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9/5

 

 

그러나 그와 예술가들, 좁게 말해서 시인들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보들레르의 열정을 이어받은 현대의 시인들은 ‘무덤 뒤의 찬란함’에 자주 도취하면서도, 현실에서는 그 빛을 일상적 실천의 등대로 삼는다. 언제나 물질의 제약을 받는 이 세상에서 그 찬란한 빛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도달할 수 없는 곳을 향해 가는 발걸음은 바로 그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결코 멈추어지지 않는다. 시인들에게는 다른 세계의 빛이 이 세계의 실천을 지시한다. 저 불행한 청년은 이 실천이 두렵고 세상의 온갖 장애가 두려워, 이 세상을 파괴하고 저를 파괴하였으며, 마침내 저 찬란한 빛을 꺼버림으로써 자신이 가고 싶어했던 죽음 뒤의 세계마저 지옥으로 만들었다. 그가 어떤 글을 써서 어떻게 자신을 과시하건 그는 패배한 사람일 뿐이다.

문제는 이 패배가 그에게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흉악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폐지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형 제도를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없애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같기에 우리의 패배를 증명하는 꼴이 된다. 게다가 문제는 없어지지 않는다. 흉악범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일상이기 때문이다.(34-35p)

 

 

자기가 만든 것은 그 결함이 제 눈에 보이지만 남의 창작품은 늘 완벽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완벽함의 주인이 되는 것은 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과 같으니, 그에 대한 욕망은 다른 모든 욕망을 압도할 수 있다.(130p)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전하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저마다 직면했던 운명과 그 선택을 깊은 자리까지 뜯어보아야 한다는 뜻도 된다.(166p)

 

 

구의역의 젊은 수리공을 제 자식처럼 여기거나 여기려 한 사람들과 나향욱들의 차이는 위선자와 정직한 자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과 갖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이며, 슬퍼할 줄도 기뻐할 줄도 아는 사람들과 가장 작은 감정까지 간접화된 사람들의 차이이다. 사이코패스를 다른 말로 정의할 수 있을까.(179p)

 

 

불행한 일을 당하면 누구나 그 불행을 책임져야 할 사람을 찾아내고 싶어한다. 탓할 사람을 찾아내지 못한 불행은 지금 눈앞에 닥친 불행보다도 더 고통스럽다. 미국 사회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중하류층 백인들에게 샌더스는 그 책임이 그들에게서 돈을 빼앗아간 월가의 부자들에게 있다고 말하고, 트럼프는 그들에게서 일자리를 빼앗아간 이민자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한국의 젊은 남자들은 잘나가는 여자들과 페미니스트들에게 그 책임을 돌리려 한다. 그러고는 다시 왜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여성혐오의 혐의를 둘러써야 하느냐고 묻는다. 물론 그 혐오는 그 혐오가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설명을 거치고 나면 말은 얼마나 힘을 잃는가. 여전히 바뀌지 않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우리가 어머니에게, 아내에게, 직장의 동료에게, 길거리에서 만나는 여성에게, 심지어는 만나지도 못할 여자들에게 특별히 기대하는 ‘여자다움’이 사실상 모두 ‘여성혐오’에 해당한다. 나는 한 사람의 번역가지만 ‘여성혐오’라는 번역어의 운명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고통의 시대에 더 많은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불행을 그 오해 속에 묻어버리려는 태도가 비겁하다는 것은 명백하게 말할 수 있다.(185p)

 

 

루쉰은 그의 단편소설 「고향」에서 수구주의자들이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터부의 자리에 인간의 가치가 들어서기를 희망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그 끝을 맺었다. “희망은 길과 같은 것이다. 처음부터 땅 위에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다보면 길이 만들어진다.”(197p)

 

 

정염의 세계에서는, 정염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바로 그 정염입니다. 정염은 욕망에 소망을 붙여놓지요. 욕망하는 한은 행복함이 없이도 살 수 있어요. 행복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행복이 전혀 찾아오지 않으면, 희망이 연장됩니다. 공상의 매력은 그 원인이 된 정염만큼 깊어지지요. 따라서 이 상태는 스스로 충족되며, 거기서 비롯한 불안은 현실을 보충하는 쾌락의 일종으로 어쩌면 현실보다 더 낫지요. 더 이상 아무것도 욕망할 것이 없는자 불행하구나! 그런 사람은 말하자면 자신이 지닌 것을 모두 잃지요. 인간은 자기가 얻은 것보다 희망하는 것으로 더 즐거워하며,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합니다. 사실 인간은, 갈구하나 유한하며, 모든 것을 원하나 얻는 것은 적도록 만들어져 있지만, 어떤 위로의 힘을 하늘로부터 받았으니, 그 힘은 그가 욕망하는 모든 것 가까이 그를 데려가고, 어떤 점에서는 욕망하는 것을 그에게 안겨주고, 그를 그의 상상력에 복종시키고, 그에게 욕망하는 것을 대령해 감각할 수 있게 하고, 그를 그의 정염에 따라 변화시키지요. 그러나 이 모든 마력은 그 대상 자체 앞에서 사라집니다. 이 대상을 그 소유자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게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누구도 자기가 보는 것을 머릿속에 상상하지는 않습니다. 향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공상은 사라지니까요. 망상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깃들 가치가 있는 유일한 나라이며, 인간적인 것들의 허무가 이와 같아서,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자가 아니라면,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건 존재하지 않는 것일 뿐이지요.

(...)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염’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루어지지 않을 어떤 것에 대한 마음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나탈리는 이 구절을 해설한다. “쥘리는 지난날의 정염, 생프뢰와 못 이룬 정염을 회상한다. 그와 함께 할 행복을 희망하다가 희망 그 자체로 행복해진다. 꿈을 현실로 대체함으로써 만족할 수 있으니까.” 나탈리는 상상력의 권능을 말한다. “상상력은 순전히 정신적인 쾌락을 통해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보충해줄 수 있다.” 그는 이런 말이 비현실적으로 들릴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쥘리나 루소 그 자신처럼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가상의 만족이 위안을 주고 그 위안은 관능적 쾌락을 보충하고 대체하는 것이다.” 희망이 희망하는 것을 대신해줄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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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보다 더 꾸준한 실천은 없기 때문이다.

가질 수도 누릴 수도 없지만 잊어버리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고 보면 우리가 시에 요청하는 모든 것이 이 짧은 말 속에 들어 있는 것 같다. 시는 누릴 수 없는 것을 희망하는 뛰어난 방식이자 그 희망을 가장 오랫동안 전달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희망하는 그 대상은 언제까지나 거기에 확실히 존재하나 아직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 “있음과 있지 않음의 기쁨”이다. 철학자들은 아마도 ‘관념은 현실이 되지 않는다’라는 말로 이 구절을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시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의 욕망과 그에 결부된 희망이 관념으로 떨어지기 전에 지금 이 자리에 붙잡아 이 현실과 그것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그 관계 자체 속에 들어 있는 약속을 쉬지 않고 되새기는 확실한 미학적 장치에 관해 말할 것이다.(254-260p)

 

 

 

ㅡ 황현산, <사소한 부탁> 中,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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