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5/21

 

 

 

다 읽긴 했으나 크게 재미를 못 느꼈다. 중간쯤 등장하는 노인과의 이야기라도 없었으면 중도 포기했을지도. 폴 오스터를 많이 읽은 누군가의 말로는 그의 작품 중 이게 제일 재미없다고 하는데 작가의 다른 작품에 크게 궁금증이 일지 않아서 아마도 읽지 않을 것 같다.

 

 

빅터 삼촌은 술 취하지 않고 잔소리를 하는 도라는 견뎌 낼 수 있었지만, 그녀가 술에 취해 있을 때면 내가 느끼기엔 본래의 모습이 부자연스럽게 왜곡된, 잔인하고 참을성 없는 태도를 보였다. 그랬기에 좋은 면과 나쁜 면이 끊임없이 서로 전쟁을 벌였다. 도라가 좋을 때는 빅터 삼촌이 안 좋았고, 빅터 삼촌이 좋을 때는 도라가 안 좋았다. 좋은 도라 때문에 안 좋은 외삼촌이 생겨났고, 좋은 외삼촌은 오직 도라가 안 좋을 때에만 되돌아왔다.(18p)

 

 

어떤 의미에서는 그 느낌이 내가 경험했던 것의 실체를 바꾸었다. 나는 절벽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렸지만 떨어져 죽기 직전에 뭔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떨어져 내리는 두려움이 줄어들지는 않았더라도 그 두려움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새로운 조망을 얻은 것이었다. 나는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렸지만 마지막 순간에 뭔가가 팔을 뻗쳐 허공에 걸린 나를 붙잡아 주었다. 나는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믿는다. 사랑이야말로 추락을 멈출 수 있는, 중력의 법칙을 부정할 만큼 강력한 단 한 가지 것이다.(76-77p)

 

 

뉴욕 사람들이 길거리를 걸을 때면 그들의 눈에는 특별한 번득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연스럽고 어쩌면 필연적인 무관심이 떠오른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어떻게 보이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터무니없는 의상, 기괴한 머리 모양, 음란한 문구가 박힌 티셔츠ㅡ그런 것에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겉모습 밑에서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을 지극히 중요해서 이상한 몸짓은 무엇이건 당장 위협으로 간주된다. 소리를 내어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몸의 어느 부분을 긁거나 낯선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거나 하는 규칙 위반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적대적이고 때로는 난폭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85p)

 

 

대화는 누군가와 함께 공 던지기 놀이를 하는 것이나 같다. 쓸 만한 상대방은 공이 글러브 안으로 곧장 들어오도록 던짐으로써 여간해서는 놓치지 않게 하고 그가 받은 쪽일 때에는 자기에게로 던져진 모든 공을, 아무리 서툴게 잘못 던져진 것일지라도, 능숙하게 다 잡아 낸다. 키티가 바로 그랬다. 그녀는 계속해서 공이 내 글러브 안으로 곧장 들어오도록 던졌고, 내가 그녀에게 공을 던질 때는 포구 범위를 한참 벗어나는 경우라 하더라도 모든 공을 다 잡아 냈다.

(...)

그뿐만이 아니라 그녀는 기술이 너무도 뛰어나서 내가 공을 잘못 던질 때마다 일부러 그랬던 것인 양, 순전히 게임을 좀더 재미있게 만들려는 의도로 그랬던 것인 양 느끼게 해주었다. 그녀 덕분에 나는 나 자신을 실제의 나보다 더 낫게 보았고 그 때문에 자신감이 생겨서 다음에는 그녀에게 좀 더 받기 쉬운 공을 던져 줄 수 있었다. 달리 말해서 나는 그녀에게라기보다 나 자신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던 것인데, 그 즐거움은 내가 오랫동안 경험해 보았던 어떤 즐거움보다도 더 컸다.(136-137p)

 

 

