.

(...)

이 지독한 분열을 홀로코스트 생존자 프리모 레비만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작가인 레비에게 인간이 어디까지 극한의 고통과 참혹함을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는지 증명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를 역사적 증언의 도구로 삼았던 것이지요. 그는 자신이 경험한 그대로 말하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기 시작하자 정작 세상은 그의 증언을 온전히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레비는 경험한 자아와 말하는 자아 사이의 간극을 조정해야 했습니다. 고통을 겪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배려해야 합니다. 듣는 이들이 견딜 수 있을 만큼만, 믿을 수 있을 만큼만 스스로를 검열하며 직접 경험한 고통을 축소하거나 완곡하게 다듬어야 했던 것입니다. 저는 레비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자기분열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윤리입니다. 특히 타인의 고통을 듣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타인의 경험을 의심합니다. 동시에 이에 공감하고 응답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듣는 자의 위치에도 분열이 있습니다. 영어에서 response(응답·반응)와 responsibility(책임)가 같은 어원을 가진 이유입니다. 누군가의 말에 반응한다는 것은 그 이야기와 책임있게 관계를 맺는다는 뜻입니다.(101-104p)

 

 

은유에 무지가 포개져 잘못 사용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커밍아웃'인데요, '학력 위조를 커밍아웃하라'라는 헤드라인의 신문 기사를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커밍아웃이라는 말이 이런 식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죠. 학력 위조는 도덕적으로 문제고, 이를 이용해 이익을 취했다면 실정법 위반이므로 불법입니다. 그러나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은 잘못을 드러내는 행위가 아닙니다.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경우입니다. 전혀 다른 차원이죠. 한편,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은 이성애자 관점의 표현입니다. 동성애자에게는 동성애 커뮤니티로의 '커밍 인'이죠. 동시에 많은 경우 동성애자에게 커밍아웃은 그들의 가족들을 '벽장'에 갇히게 하는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117p)

 

 

만남은 우연한 조우일 뿐 결코 영원한 합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예기치 못한 순간에, 어떤 낯선 타인과 아주 잠깐 말이 통할 수 있습니다.

(...)

이러한 찰나의 순간들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불꽃처럼 일어난 이해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다시 각자의 고립된 자리, 각자의 개별적인 삶의 문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 짧은 조우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통의 근원적 불가능성을 처절하게 깨닫고 난 뒤에 마주하는 이 '잠깐의 이해'는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애틋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젊었을 때는 연대를 굉장히 관념적으로 이해하거나 부담스럽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짧은 스침을 '평생의 약속'이나 '영원한 연대'로 무리하게 확대 해석하지 않을 때, 우리는 상대에게 덜 상처받고 덜 기대하면서도 그 순간이 건네준 온기를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습니다. 소통의 실패를 기본값으로 설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연히 찾아온 작은 이해의 기적을 기쁘게 누릴 수 있게 됩니다.(193-194p)

 

 

저는 극우에 대한 우리의 가능한 태도를 논의함으로써 이 책의 마무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이런 경우 "단호한 대처"는 진짜 내전을 불러올지도 모릅니다. '폭력'의 반대말은,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지금 한국 상황에서는 '공존을 향한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배려하고 공감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극우와의 공존은 극도의 인내와 긴장을 동반하는 신경증적 상황의 지속을 말합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극우세력과는 "서로 선을 넘지 않는" 협정도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극우와의 공존은 그들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다만 나와 생각이 다른 상대방의 '존재'를 존중한다는 뜻이죠.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며 그들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 '근절'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근절되는 세상사는 없습니다. 나쁜 통치는 형식을 달리할 뿐이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매번 달라지는 그 통치 형식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

우리의 고민이자 당면한 문제는 공존과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약자 혹은 일방의 몫이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이 고민은 사회운동의 이슈와 직결됩니다. 제가 생각하는 사회운동은 공존을 위한 지혜를 모으는 일입니다. 호모사피엔스가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해치고(극우의 논리), "단호히 대처"(진보의 논리)하고자 한다면 대립은 영원하겠지요. 의미있는 대립이 아니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서로를 소모하고 엄청난 희생을 초래하는 평행선 달리기죠. 저는 극우에 단호히 대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발상, 즉 상대를 제압하고 제거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상호 인정과 공존만이 모두가 살길이죠. 이 말은 극우의 폭력을 용인하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연히 극우는 공존을 수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존을 거부하므로 그들은 극우인 것입니다.

그러나 극우가 공존을 수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가 극우처럼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진보)는 양보했는데, 상대(극우)는 그렇지 않다는 피해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공존은 상대의 동의 없이도 한쪽의 의지만으로도 가능한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극우의 사고는 누군가의 설득으로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죠.

극우는 설득 대상이거나 투쟁의 대상도, 더구나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이들도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은 비판해도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요. 맑스의 말대로 민주주의가 배제 없는 사회라면, 공존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이죠. 평화는 갈등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극심한 갈등 상황을 견디는 힘입니다. 새로운 말의 가능성을 믿으면서, 새로운 인간성의 출현을 희망하면서 말입니다.(214-216p)

 

 

 

ㅡ 정희진,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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