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10

 

 

인간이란 구르는 걸 멈추지 않는 한 조금씩 실이 풀려나갈 수밖에 없는 실타래 같은 게 아닐까, 그때 고모는 그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고 했다. 병원 문을 열고 나가면 실타래는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굴러갈 것이고, 실타래에서 풀려나간 실은 밟히고 쓸리고 상하면서 먼지가 되어갈 것이다. 친밀했던 사람, 아끼던 사물, 익숙한 냄새를 잃게 될 것이고 세상도 그 속도로 고모를 잊어갈 터였다. 어느날은 거울 속 늙고 병든 여자를 보며 이유도 모른 채 뚝뚝 눈물을 흘리기도 하리라. 하나의 실존은 그렇게 작아지고 또 작아지면서 아무도 모르게 절연을 준비하는 것이다.(82-83p)

 

 

생존은 스스로 해결하되 세상이 인정하고 우대해주는 직업에 연연하지 말라고, 눈 가린 말들처럼 정해진 트랙을 달릴 필요 없다고, 종강 즈음이면 한 학기를 정리하며 그녀는 학생들에게 말하곤 했다. 속된 세계로의 편입을 선택하지 않는 자유를 지키는 한 어떤 형태의 가난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킬 수 있다고도 했다. 그렇게 말할 때 그녀는 늘 확신에 차 있었고 그 말의 무게를 책임질 준비도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에게 남은 선생으로서의 마지막 말은 존재와 신념을 부인하는 배교자의 언어였다.(124-125p)

 

 

얼마 전 독일을 충격에 빠뜨린 이민자와 난민의 집단 성범죄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지난주 토요일엔 이 작은 도시에도 그들의 유입과 정착을 반대하는 거리행진이 있었습니다. 행진은 평화로웠지만 행진 뒤에 남은 극우단체 소속 회원들은 자동차의 유리를 깨거나 거리의 소화전을 부수었습니다.

(...)

상상 속에서 부풀려진 공포와 잠재된 폭력을 분출할 수 있는 도화선이 간절한 사람들이 거리를 지배하던 날이었으니까요.(133-134p)

 

 

상처는 영혼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강박적인 성실함으로 영혼을 좀먹는다. 상처를 이겨내면서 성숙해졌다는 말은 균이 살아온 세계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아름다움이었다. 진저리나도록 아름다운 언어····· 아무것도 잊히지 않았다. 맞고 있을 땐 저만치서 가만히 서 있는 아이들을 죽도록 미워하다가도 다음 날이면 맞는 아이와 무관하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구경하는 무리에 숨어 있어야 했던 날들은 절대로 망각되지 않았다. 폭력은 차츰차츰 번져 아이들 사이에서도 빈번해졌다. 덜 맞고 더 먹기 위해 서로를 때리고 비방하고 추문을 만들어 퍼뜨렸다. 시기하고 배반하고 원망하고 괴롭혔다. 잊었을 텐데, 형기를 마쳤을 원장과 교사들, 시설 관리인과 급식을 담당했던 식당 직원들, 비정상적으로 비쩍 마른 아이가 절뚝이며 지나가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던 보육원 주변의 농가 주민들, 모두들 이미 잊어버리고 잘 살고 있을 텐데, 어째서 나는 높은 탑처럼 쌓인 기억의 더미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가. 이토록 끈질긴 고통, 일생이 다 지나도 작은 균열 하나 나지 않을 견고한 결정체, 그리고······

그리고, 그들이 있었다.(239-240p)

 

 

ㅡ 조해진, <빛의 호위>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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