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6

 

 

제지 원료를 넝마에서 펄프로 전환시킨 뒤로 출판업은 결코 환경 친화적인 산업일 수가 없기 때문에, 책을 쓰는 행위에는 필수적으로 양해가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대안 제시도 없이, 일관성 있는 의견 제시도 없이 툴툴거리기만 하는 것이 그런 당위가 될 수 있을까요? 적어도 제가 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슬프게도 그럴 수 있다고 보는데, 뚜렷한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면, 툴툴거리며 그 불편함을 상기시키는 것이 그 다음으로 유익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책 없는 툴툴거림은 쓰레기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유용한 쓰레기입니다. 대안이 없다고 입 닥치고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우린 우리가 겪고 있는 짜증마저도 망각하고 맙니다. 게다가 툴툴거림은 대안을 제시할 능력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구체적인 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죠.

불평은 적어도 자극제는 되며, 그런 자극을 받는 사람들 중 대안을 제시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어떤 구체적 의도도, 일관성도 없는 순수한 툴툴거림은 대안을 가진 일관성 있는 생각보다 더 구석까지 파고들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더 솔직해질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르죠. 100페이지가 넘어가는 일관성 있는 글을 쓰는 사람들은 어디선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요.(8-9p)

 

 

용감한 자를 찬양하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우리가 나약한 사람들을 비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전적으로 불공평한 기준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대부분 나약한 사람들입니다. 그 때문에 용감한 행동들이 더 존중을 받는 거죠.(56p)

 

 

모두에게 알맹이를 쌓으라고 하는 주장은 알맹이 있는 운 좋은 사람들이 거만한 자기 과시에 불과합니다. 저희처럼 운 없는 사람들은 주어지지도 않는 알맹이 대신 허세라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스노브들이 유해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저 자신 역시 상당한 골수 스노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스노브 예찬까지는 아니더라도 스노브 존재 옹호론을 끌어들여 동족들의 존재 가치를 주장하는 데 일조하는 것도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일단 스노브들은 우리네 삶의 질을 확장시킵니다. 대부분의 고급 스노브들은 정보와 문화의 첨단, 또는 그 근처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거의 보편적인 인권 운동으로 자리 잡은 동성애자 인권 운동을 봅시다. 게이 인권 운동가들이 기본적인 양식과 지식만으로 싸워왔다면 그게 지금 수준까지 올라왔을 것 같습니까? 어림없습니다. 그건 다 지금까지 우리 같은 스노브들이 「셀룰로이드 클로젯」같은 뻔한 책 한 권 달랑 읽은 것을 밑천 삼아, 지금까지 죽어라 아는 척을 해대며 바람을 잡아왔기 때문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쉬크해 보이는 것은 공정성과 정의보다 몇 배나 더 보급에 중요한 것입니다.(64-65p)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F의 90퍼센트는 쓰레기다. 그러나 모든 것의 90퍼센트는 쓰레기다.(146p)

 

 

영화관에 앉아 끊임없이 이성에 대한 강간 ․ 살인 ․ 폭행 장면들을, 강간당하는 걸 마치 수태고지쯤으로 아는 등뼈 없는 여성 등장인물들을 당연하다는 듯이 구경하면서도 「안토니아스 라인」과 같은 영화에서 남자 등장인물이 바지 어딘가를 무언가로 한번 푹 찔리는 장면을 보면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벌떡 일어나서 남성에 대한 폭력이라느니, 폭력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느니 하면서 툴툴거리는 이유가 뭘까요? 분명 이런 사람들 중 상당수는 전략적 목적을 위해 극단적으로 이분화된 투쟁 영화들을 손뼉 치면서 보았을 텐데 말입니다.(150p)

 

 

‘세계’라는 단어에는 꼭 지리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세계’는 우리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범위 안으로 제한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미국의 잡지 편집자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들의 세계는 뻔한 것입니다! 만약에 지리적인 공평성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끼워 넣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위선일 것입니다.

(...)

다시 말해 ‘세계 문화의 중심’에 있는 것이 꼭 유리한 것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자신들의 문화에 대해서만 알 뿐이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중심의 문화+자신의 문화를 알고 있죠. 선택의 폭이 더 넓어지고 삶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눈과 귀를 바짝 세우는 노력이 필요하긴 하겠지만요.

(...)

늘 이 나라의 갑갑한 문화 환경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저지만, 엄청나게 박학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노래방에서 마돈나와 이문세 사이를 오갈 수 있는 나라에 사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듯합니다.(184-185p)

 

 

 

ㅡ 듀나, <스크린 앞에서 투덜대기> 中,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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