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25

 

 

슬립 솔기 안쪽의 취급 설명 라벨이 비쳐 보였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는 현실성이 깨졌다. 하지만 슬립과 취급 설명 라벨은 의심의 여지 없이 현실적이었다. 나는 어떤 현실은 비현실적인 효과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러자 이론가 장 보드리야르가 생각났지만 사실 그의 책을 읽어 본 적이 없었으므로 어쩌면 보드리야르가 이야기한 것이 이런 문제는 아니었을지도 몰랐다.(45p)

 

 

네, 남자들은 나한테 초연하다는 말을 많이 하더라고요. 내가 말했다. 그러면서 그런 말을 처음 듣는 것처럼 굴기를 바라죠.(66p)

 

 

나는 그럴듯한 사람인 척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다용도실에 들어갔을 때 닉의 친구들 앞에서 재치 있는 척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역겨웠다.(85-86p)

 

 

나는 또다시 모든 일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 생각에 닉이 나에게 저지른 잘못, 그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했던 냉담한 말에 집착했고, 그래서 닉을 미워하면서 그에 대한 그에 대한 내 강렬한 감정이 순수한 증오라고 정당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닉이 나에게 준 상처는 애정을 거두어 간 것뿐이며, 그에게는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았다. 그 점만 제외하면 닉은 항상 예의 바르고 사려 깊었다. 가끔 나는 이 일이 내 평생 최악의 불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주 얕은 불행이었고, 언제든지 닉의 말 한마디에 완전히 녹아서 바보 같은 행복으로 바뀔 수 있었다.(118-119p)

 

 

보비는 어디서든 잘 어울렸다. 보비는 부자가 싫다고 말했지만 집안에 돈이 많았고, 부자들은 보비가 같은 부류임을 알아보았다. 부자들은 보비의 급진적인 정치적 입장을 부르주아의 자기 비하 비슷한 것, 별로 진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고, 보비에게 고급 레스토랑에 대해서, 로마에 가면 어디서 묵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럴 때면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어울리지도 않는 사람이 된 듯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가 적당히 가난한 공산주의자임이 밝혀질까 봐 두렵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부모님과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에도 나는 내 발음이 잘난 척하는 것처럼 들리거나 벼룩시장에서 산 커다란 외투 때문에 부자처럼 보일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필립 역시 부유해 보여서 힘들어했지만 걔는 진짜 부자였다.(132p)

 

 

내가 타인에게 다정했을까? 확실히 답하기는 힘들었다. 나에게 어떤 성격이 있다고 판명되었을 때 알고 보니 다정하지 않은 성격일까 봐 걱정이었다. 내가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은 여자로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일까? <다정함>은 갈등에 대한 굴종의 또 다른 표현일까? 나는 10대 때 일기장에 이런 생각들을 적었다(238p)

 

 

내 인생의 무언가가 끝난 느낌이 들었다. 온전한, 또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나 자신의 이미지가 끝난 건지도 몰랐다. 이제 내 인생은 별 볼 일 없는 육체적 고통으로 가득할 것이고, 그 고통은 전혀 특별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병은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지 않을 것이고, 아프지 않은 척하는 것도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지 않을 것이다. 병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병에 대해서 쓴다고 해도 고통을 뭔가 유용한 것으로 바꾸지 못할 것이다. 무엇도 병을 유용하게 바꿀 수 없었다.(370p)

 

 

닉은 그날 저녁에도 그날 밤에도 전화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전화하지 않았다. 아무도 나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기다림은 점차 기다림 같지 않아졌고 그 자체가 인생 같았다. 일어나기를 계속 기다리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고, 기다리는 동안 정신을 딴 데 쏟으려고 다른 일만 하는 것이 인생 같았다. 나는 일자리에 지원하고 세미나에 출석했다. 세상은 계속 흘러갔다.(388p)

 

 

하지만 이제 난 두 사람, 또는 세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 너와 나의 관계는 너와 멀리사의 관계, 너와 닉의 관계, 너와 어린 시절의 너 자신과의 관계 등등에 의해 만들어지지.(401-402p)

 

 

넌 네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어. 다른 사람한테 못되게 구는 게 네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말이야. 스스로한테 변명하지. 보비는 부자니까, 닉은 남자니까, 난 그런 사람들한테 상처를 줄 수 없어. 오히려 그 사람들이 나한테 상처를 주려 하고 나는 방어하고 있는 거야, 하고.(405-406p)

 

 

 

ㅡ 샐리 루니, <친구들과의 대화> 中, 열린책들

,