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8/3

 

 

1. 영어 공부하는 셈 치고 시간을 들여서라도 원서로 읽어볼까 했는데 결국은 번역본으로 읽었다. 핑계를 대자면 원서는 안 그래도 짧은 영어 실력이라 한 글자 한 글자 신경 써서 읽어야하는 데다가, 해나 베이커의 녹음 부분과 클레이가 말하는 부분까지 구분하며 읽어야 했는데 그게 너무 헷갈렸다.(기울임으로 구분할 수 있게 해뒀지만 내가 글씨의 형태에 무딘 건지 그리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았고, 이거 핑계 맞음) 번역본은 아예 다른 색으로 구분하여 훨씬 알아보기 수월했다. 뭐 그렇다는 얘기다. 시간이 나면 넷플릭스 드라마도 볼 의향이 있다.

 

어떻게 보면 책에 등장하는 13명 각각은 해나의 죽음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을 그 계기들이 모이고 연결되자, 더 이상 사소해지지 않았고 종국에는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 미스터리 구조를 띠고 있는 흔한 서사라고 할 수 있다. 13개의 이유라고는하나 이 테이프를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밖의 침묵하고 방관하던 대다수 학급 친구들 역시 해나가 죽는데 동조했을 것이다. 무난하게 읽을 수 있는 틴에이저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후반부에 해나가 상담 선생을 찾아가는 부분에서 너무나 짜증이 났다. 교우 관계는 뜻대로 되지 않고, 이상한 소문만 퍼지고, 다들 나를 안 좋아하는 것 같고, 급기야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힘든 청소년기의 정서 상태인 거 백번 이해하고, 알겠는데 그래서 상담 선생에게 도대체 뭘 원하는 건지?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그럼 뭐 어쩌자고? 더 가관인 건 330p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언덕을 내려가는 중이야.

선생님 사무실 문은 닫혀 있어. 여전히 닫혀 있어.

선생님은 따라 나오지 않았어.

선생님은 나를 가도록 내버려뒀어.

나는 확실히 표현을 했는데. 그러나 아무도 내 앞을 가로막지 않았어.

다들 나름대로 호의를 베풀었지만, 내가 원하던 만큼은 아니었어. 진작···그걸 알았더라면 좋았을걸.

그런데 이제야 확실히 알았어.

그래서 미안해.

 

하. 지금 싸이월드 하세요? 제발 일기는 일기장에 쓰고 본인만 봤으면 한다. 침착하게 가능성 있는 대안을 알려주고 해결을 모색하려는 선생에게 지금 어리광 부리는 건지? 그럼 만약 선생이 따라 나왔다면 자살을 안 했을 거란 말인가. 그 정도로 자살에 대해 얄팍하게 생각하는 양반이 과연 자신의 과거를 더듬으며 특정 인물을 떠올리고, 테이프로 녹음까지 하는 수고스럽고도 번거로운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었을까. 이건 뭐 일이 이렇게 된 건(=내가 죽은 건) 마지막까지 한 줄기 빛과 희망으로 믿고 있던 상담 선생 당신 때문이라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자살, 왕따 등등의 청소년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고 그 고통을 경시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 인물의 행동거지가 참으로 거지같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자신의 힘든 상황으로 상담을 청하는 모든 학생이 바른 인성과 합리적 사유의 소유자가 아닐 것은 분명할진대, 그런 학생을 주로 상대해야 하는 상담 선생도 또 하나의 극한직업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참 많이 다루는 주제이고, 그에 대해 생각도 해봤지만 나는 자신이 없다. 그저 웬만하면 최악의 상황까지는 처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치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말이나 글로야 괴롭힘이나 왕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침묵하지도 방관하지도 말자라고 되뇌고 떠들 수 있겠으나 실제 상황으로 맞닥뜨렸을 때 내가 알고 있는 대로 행동할지 자신이 없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마음의 과학이라는 책에서 필립 짐바르도가 썼던 구절이 생각나서 옮겨본다.

 

 

이 모든 이야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방치의 악’이다. 나는 가해자에게 초점을 맞추어왔지만, 내 연구와 앞으로의 저술에서 더욱 초점을 맞추고 싶은 두 중요한 집단이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지켜보면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어떠한가? 아부그라이브에는 의사, 간호사, 기술자도 있었다. 두 군인이 죄수들을 피라미드처럼 쌓아올리고 찍은 사진을 보면 주위에 둘러서서 지켜보는 사람이 12명이나 되었다. 이런 짓을 지켜보면서 “이건 잘못된 일이야! 당장 그만둬! 너무 끔찍해!”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그 끔찍한 일을 용인하는 침묵하는 다수에 속한다. 내가 뉴욕에서 택시를 탔는데 운전사가 인종차별적이거나 성차별적인 농담을 꺼낸다고 생각해보자. 내가 그의 말을 중단시키지 않는다면, 그는 승객이 그런 농담을 좋아한다고 짐작하고서 계속 떠들어댈 것이다. 그는 내 침묵을 자신의 인종차별주의를 승인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방치의 악은 그 교도소에 있던 모든 사람들만이 아니라, 악을 보면서도 반대하지 않아서 그것이 계속되도록 허용하는 사회 전체의 사람들에게도 존재한다.

 

ㅡ 스티븐 핑커 외, <마음의 과학> 中, 와이즈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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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활 전부를 너희들은 알 리가 없지. 집에서. 심지어 학교에서도. 자기 일을 제외하고 남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내기란 어려우니까. 그런데 누군가의 인생 한 부분을 망가뜨리면 너희들은 한 부분만 망가뜨린 게 아니야. 불행하게도 너희들은 정확하고 선택적으로 망가뜨릴 수는 없어. 한 부분을 망가뜨렸다면 삶 전체를 망가뜨리는 거야.

모든 것은···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지.(241-242p)

 

 

굳이 사건이랄 수도 없는 옛날 집의 장면은 그날 밤 가장 멋진 순간에도 영향을 미쳤어. 나에 대한 그의 무관심은 암시였어. 내가 그 집에 있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도, 아무 의미가 없다니.(246p)

 

아 진짜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 이상한 의미부여하고 자기연민에 빠지는 거 너무 싫다.

 

 

난 해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해나에게 고통을 더해 주거나 상처주지 않았다. 그러나 방에 유기한 채로 떠났다. 손을 내밀어서 해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는데도. 그녀가 터벅터벅 가던 발걸음을 되돌릴 수 있었는데도.(263p)

 

 

그래, 네 말도 그럴 듯 해. 넌 강간하지 않았어. 나도 강간하지 않았어. 그놈이 했어. 그렇지만 너···그리고 나···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어.

그게 다 우리의 잘못이지.(274p)

 

 

 

ㅡ 제이 아셰르, <루머의 루머의 루머> 中, 내인생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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