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5

 

 

내가 이해한 게 맞다면 저자가 하고 싶은 얘기는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국가의 경제적 지원에 종속되지 말고 독립적으로 작가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주 소수를 제외하고는 문학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런 상황에서라도 문학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다른 직업과 함께 문학이라는 예술을 병행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말로 들린다. 내게는 이 말이 창작이라는 예술 행위를 거의 취미의 형태로만 즐기라고 들려서 약간 자조적으로 들렸다.

 

 

 

쉽게 말해 한국 문학계는 하체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허약하기 그지없는데, 머리만 비대하게 커서 ‘한국문학의 세계화’와 같은 뻐꾸기만 날릴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가끔 하체에도 영양분을 공급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부수입이 있을 때만 그러합니다. 그러면서 한국문학을 사랑한다는 애정표현은 잊지 않는데, 엄밀히 말해 그것은 밥그릇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35p)

 

 

개별 비평은 예외 없이 그들이 놓인 사회경제적 조건(위치)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호의적인 비평만 하는 비평가가 있다고 했을 때,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성격이 온화하고 긍정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비평밖에 할 수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물론 당사자들은 그것을 구조적 결과라기보다는 자발적 선택으로 착각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해심이 많은 표정을 짓다가도 자신을 비판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만큼은 정제되지 않은 적대감을 드러내고 야유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47p)

 

 

이는 물론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닌데, 이는 정년퇴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명예교수로 생명연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이 있다면 제자(후배)를 위해서 깨끗이 물러나야 할 텐데, 하나같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인생을 살 만큼 산 학자의 배려심이라는 것이 30대에 은퇴를 결심하는 스포츠선수들(“후배들에게 출전기회를 주기 위해서······ 운운”)보다 작다는 것은 그들이 평생 닦았다는 학문의 성격을 가늠하게 합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인문학 따위를 공부하는 것은 시간낭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101p)

 

 

전형적인 시민계급 출신 증권 중개인이었던 찰스 스트릭랜드는 어느 날 갑자기 처자식을 팽개치고 무일푼으로 집을 나섭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준 친구 스트로브의 아내 블란치와 간통을 한 후 그녀를 냉대함으로써 결국 자살(음독을 했는데 바로 죽지 않고 며칠 간 지독한 고통을 겪다가 죽습니다)에 이르게 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일만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철면피 같은 행동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가 일상의 안락함을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소위 예술가의 특권이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통의 시민이 누리는 일상적 행복을 포기함으로써 획득된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찰스 스트릭랜드 같은 사람은 그저 시민적 도덕의식이 결여된 망나니에 불과합니다.(156p)

 

과연 그런가.

이 글을 읽고 재차 생각해봐도 찰스 스트릭랜드 같은 치는 여전히 그저 시민적 도덕의식이 결여된 망나니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아주 훌륭한 예술작품이란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오직 이 위대한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되어있는 선택된 사람들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이 이해를 못한다면, 이를 설명하고 이해에 필요한 지식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실상 그러한 지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작품을 설명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대중은 훌륭한 예술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결국 설명은 하지 않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저 같은 작품을 몇 번이고 읽고 보고 듣고 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어떤 것도, 심지어 나쁜 것도 익숙하게 만들 수 있다. 마치 썩은 음식이나 보드카나 담배, 아편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사람들을 나쁜 예술에 익숙하게도 만들 수 있다. 또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대중은 최고의 예술작품을 평가할 만한 취미를 갖고 있지 않다는 투로 말해서도 안 된다. 대중은 우리가 최고의 예술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언제나 이해해 왔으며, 현재도 이해하고 있다.(189-190p)

 

과연 그런가.

모든 것을 익숙하게 만들 수는 없다. 게다가 대중 일반이 최고의 예술을 알아보는 감식안을 갖고 있다고도 믿을 수 없다.

 

 

 

ㅡ 조영일, <직업으로서의 문학> 中, 도서출판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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