나는 태평한 무관심으로부터 강렬한 놀라움의 단계를 거쳤고, 내 설명은 눈에 보이는 것에서 가능한 뉘앙스를 모두 잡아내려고 열심히 애쓰면서, 아무것도 빼먹지 않기 위해 세세한 사항들을 미친 듯이 그러모아 뒤죽박죽을 만들면서, 지나치게 정확해졌다. 내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기관총을 쏘아 대듯 딱딱 끊기며 연달아 터져 나왔다. 에핑은 끊임없이 내게 말을 좀더 천천히 하라며 내 말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투덜거렸다. 문제는 내 말투보다 전반적인 접근 방식에 있었다. 나는 너무도 많은 말들을 그러모으고 있어서 눈앞에 보이는 것을 나타내기보다는 사실상 그것을 흐리는, 미묘한 의미와 기하학적인 추상의 사태 밑에 묻어 버리는 셈이었다. 명심해 두어야 할 중요한 사항은 에핑의 눈이 멀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할 일은 긴 설명으로 그를 지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사물을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결국 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말이 할 일은 그가 사물들을 가능한 한 빨리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말이 입 밖에 나오는 순간 사라지게 해야 되었다. 내가 말하는 문장들을 단순화하고 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부수적인 것을 분리할 줄 알기 위해서는 몇 주일 동안의 힘든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어떤 사물 주위로 더 많은 여유를 남겨 두면 남겨 둘수록 그 결과가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럼으로써 에핑이 자기 스스로 결정적인 일, 즉 몇 가지 암시를 기초로 해서 이미지를 구성하고 내가 그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 사물을 향해 자신의 마음이 여행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했었기 때문이다.(179-180p)

 

 

우리는 누군가의 말소리를 듣자마자 마음속으로 말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그리고 불과 몇 초 내에 온갖 종류의 조용한 정보들이 흡수된다. 성별, 대략적인 나이, 사회 계층, 출생지, 심지어는 그 사람의 피부색까지도. 우리가 볼 수 있다면, 눈을 뜨고 마음속으로 그린 이미지가 실제의 인물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자연스러운 충동이다. 그 두 가지는 비교적 근접할 때가 아닐 때보다 더 많지만, 때로는 전혀 틀리는 경우도 있다. 트럭 운전사처럼 얘기하는 대학 교수, 늙은 여자로 밝혀지는 젊은 여자, 백인으로 밝혀지는 흑인,(199p)

 

 

결과,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야. 좋건 싫건 간에 언제나 결과가 있기 마련이지.(222p)

 

 

바버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충분한 시간은 결코 없었다. 그는 우리의 문제를 풀기 위해 미래에 기대를 걸었지만 그 미래는 결코 오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잘못이었다고는 하기 어렵겠지만, 어쨌든 그는 대가를 치렀고 나 또한 그와 함께 대가를 치렀다. 결과가 어찌 되었건, 나는 그가 달리 어떻게 행동할 수 있었을지 알지 못한다.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를 알 수 없었고, 누구도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어둡고 끔찍한 일들을 상상할 수 없었다.(342p)

 

 

빅터 삼촌이 바버를 피하는 대신 그의 두 번째 편지에 답장을 했더라면 나는 1959년에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을 받아들이기가 조금이라도 더 쉬워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모두 놓쳐 버린 관계, 잘못된 시기, 어둠 속에서 생겨난 실수였다. 우리는 언제나 잘못된 시간에 옳은 곳에, 옳은 시간에 잘못된 곳에 있었다. 언제나 서로를 놓쳤고, 언제나 간발의 차이로 전체적인 일을 알지 못했다. 우리의 관계는 결국 그렇게, 잃어버린 기회의 연속이 되고 말았다. 그 이야기의 조각들은 처음부터 모두 거기에 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어떻게 이어 붙여야 할지 몰랐다.(359p)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차이나타운으로 돌아왔지만 사정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았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지나간 일은 잊어버릴 수 있다고 자신을 설득했음에도, 예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을 때는 그 삶이 더 이상 거기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403-404p)

 

 

나는 에핑이 살던 동굴을 찾아내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맨 마지막까지 그것이 미리 정해진 결론이었다) 그 동굴을 찾아보는 행위, 다른 모든 행동을 말살시키는 행위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가방에는 1만 3천 달러가 넘는 돈이 들어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얼마든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다는, 모든 가능성이 다 사라질 때까지 계속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436p)

 

 

 

ㅡ 폴 오스터, <달의 궁전> 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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