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8/21

 

 

약간의 볼일에서 좀도둑 갤러거와 맨건은 교황 방문으로 텅 비어버린 도시에서 빈집털이를 하다가 텔레비전을 보던 노인과 마주친다. 그들은 경찰에 찌르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노인을 협박하고 나오지만 못내 찜찜하다. 장물을 팔고 우연히 만난 여자들과 놀아도 찜찜한 마음은 털어버릴 수 없다. 노인을 죽여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계속 후회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그런 후회 자체가 허세라는 결론에 이른다. 애초에 살인을 할 만한 인물들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좀 도둑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는, 별것 아닌 듯하지만 어쩌면 앞으로 그들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자기 인식에 이르는 것이다.(168-169p)

 

 

어떤 면에서는 함부로 손을 내밀거나 어설프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보다도 그렇게 함께 견디면서 자신을 구원하도록 지켜보는 것이 인물에 대한, 인간에 대한 최대의 존중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그런 면에서 비 온 뒤전체에서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는 위력적인 삼인칭시점, 인물의 고통이 심해질수록 삼가서 지켜내는 거리, 인물이 자기 인식에 이를 때 겹쳐서 들리는 지성적인 목소리는 고통 뒤에도 이어질 수밖에 없고 이어져야 하는 인간의 삶을 지켜내려는 작가의 무기들이었던 셈이다.(170p)

 

 

이 상황이 끝나 눈을 뜨면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원래의 일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다시 눈을 뜬 자들이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또다른 일상을 만들어갈 것을 예감한다. 일상은 비상한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지속되지만, 그럼에도 늘 변한다. (210p)

 

 

최악의 상황에서 어떻게든 가족을 책임지려는 가장, 이것이 그가 인생의 막바지에 자신과 세상에 제시하고 싶어한 자기 이미지이고, 이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첫번째 아이러니가 생기는데, 화이트에게는 이 시기가 가장 비참하지만 그럼에도 심간은 가장 편한 때라는 것이다. 자신이 설정한 이미지대로 나도 나를 보고 세상도 나를 보아주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면서 이렇게 자기와 자기 이미지와 세상이 자기를 보는 눈 세 가지가 일치하는 때가 있다면 누구나 그때를 행복하다 할 것이다. 반대로 그것이 어긋나는 상황, 그리고 그것을 수습하려는 무리한 시도는 온갖 불행의 단초가 된다.

월터 화이트의 행복한 시간은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두번째 아이러니가 생기는데, 그에게 불행이 시작되는 시점은 그가 가장으로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이때 그는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마피아의 윤리를 자신의 윤리로 받아들인다. 또 성실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윤리에 맞춰 살려고 최선을 다하고, 능력자이기 때문에 마약 제조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거기에 암마저 진행이 멈추어 그 어느 때보다 유능한 부양자가 되지만, 바로 그 과정에서 가족은 와해되고 자신은 악당으로, 괴물로 변해간다. 더불어 그가 내세웠던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이라는 자기 이미지는 진정성을 의심받기 시작한다.

이런 자기 이미지가 가식이라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영리하게도 그런 이미지 설정이 그 나름의 간절함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간절함이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고 믿는 순간 그런 마음 자체가 악으로 변해감을 보여준다. 나아가 이 악은 계속 선으로 인정받으려고 자기 이미지를 세상에 강요한다는 점 또한 놓치지 않는다. 자신이 설정한 이미지대로 세상이 자기를 봐주지 않을 때 보통 힘없는 사람은 세상을 원망하고, 힘있는 사람은 그것을 자신에 대한 모독으로 여겨 자신이 내세운 이미지대로 보라고 세상을 윽박지른다. 권력자가 된 화이트는 물론 후자를 택하고 그로 인해 가족은 더 빠르게 무너진다.

결국 월터 화이트에게 가족과 화해할 가능성은 자신이 한 일이 가족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이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순간 찾아오며, 이것이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마지막 아이러니다. 화이트는 그런 인정을 통해 진실한 자기 인식에 이르게 된다. 비록 자신의 최후에 대한 예감과 함께 찾아온 순간이지만 그에게는 인생 어느 때 못지 않은 평화로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자기 이미지의 굴레에서 벗어나 맨얼굴의 자신과 대면할 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은 사회적 지위가 확고한 사람에게든 마약 사범 월터 화이트에게든 예외 없이 유효한 진실일 테니까.(232-234p)

 

 

종이 울리면 자리에 않는다.”

교실 앞쪽에 벽에 붙은 급훈이다. 이렇게 담백한 급훈은 본 적이 없기에 나도 늦었지만 가훈을 정해볼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든다. “아침이 오면 일어난다.” 너무 건전한가? “비가 오면 술을 마신다.” 이건 너무····(235p)

 

 

밤은 부드러워라의 여주인공 니콜에게도 생각은 자신에게 명령해야만 하는 일이다. “생각해라.” 그런데 니콜에게는 여기에 한마디가 더 붙는다. “아니면 다른 사람이 너 대신 생각한다.” 내가 생각을 하지 않으면 생각이 중단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남이 대신 생각해주게 된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텅 빈 상태가 아니라 남의 생각으로 꽉 차 있는 상태다.

여기에서 두 가지 깨달음이 이어진다. 하나는 남이 나 대신 생각해주면 그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나를 길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니콜은 부부관계에서 이런 깨달음을 얻지만, 이것이 권력과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또 한 가지 깨달음은, 머릿속이 꽉 차 있으니까 나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남의 생각이 내 생각이라고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을 속이는 것인데, 니콜이 보기에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죄다.

(...)

하지만 스스로 생각을 하는 것 또한 위험하다면 위험하다. 생각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한, 어차피 사람에게 안전한 길은 없다. 니콜의 깨달음도 결국 그녀 대신 생각을 해주던 남편과 헤어지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진다. 생각을 하지 않던 사람이 생각을 하게 되면, 영혼이 없던 존재가 영혼을 가지게 되면, 좁게는 사적인 관계, 넓게는 공적인 관계에 변화가 생긴다. 기존의 관계를 고수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 변화는 위험해 보인다. 대시 생각해주는 것을 시혜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배신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니콜은 성장과 변화의 길을 택하고, 마치 그녀를 염두에 둔 듯 존 업다이크는 말한다. “성장은 배반이다. 다른 길은 없다. 어딘가를 떠나지 않고는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다.”(322-323p)

 

 

 

정영목,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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