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5/29

 

 

먼저 현실과 실재의 경계에 대한 이야기 자체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오래된 이야기다. 플라톤이 본질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를 나누어 놓은 이후로는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현실은 실재가 아니라는 생각에 별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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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욕망의 주체인 한에 있어서, 현실과 실재의 경계는 별로 의미가 없어진다. 현실의 ‘나’는 욕망의 실현을 위한 가상일 수 있으며, 나는 현실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실재’라는 가상을 필요로 한다. 현실은 실재가 되고 실재는 현실이 된다. 그러나 이 경계를 무너뜨리는 순간 욕망은 유지될 수 없으며, 삶은 끝난다.

인간은 욕망을 갖는 한에서만 인간일 수 있다는 것이 지젝의 출발점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욕망을 가진 인간은 자신의 욕망의 대상이 무엇인지 항상 착각하며 살고 있다. 지젝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이 목표로 하는 것은 욕망이 완전히 충족되는 상태가 아니라, 욕망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상태이다. 욕망의 주체로서의 인간은 욕망의 실현에서가 아니라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부터 자신의 삶을 확인하고 쾌락을 얻는다. 그러나 욕망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환상을 통해 그런 욕망의 목표를 만들어내며 그것을 통해 욕망하는 법을 배운다.

욕망하기 위해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현실에서 이미 욕망이 실현되어 있다는 것을 은폐하는 것이다. 실재가 욕망이 실현된 세계이고 현실이 그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해야 하는 세계라면, 실재는 환상이고, 현실 속에서는 이미 욕망이 실현되어 있으므로 현실은 이미 실재가 된다. 왜냐하면 욕망의 실현이란 사실은 욕망의 재생산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실현된 욕망이란 끊임없이 멀어지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삐딱하게 본다’는 것은 똑바로 보면 존재하지 않는 욕망의 대상을 만들어내는 방법이다. 우리가 세상을 똑바로 볼 때 욕망의 대상, 곧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이것은 곧 우리가 욕망하는 것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거기에는 공허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순간 욕망은 중단되며 쾌락은 막을 내린다. 이것은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우리가 삶의 의미를 잃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삐딱하게 보지 않을 수 없다. 삐딱하게 봄으로써 실재는 현실과 구분되고 삐딱하게 볼 때에만 존재하는 그 왜상적 대상을 욕망하면서 우리는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실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현실과 구별되는 실재를 인지하며 현실과 실재의 경계를 유지하는 것이 욕망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욕망은 환상을 필요로 한다. 공허 그 자체로서의 실재가 우리의 현실에 침투해 들어오게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19-21p)

 

 

그러나 새옹지마의 교훈은 그저 훈훈한 것만은 아니다. 변방에 살았던 노인의 아들은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전쟁에 나가지 않았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만, 현실은 대개 그렇게 담담하지가 않다. 당시의 의료수준을 생각해 보건대 그 노인의 아들은 아마도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전쟁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야 낫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삶의 고통은 계속되는 것이다. 비극은 그렇게 삶이 지속된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새옹지마’라는 고사가 우리에게 말해 주듯이 그러한 삶의 일상은 언제나 불확실하고 지리멸렬해서 견디기 힘들다는 데 있다.(49p)

 

 

하이데거가 말하는 일상인의 삶이 지속될 수 있는 힘은 아마도 그들이 자신들의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잡담이나 소문의 소재로 만들어 버리는 데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의 삶이 아니고, 그 누군가의 삶이기 때문에 그럭저럭 참을 만한 것이다. 자신의 삶을 그 누군가의 삶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그때그때 적당히 흥분하고 적당히 기대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속으로 ‘하면 된다’를 되뇌며,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굳게 믿으면서, 당장의 고통만 지나가면 그 다음에는 행복한 인생이 펼쳐질 것이라고 희망해야 한다. 눈앞에 닥친 고비 너머에 나의 진정한 삶이 있다고, 조금만 더 견디어 내면 나는 왜 사는지 말할 수 있을 거라고, 내 삶의 의미는 곧 분명해 질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러나 물론 일상은 반복적으로 우리의 이런 기대를 배반한다. 수험생이 시험을 마쳤다고 해서, 군인이 제대를 했다고 해서, 취업준비생이 취직을 했다고 해서, 처녀 총각이 결혼에 성공했다고 해서, 그들이 행복한 일상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삶이 중단되지 않는 한, 일상은 지속될 것이며, 그것은 여전히 참기 힘들 정도로 지리멸렬할 것이다. 이것은 삶의 의미가 왜 말해질 수 없는가 하는 이유이다.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나의 삶은 그 의미의 최종적인 봉합을 계속해서 연장한다.(51-52p)

 

 

