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8/8

 


-책 전반에서 인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저자의 의견이 느껴졌다. 

-책만 많이 읽어 지식만 비대해지는 걸 경계하고 깊은 사색의 시간과 더불어 실천이 뒷받침되어야 제대로 된 앎이라는 참으로 당연한 말을 이 책에서도 또 듣게 되었는데 결국은 실천이 관건인 것이다.

-몇 십년 전에 쓰인 오래 된 책이다보니 문장이나 단어에서 확실히 시대가 느껴졌다. 좋게 말하면 예스러운 느낌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조금 고루했다.

-옥중에서 쓴 편지를 떠올리면 당장 오스카 와일드의 '심연으로부터', 서준식의 '옥중서한', 그람시의 '옥중수고'가 있다. 아 사드 후작의 '소돔의 120'도 있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글을 쓰던 양반이 감옥에 갇혔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우면서 보람된 일은 자신의 사유를 정리하여 기록하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 자리에 땅을 파고 묻혀 죽고 싶을 정도의 침통한 슬픔에 함몰되어 있더라도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처럼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하여 위로된다는 사실이다. 큰 슬픔이 인내되고 극복되기 위해서 반드시 동일한 크기의 커다란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47-49p)

 

 

우리는 거개가 타인의 실수에 대해서는 냉정한 반면 자신의 실수에 대하여는 무척 관대한 것이 사실입니다. 자기 자신의 실수에 있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 우여곡절, 불가피했던 여러 사정을 잘 알고 있음에 반하여, 타인의 그것에 대하여는 그 처지나 실수가 있기까지의 과정 전부에 대해 무지하거나 설령 알더라도 극히 일부밖에 이해하지 못하므로 자연 너그럽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115p)

 

 

작년 이맘때의 생일연이 어제 일같이 가깝게 기억되는데 그것이 벌써 일 년이나 전의 일이고 보면 저희들은 세월의 흐름에 어지간히 무디어진 것 같습니다.

(...)

이런 버릇은, 특별히 절실한 일에 쫓기지 않는 데다 또 생활이 단조로워서 다양한 경험을 가질 수 없음에 연유하는 듯합니다. 절실한 일이 없으면 응달의 풀싹처럼 자라지 못하며, 경험이 편벽되면 한쪽으로만 굴린 눈덩이처럼 기형화할 위험이 따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 살면서 성격의 굴절을 막고 구김살 없이 되기란 무척 어려운 것 같습니다.(136p)

 

 

비록 여름이 아니더라도 저는 책에서 무슨 대단한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설령 책에서 무슨 지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태를 옳게 판단하거나 일머리를 알아 순서 있게 처리하는 능력과는 무관한 경우가 태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인 특유의 지적 사유욕을 만족시켜 크고 복잡한 머리를 만들어, 사물을 보기 전에 먼저 자기의 머리 속을 뒤져 비슷한 지식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만 그것으로 외계의 사물에 대치해버리는 습관을 길러놓거나, 기껏 ‘촌놈 겁주는’ 권위의 전시물로나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그런 것인 줄을 모르는 경우마저 없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지식이라 불러온 것이 사실입니다.(139p)

 

 

최근의 몇 가지 경험에서 자주 생각키우는 느낌입니다만 선행이든 악행이든 그것이 일회 완료의 대상화된 행위가 아니고 ‘좋은 사람’ 또는 ‘나쁜 사람’과 같이 그것이 ‘사람’인 경우에는 완전한 악인도 전형적인 선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극히 평범한 상식이 확인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추상된 도식이기 때문에 도리어 인간 이해를 방해하는 관념이라 생각됩니다. 전형적 인간을 찾는 것은, 없는 것을 찾는 것이 됩니다.(174p)

 

 

영위하는 일상사와 지닌 생각이 한결같지 못하면 자연 생각이 공허해지게 마련이며 공허한 생각은 또한 일을 당함에 소용에 닿지 못하여 한낱 사변일 뿐이라 믿습니다. 저희들이 스스로를 통찰함에 특히 통렬해야 함이 바로 이런 것인즉, 속빈 생각의 껍질을 흡사 무엇인 양 챙겨두고 있지나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190p)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오진을 스스로 깨닫도록 은밀히 도와주고 끈기 있게 기다려주는 유연함과 후덕함을 갖추는 일입니다. 이런 경우는 주장과 주장의 대립이 논쟁의 형식으로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잘 아는 친구가 서로 만나서 친구 따라 함께 강남 가듯, 춘풍대아한 감화의 형태로 나타납니다.(216-217p)

