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1/7
1. 결핍이 만들어낸 환상과 현실
<지우러 가는 길>의 윤지와 경선은 저마다의 결핍과 죄책감을 짊어진 채 서 있다. 윤지의 아버지는 딸이 고등학교 기숙사에 들어간 뒤 얼마 되지 않아 종적을 감췄다. 애정의 부재와 와해된 가정환경 속에서 윤지는 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품는걸로 보인다. 그러나 아이를 낳아 화목한 가정을 이루겠다는 윤지의 초기 열망은 안타깝게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인한다. 상대가 유부남 담임 교사라는 사실을 알고 시작한 관계였고, 그 끝이 파국일 수밖에 없음을 본능적으로 예감했음에도 윤지는 애써 외면하며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추구했다.
반면 싱글맘 가정에서 자란 경선은 엄마의 삶을 자기를 키우느라 저당 잡힌 세월로 받아들인다. 그 부채감과 죄책감은 경선으로 하여금 하루빨리 워킹홀리데이 통해 호주로 떠나 돈을 벌고자 한다. 이처럼 영화 속 두 소녀는 부모의 부재 혹은 과잉된 무게감에 짓눌린 채 자신의 현실을 탈출하려 애쓴다.
2. 문의 상징성과 '정상적'인 길에 대한 질문
작품 전반에 걸쳐 다양한 형상으로 끊임없이 등장하는 네모난 문은 시각적으로 매우 중요한 테마를 형성한다. 담을 넘어 몰래 들어가는 순간부터 기숙사, 청소년 쉼터, 편의점, 동물병원으로 이어지는 문들은 물리적 공간의 경계이자, 출산이라는 여성의 생리적 통로인 자궁과 질을 노골적으로 환기한다. 더 나아가 이 문들은 미성년 소녀들이 겪는 혼란스러운 통과의례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영화는 지배적인 사회가 규정한 '정답의 문'이나 '정상성의 길'만을 걷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 외곽의 대안적인 길을 응원한다. 청소년 쉼터에서 만난 임신한 중학생이 양수가 터졌을 때 차는 쉼터 정문이라는 제도권의 통로를 지나 병원으로 향한다.
반면 윤지의 여정은 다른 결을 띤다. 고민 끝에 윤지는 결국 약을 통한 임신중단을 택한다. 그리고 학교 담임 추모 공간에서 남편의 과거 성범죄 이력을 알면서도 명예를 지키려 윤지를 압박했던 담임의 아내를 마주한다. "선생님 애를 낳아서 드릴까요"라는 윤지의 도발은 위선을 가리기 위해 무던히 참아왔던 교사의 아내를 폭발시키고, 남편의 영정사진을 집어 던지고 깨뜨리며 추모 현장은 난장판이 된다. 이 대목에서 윤지와 경선은 학급의 다른 친구들처럼 밖으로 통하는 일반적인 길로 나가지 않는다. 두 사람은 아무도 향하지 않는 뒷쪽의 문을 선택해 뒤돌아 뚜벅뚜벅 걸어나간다. 사회가 지정해 놓은 통로를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문을 스스로 통과하는 순간이다.
3. 혼자에서 둘로
영화 초반, 차량들이 빠르게 지나치는 도로 옆 인도 위를 혼자 외롭게 걸어 올라가던 윤지의 모습은 엔딩에서 변화를 맞이한다. 약 복용을 통해 임신중단을 마치고 윤지의 아이를 함께 땅에 묻어주고 돌아오는 길, 윤지는 아이를 잃고 다시 혼자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경선이라는 친구가 생겼다. 영화는 한 공간을 혼자 외롭게 올라가던 윤지가 이제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버스정류장에서 서로 기댄 모습을 비추며 끝을 맺는다.
다만 윤지가 복용하는 약물의 복용법이나 과정을 지나칠 정도로 세세하게 묘사하는 후반부 일부 장면은 영화적 몰입감을 약화시키고 마치 공익홍보영상을 보는 듯한 연출적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ㅡ 유재인, <지우러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