102세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간 노철학자가 깨달은 건강 유지의 비법은 결국 자신만의 삶의 리듬을 잃지 않으면서 내적인 평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가다머의 가르침에 따라서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결코 무리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성향에 맞지 않게 삶의 태도를 바꾸려 해서는 안 되며, 심지어 지나치게 노력하는 삶을 살아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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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내적인 척도에 맞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인생의 목적을 어떤 대단한 것을 성취하는 데 두고 있지 않고 그저 건강하게 살다가 가는 데에서 찾고 있다면 그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인가? 그런 삶을 부도덕하다고 비난하는 사회는 내적인 척도에 맞게 평온한 삶을 살고자 하는 불가피한 생존 욕구마저 부정하고 있는 너무 야박한 사회가 아닐까?(64-65p)

 

 

다윈의 진화론에서 특징적인 요소는 그러한 변이의 선택과정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지적했다는 점이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다윈의 관점은 살아남았다는 것이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양한 변이 가운데 어느 것이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것은 미리 정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지극히 우연적인 과정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언어와 문화를 만들고 교양 있는 행동을 하며 나아가 성스럽게 여겨지는 삶을 살게 된 것도 인간의 본질과는 무관한 일로서 우연적인 역사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해서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84-85p)

 

 

그렇지 않아도 세상 살기 바쁘고 경쟁에 지쳐있는데 머리나 식혀볼까 하고 손에 든 소설마저 ‘아침형 인간’으로 변신해서 ‘부자 아빠’가 되라고 외쳐댄다면 인생이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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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로마 상류층의 사상은 한 가지 결정적인 측면에서 취약점을 보인다. 아파테이아와 평점심은 이미 가진 재산이 없어서 쾌락주의자가 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쓸모없는 충고이다. 그들은 가난과 질병, 죽음에 노출되어 있으며, 자신들의 통치자들과 소유주들의 의지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하고 자신들에게 어떠한 덕과 어떤 행복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 몇몇 사람들에게는 신비적인 종교가 그 대답을 제공했다. 하지만 훨씬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대답은 기독교의 도래를 기다려야 했다.

 

아마도 철학사를 읽어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진부하게 여겨지는 대목일 것이다. 나를 괴롭힌 것은 “재산이 없어서 쾌락주의자가 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구절이다. 나의 주장을 어처구니없게 생각한 사람들은 속으로 “돈도 없으면서 헛소리하고 있네”라고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다. 나는 진정한 쾌락주의자란 모든 종류의 욕망을 던져버리고 경쟁에 휩쓸리지 않고, 덧없는 것들에서 의미를 찾으며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매킨타이어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지나가는 어투로 재산이 없는 사람은 쾌락주의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평생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대책을 세워놓지 않은 사람은 경쟁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진정한 쾌락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진부한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106-108p)

 

 

여러 가지 논거가 동원이 되겠지만, 가장 고전적인 논거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것이다. 암울한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세상을 저주하던 내게 이 말씀은 참으로 세상을 부정할 힘을 주었던 생명의 말씀이었다. 나는 나의 정신적인 방황과 고통이 세상의 거짓들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언젠가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자유롭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보니 진리가 너무 많아서 그 중에 어떤 것이 진짜 진리인지 가릴 수가 없게 되었다.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할 것 같은데 그 놈의 진리가 도대체 어떤 놈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짧은 인생 경험을 통해서 깨달은 바로는 이런 와중에 내 말이 진짜 진리요 하고 나서는 놈들은 대개는 목소리만 큰 사기꾼이거나 주먹 센 깡패라는 것이다.(117-118p)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 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 앉아서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129p)

 

 

무억보다도 코스모폴리탄적인 프로젝트가 실패할 수밖에 이유는 그들이 정치의 헤게모니적 차원을 무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무페는 사회의 모든 질서가 필연적으로 헤게모니 질서이며, 그것을 통해서 권력관계가 구성 된다고 보기 때문에 ‘헤게모니를 넘어선’ 정치를 상상하는 것은 헛된 망상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무페가 코스모폴리탄적인 ‘망상’에 대해 제시하는 대안은 다극화된 세계의 건설이다. 그에 의하면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성적인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이성적인 대화와 타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사람들의 욕망과 환상을 이용해야 하며 민주주의적 실천에 공헌하는 정체성을 만들어내야 한다. 지배적인 헤게모니에 대한 투쟁은 모든 층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민주주의적 실천은 따라서 결코 종결될 수 없는 프로젝트이다.(189p)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인식은 개별적인 몸들이 사실은 아무런 관련이 없이 세상의 존재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 양자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단절이 있다는 것을 바라봄으로써 얻어진다.(240p)

 

 

인간의 비극적인 삶이 종식되지 않는 한 기도는 지속될 것이다. 이 땅의 고난과 굴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기를, 아이들을 사지로 내몬 잘못을 용서해주기를 우리는 계속해서 참회하며 빌게 될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일수록 완전한 신을 갖는다”는 포이어바흐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현실의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신음과 같은 기도를 뱉어내게 할 것이다.(269p)

 

 

 

ㅡ 이유선,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中, 라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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