 

 

해마다 가을이 되면 우리들은 추수라도 하듯이 한 해 동안 키워온 생각들을 거두어봅니다. 금년 가을도 여느 해나 다름없이 손에 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공허한 마음은 뼈만 데리고 돌아온 ‘바다의 노인’ 같습니다. 봄, 여름, 가을, 언제 한번 온몸으로 떠맡은 일 없이 그저 앉아서 생각만 달리는 일이 부질없기가 얼음 쪼아 구슬 만드는 격입니다. 그나마 내 쪽에서 벼리를 잡고 엮어간 일관된 사색이 아니라 그때 그때 부딪쳐오는 잡념잡사의 범위를 넘지 못하는 연습 같은 것들이고 보면 빈약한 추수가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위에 정직한 최선을 다하지 못한 후회까지 더한다면 이제 문 닫고 앉아 봄을 기다려야 할 겨울이 더 길고 추운 계절로만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숱한 가을을 보내고 맞는 동안 가을에 갖는 우리의 회한이 결코 회한으로만 끝나지 않음을 압니다. 풍요보다는 궁핍이, 기쁨보다는 아픔이 우리를 삶의 진상에 맞세워주는 법이며, 삶의 진상은 다시 위대한 대립물이 되어 우리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도록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냉정한 인식은 일견 비정한 듯하나, 빈약한 추수에도 아랑곳없이 스스로를 간추려보게 하는 용기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가을에 흔히 사람들은 낙엽을 긁어모아 불사르고 그 재를 뿌리짬에 묻어줍니다. 이것은 새로운 나무의 식목이 아니라 이미 있는 나무르 ㄹ북돋우는 시비입니다. 가을의 사색도 이와 같아서 그것은 새로운 것을 획득하려는 욕심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다짐하고 챙기는 ‘약속의 이행’입니다.

이 평범한 일상의 약속들이 다짐되고 이행된 다음, 나중에야 비로소 욕심이 충족되더라도 되는 것이 응당한 순서이리라 생각됩니다. 가을에 갖는 우리들의 공허한 마음이란 기실 조급한 욕심이 만들어놓은 엉뚱한 것이라 해야 하겠습니다.(225-226p)

 

 

사람은 나무와 달라서 나이를 더한다고 해서 그저 굵어지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젊음이 신선함을 항상 보증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노’가 원숙히, ‘소’가 청신함이 되고 안 되고는 그 연월을 안받침하고 있는 체험과 사색의 갈무리 여하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229p)

 

 

바늘 구멍으로 황소를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대상이 물건이 아니라 마음을 가진 ‘사람’인 경우에는 이 바라본다는 행위는 그를 알려는 태도가 못됩니다. 사람은 그림처럼 벽에 걸어놓고 바라볼 수 있는 정적 평면이 아니라 ‘관계’를 통하여 비로소 발휘되는 가능성의 총체이기에 그렇습니다.(245-246p)

 

 

낯선 환경을 배우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주는 것이란 점에서 사소한 생활의 불편 그 자체까지 포함해서 하나의 기쁨입니다. 익숙한 환경과 친분 있는 사람들의 양해 속에서는 미처 발견되지 못하던 자신의 작풍상의 결함이 흡사 백지 위의 묵흔처럼 선연히 드러납니다. 저는 이러한 발견이 지금껏 무의식중에 굳어져 온 안이한 습관의 갑각을 깨뜨리고 좀 더 너른 터전 위에 저의 자세를 다시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344p)

 

 

그 많은 싸움들을 보고 느낀 것입니다만, 싸움은 큰 싸움이 되기 전에 잘게 나누어서 미리미리 작은 싸움을 싸우는 것이 파국을 면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 작은 싸움은 잘만 관리하면 대화라는 틀 속에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소화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책은 못되고 중책에 속합니다. 상책은 역시 싸움에 잘 지는 것입니다. 강물이 낮은 데로 낮은 데로 흘러 결국 바다에 이르는 원리입니다. 쉽게 지면서도 어느덧 이겨버리는 이른바 패배의 변증법을 터득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진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기기보다 어렵습니다. 마음이 유해야 하고 도리에 순해야 합니다. 더구나 지면서도 이길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이 경우에 어긋나지 않고 떳떳해야 합니다. 경우에 어긋남이 없고 떳떳하기만 하면 조급하게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할 필요도 없고, 옆에서 보는 사람은 물론 이긴 듯 의기양양하던 당자까지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완벽한 승리가 되어 돌아옵니다.(392p)

 

 

 

ㅡ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中,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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