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23

 

 

종이 동물원에 비해 이 책에서는 다루는 주제가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작품들이 많아서 다채로운 이야기를 기대했던 나로서는 조금 아쉬웠다. 그러나 이야기를 풀어내는 재주는 확실히 뛰어난 듯.

 

 

 

나는 존과 함께 보냈던 길고 긴 나날을 돌이켜보았다. 그런데 기억에 남은 날들은 너무도 적었다. 끝없는 시간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기에 결국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

세계 곳곳에서 삶의 영원히 이어졌지만, 사람들은 전보다 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함께 나이 들지 않았다. 함께 성숙하지도 않았다. 아내와 남편은 결혼식 때 한 선서를 지키지 않았고, 이제 그들을 갈라놓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권태였다.(59p)

 

 

나는 그 물건들이 소름 끼쳤다. 내가 정말로 일어나고 싶은지 어떤지 알아맞히는 자명종 시계, 내 기분을 추측하여 내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알려 주는 텔레비전, 난방비 영수증과 내 건강 상태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실내 온도를 결정하는 온도계 같은 것들이. 그런 물건에 정말로 조그마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면, 그렇다면 그들에게 지금처럼 보람 없는 일을 맡기는 것은 잔인한 짓이다. 그런 게 아니라면, 나는 추울 때 스웨터를 입으라고 가르쳐 주는 기계 따위는 필요 없다.(180p)

 

 

나는 노년이 되면 여행을 하며 살 거라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행은 젊은이를 위한 것이니까. 나이를 웬만큼 먹어서까지 여행에 나서지 못한 사람은 나 같은 꼴이 되고 만다. 태어나 자란 곳에 뿌리를 내리고 붙박이는 것이다.(184p)

 

 

실험이 실패한 까닭은 어쩌면 리즈가 그리드 위에서 보낸 주관적인 영겁의 시간에 대하여 육체 및 감각의 피드백이 철저히 부재했던 것과 관련이 있으리라고. 암흑 속에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고정되어 있다고 상상해 보라. 심지어 자신의 손가락도 발가락도, 호흡을 위해 노동하는 폐의 움직임도 느낄 수 없는 상태로, 끝날 기약도 없는 시간 동안 함께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생각뿐이라고. 통 속에 든 두뇌는 끝내 미쳐 버릴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몸이었다. 결국에는.(191p)

 

 

ㅡ 켄 리우,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中,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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