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24

 

 

페이지가 줄어드는 걸 아쉬워하며 읽었다. 칙칙하지 않고 산뜻하니 좋다.

 

 

 

심시선: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구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간절히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한 사람이 가지고 있을 확률은 아주 낮지 않을까요? 그리고 규칙적인 근사한 섹스의 가치를 너무 박하게 평가하지 마세요. 스트레스 핸들링에 그만큼 도움되는 것도 잘 없습니다. 제법 괜찮은 섹스는 감은 눈에 존재하지 않는 색깔이 떠오르게 하니, 그림일기를 쓰고 싶어질지 몰라요.

질문자: 육체적 관계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사람은요?

심시선: 사흘에 한 번씩 섹스를 하고 싶은 사람들 말고는 결혼을 안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21p)

 

 

현장에서 순순히 자수하여 삼 개월간 구금 생활을 한 기민철은 초범이며, 반성하고 있고, 희석한 염산을 사용했다는 점이 참작되어 징역 이 년에 집행유예 삼 년을 받았다. 그리고 피해자들이 민사를 막 시작하려고 할 때 자살했다. 염산을 쓰지는 않았고, 욕실 수건걸이에 목을 매달았다.

죗값을 치르지 않고 도망쳤다. 그건 도망이었다. 화수는 잊을 수 없었고 늘 화가 나 있었고 이제 그 화는 화수만을 해쳤고·····(110p)

 

 

21세기 사람들은 20세기 사람들을 두고 어리석게도 나은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몰아세우지만, 누구든 언제나 자기방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온전한 상태인 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러니 그렇게 방어적으로 쓰지 않아도 된다고, 기억을 애써 메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111p)

 

 

“억울해? 억울해 죽겠어?”

최근의 쉬는 시간에 한빛은 규림을 몰아붙였다. 처음에는 규림도 억울했다. 만약 그날 일찍 메신저를 잘 확인했으면 규림도 도영에게 화를 냈을 것이고, 한빛도 규림이 한빛의 편이란 걸 오해없이 알았을 것이다. 한빛에 대한 억울함이라기보다는 상황에 대한 억울함이었다. 그러나 한빛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규림은 억울함을 잃었다.

“매번 멍한 얼굴이었잖아. 걔가 깽판을 치게 내버려뒀잖아. 남자애들끼리 방을 만들었을 때 초대를 수락했잖아. 뛰쳐나온 적 없다고, 너. 다른 애들이 알려줄 때 너는 아무것도 안 했어. 김도영은 원래 그런 새끼지만····· 아, 못 봤다고? 산에 있었다고? 그렇다 치자. 그냥, 나는 지난 몇 년간 너희랑 이 좁고 창문도 없는 방에 갇혀 있었던 게 너무····· 더러워. 더러워 죽겠어.”

한빛은 그렇게 느낄 수 있다. 규림은 자신의 해명이 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음을 이해했다. 화수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죽은 남자가 사촌 큰누나에게 염산을 던졌을 때, 가해자가 피해자인 척할 때의 역겨움을 온 가족이 똑똑히 이해할 수밖에 없었고 규림 자신은 도저히 같은 짓을 할 수 없었다. 가해와 피해의 스펙트럼에서 스스로가 가해에 더 가까웠음을 인정해야 했다. 방전된 배터리와 나쁜 타이밍 이전에 멍청하고 멍하게 방조하고 있었음을 말이다.(173-174p)

 

 

어떤 말들은 줄어들 필요가 있었다. 억울하지 않은 사람의 억울해하는 말 같은 것들은.(175p)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그가 죽이고 싶었던 것은 그 자신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도 나의 행복, 나의 예술, 나의 사랑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가 되살아 날 수 없는 것처럼 나도 회복하지 못했으면 하는 집요한 의지의 실행이었다.(178p)

 

 

“그 모든 걸 꿰뚫어보던 사람이 왜 자기한테 일어난 일을 소화하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렸지?”

“그야 그렇잖아.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들을 할머니는 몰랐을거니까.”

“이름들?”

“가스라이팅, 그루밍 뭐 그런 것들. 구구절절 설명이 따라붙지 않게 딱 정의된 개념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시작선이 다르잖아.”(182p)

 

 

특별히 어느 지역 사람들이 더 잔인한 건 아닌 것 같아.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겐 기본적으로 잔인함이 내재되어 있어. 함부로 굴어도 되겠다 싶으면 바로 튀어나오는 거야. 그걸 인정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에 따라 한 집단의 역겨움 농도가 정해지는 거고.(235p)

 

 

여자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큰 거 해야 해요. 좁으면 남들 보고 비키라지. 공간을 크게 크게 쓰고 누가 뭐라든 해결하는 건 남들한테 맡겨버려요. 문제 해결이 직업인 사람들이 따로 있잖습니까? 뻔뻔스럽게, 배려해주지 말고 일을 키우세요. 아주 좋다, 좋아. 좋을 줄 알았어요.(269p)

 

 

빛나는 재능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사실 그들은 계속 같은 일을 했다. 그리고 조각하고 빚고 찍고····· 아득할 정도의 반복이었다. 예외는 있지만 주제도 한둘이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질문 하나에 온 평생으로 대답하는 것은 질리기 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대가들일수록 질려하지 않았다. 즐거워했다는 게 아니다. 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뛰어난 것 같은데 얼마 동안 해보니 질린다면, 그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당장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288-289p)

 

 

그 점은 나도 싫은데 외부의 충격에 영향받지 않는 인생이 어딨겠어? 그렇지만 내가 그날 이후로 곱씹고 있는 건 내 불행, 내 상처가 아니야. 스스로가 가엾고 불쌍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고. 그보다는 세상의 일그러지고 오염된 면을 너무 가까이서 보게 되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는 거야. 그걸 설명할 언어를 찾을 때까지는. 어떤 건지 이해가 가?(305p)

 

 

 

 

ㅡ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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